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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부터 수개월 동안 전국 각지와 해외에서 거족적으로 전개된 3·1운동은 중국의 5·4운동과 동남아시아의 민족운동은 물론 이집트 등 피압박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특히 3·1운동은 중국의 5·4운동 전개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외부적 요인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한 사실은 『신보(申報)』·『공언보(公言報)』·『민국일보(民國日報)』등의 신문과 『매주평론(每週評論)』·『신조(新潮)』·『건설(建設)』·『국민(國民)』·『태평양(太平洋)』·『신보부간(晨報副刊)』등의 잡지가 3·1운동 관련 보도와 논평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크게 보도한 사실로도 잘 알 수 있다.
또한 중국의 신문화운동을 선도하고 있던 지식인 천뚜슈(陳獨秀)는 1919년 3월 23일 발행된 『매주평론』에 ‘조선독립운동의 감상'이란 글을 실어 우리의 3·1운동을 높이 평가하고, 중국인들의 각성과 분발을 촉구하였다. 특히 당시 5·4운동에 적극 참가하였던 저우언라이(周恩來)는 1919년 7월 『텐진(天津)학생연합회 회보』에 쓴 「발간취지」에서 "조선의 독립운동(3·1운동을 지칭 : 필자)은 일본의 쌀소동 및 5·4운동과 함께 모두 세계 신사조의 영향을 받았고 동아시아 역사상 각 민족을 더욱 자각케 한 사건이었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이는 일종의 연대의식을 표현한 것으로 매우 주목되는 견해라고 하겠다.
저명한 중국근대사 전문가인 중국사회과학원의 겅윈즈(耿雲志) 교수는 "3·1운동은 중국 인민, 특히 중국 청년들을 크게 고무시켰으며, 당시 중국 진보 언론의 열렬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또한 그는 중국의 신해혁명을 이끈 지도자 쑨원(孫文)이 "산동문제를 거론하면서 중국인은 목표를 더 멀리 두어야 하며 첫걸음으로 한국인의 독립을 지원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고 밝혔다.
일부 중국학자들은 3·1운동의 5·4운동에 대한 영향을 강조하기 보다는 오히려 중국 인민과 지식인, 학생, 언론 등이 3·1운동을 지지·성원함으로써 향후 양국의 민족운동이 밀접하게 연계되면서 외세와 제국주의의 침략에 연대하여 공동으로 투쟁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는 우리 학계의 인식과는 다소 차이가 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3·1운동과 5·4운동이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겅윈즈 교수는 3·1운동 이후 한·중 양국 인민이 서로 지원하고 원조한 반제국주의 투쟁, 특히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이 이후 더욱 긴밀한 연관성을 갖게 되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3·1운동이 5·4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 5·4운동 전개의 결정적 요인은 우리의 3·1운동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과 내부 군벌세력의 부패 등에 대한 반발이라는 내부적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3·1운동과 5·4운동을 매개로 외세의 침략에 공동투쟁하기 위해 서로 지원하고 연대하였던 한·중 양국 지식인과 민중의 공감과 유대를 오늘날에 다시 한 번 되새기며, 동북아시아 각국 사람들의 상호공존과 평화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