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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소식
한국-라트비아 수교 20주년 기념 포럼 라트비아와 한국의 역사적 경험
  • 최덕규 역사연구실 연구위원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오랜 친구같이 편안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몇 년을 알고 지내도 데면데면한 사람들이 더러 있다. 나에게 라트비아는 전자에 해당하는 경우였다. 틀림없이 처음 가보는 곳임에도 그 곳 어딘가에서 오래 전에 헤어진 연인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그래서 꼭 만나 봐야할 것 같은 그런 곳이었다. 이런 데자뷰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은 헬싱키에서 털털거리는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발트해를 건너면서였다. 그것은 바다, '발트해' 때문이었다.

라트비아의 자유와 해방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

'발트해의 전사'라는 뜻을 가진 '바랴그(Varyag)'호 그리고 '발트함대'로 유명한 '러시아의 제2태평양함대'는 한국근대사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바랴그'호와 '제2태평양함대'는 한국이 일본군에 점령되어 강제적으로 보호국과 병합의 길로 들어서게 된 러·일전쟁의 처음과 끝이었다. 이 전쟁은 1904년 2월 8일 제물포해전에서 '바랴그'호의 침몰로 시작되어 1905년 5월 28, 29일 쓰시마해전에서 '러시아의 제2태평양함대' 괴멸로 막을 내린, 해전으로 시작되어 해전으로 끝난 수수께끼 같은 전쟁이다. 유라시아대륙 동단과 서단에 위치한 한국과 라트비아는 거리상으로 약 7,300Km 떨어져 있지만 나름 공감대를 이룰 수 있는 배경에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있지 않았나 싶다.

라트비아 전쟁박물관은 라트비아 수도 리가(Riga)에 도착한 즉시 찾아간 곳이다. 중세시대 화약고로 쓰던 건물을 개조해서 쓰고 있었다. 고풍스런 외관만큼이나 눈길을 끄는 전시물들이 많았지만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입장료가 무료라는 것이었다. 갑자기 라트비아 인들이 참 좋고 훌륭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랴그'호 조타수 라트비아 출신
러시아 수병 밀베르그스
(A. Milbergs)

특히 박물관 3층에 전시실에서 만난 라트비아 출신 러시아 수병 사진은 잠깐의 감동과 긴 상념을 몰아왔다.
그는 제물포해전에서 침몰한 '바랴그'호의 조타수로 한국에 왔던 라트비아 출신 러시아 수병 밀베르그스(A.Milbergs)였다. '바랴그'호 침몰과정에서 구조된 그는 러시아 정부의 훈장을 가슴에 주렁주렁 매단 채, 1905년에 찍은 기념사진 속에서 멍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표정 속에는 일본해군에 나포되지 않기 위해 '바랴그'호가 자폭의 길을 택하면서 순국한 동료들에 대한 살아남은 자의 미안함, 1710년 라트비아가 러시아에 점령, 복속된 이후 러시아 수병으로 복무하게 된 라트비아 인으로서의 고뇌, 그리고 짜르정부의 태평양함대 증강정책에 이끌려 극동으로 오면서 부딪힌 낯설은 환경에 대한 두려움들이 새겨져 있었다.

결국 라트비아 젊은이가 1900년 미국 필라델피아 'William Cramp & Sons'조선소에게 건조된 러시아 전함 '바랴그'호를 타고 제물포 앞바다에서 일본해군의 공격으로 죽음의 고비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이 우여곡절 드라마는 밀베르그스 개인의 오딧세이인지도 모른다.

한국과 라트비아의 역사 오딧세이를 쓰다

2011년 10월 18일, 라트비아 외교부 청사에서 열린 "한국-라트비아 수교 20주년 기념 포럼"은 한국과 라트비아의 역사 오딧세이를 쓰는 자리가 되었다.

라트비아와 한국이 겪은 독립회복의 역사적 경험은 서로 닮아 있다. 이는 제정러시아의 동아시아정책사와 더불어 향후 양국 간 공동연구가 활성화되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특히 양국의 독립회복 과정에 대한 비교는 포럼 제3부 "한국과 라트비아의 역사적 경험" 분과에서도 그 연관성이 확인되었다. 전 외교안보연구원장을 역임한 이순천 교수(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가 발표한 "국가의 정체성과 계속성 : 발트국가들과 한국의 사례들"과 라트비아의 전 헌법재판소 소장을 역임한 튜리바 비즈니스행정학교 아이바르스 엔진스(Aivars Endzins) 교수의 "라트비아 독립회복에 관한 고찰"에 관한 발표는 이를 재확인하는 자리였다.

엔진스 교수가 라트비아의 독립회복 과정을 개괄적으로 설명했던 반면, 이순천 교수는 "어떻게 50년 이상 소멸됐던 국가가 부활할 수 있었을까?"라는 문제제기를 통해 한국과 라트비아의 독립회복 과정에서 나타난 공통적인 특징들을 분석했다. 이 교수는 1991년 소련 붕괴로 독립을 회복한 발트3국이 소련에서 분열된 신생국이 아니라 병합 이전 독립국가로서 주권과 독립을 회복했음을 선언했고, 대부분 서방국가들로부터 병합되기 전과 동일한 국가로서 계속성을 승인받았음을 지적했다. 그의 논지는 발트3국이 1940년 나치 독일과 스탈린 간의 '립벤트롭-몰로토프 밀약'에 의해 제2차 세계대전 중 소련에 강제병합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행위가 국제법을 위반한 불법행위이기에 소련의 병합에도 불구하고 이들 국가는 법적으로 계속 존재해왔음을 입증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발트3국의 부활이 소멸된 국가가 재수립된 유일한 사례는 아니다. 우리나라도 일본 식민통치로부터 주권과 독립을 회복하여 재수립된 국가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과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강압적으로 체결된 조약이기에 처음부터 무효임을 주장해 왔으며, 이는 1965년 한일협정에서 1910년 이전에 체결된 모든 조약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 것으로도 입증된 바 있다. 이에 이 교수는 1947년 유엔총회가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 승인하는 결의를 채택한 것은 국가의 승인이 아닌 정부의 승인으로서 일제 강점기에도 한국은 법적으로 계속 존재해 왔음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결국 한국과 라트비아의 독립회복에 대한 역사적 경험은 국제사회가 불법적인 무력사용에 의한 점령이나 병합에 대해 시효 또는 법적 효과를 인정하지 않고 있음을 반증해 준다. 왜냐하면 양국의 사례는 '누구도 불법행위에 의해 법적 이익을 얻을 수 없다'는 법언을 다시 확인한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