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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Q&A
조일통교를 전담했던 쓰시마번의 상급무사는 왜 밀무역에 가담했을까?
  • 윤유숙 독도연구소 연구위원

Question

조선후기, 조일통교를 전담했던 쓰시마번의 상급무사가 밀무역에 가담하여 처형당한 일이 있다고 한다. 쓰시마번의 상급무사는 왜 밀무역에 가담했을까?

Answer

조선후기 250년이 넘는 조일(朝日)통교 속에서 이루어진 크고 작은 밀무역의 뒤에 조선관리나 쓰시마번(對馬藩) 관리가 가담한 예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조선의 경우 대개는 대일 통교업무를 보는 역관이나 하급관리가 많다. 쓰시마번의 경우 번(藩)의 최상급에서 최하급무사, 농민, 초닌(町人), 의사, 승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부산왜관에 체재하고 있었는데, 필자가 판단하기에 밀무역에 손을 담근 자는 하급무사와 상인이 압도적으로 많지 않았나 싶다. 왜관을 중심으로 해서 서로 접촉할 기회가 많다는 점이 동기유발(?)의 원인으로 작용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런데 다소 드믄 예로, 1656년 사고 시키에몬(佐護式右衛門)이라는 상급무사가 쓰시마를 방문한 문위행(조선역관으로 구성)을 상대로 '금제품을 매매'한 혐의로 처벌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문위행이 승선하고 있던 선박이 풍파를 만나 파선되는 바람에 그들의 배에 금제품이 적재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한다. 발각 후 번 당국이 사고에게서 대철포(大鐵砲) 3정(挺)을 몰수한 점으로 보아 거래된 물건은 아마 무기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에도시대에 무기류의 해외 판매는 막부법에 의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때 조선역관에게 판매된 것이 일본의 무기였다면 이는 중대범죄였다. 그 이외에도 번사(藩士), 초닌을 포함해서 약 20여 명의 쓰시마번 관계자가 금제품 적재를 주선한 죄목으로 처벌되었다.

사고는 셋푸쿠(切腹) 처분을 받았으니 사실상 사형에 처해진 셈이다. 그는 사건 당시 문위행의 송영(送迎)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고, 사건 바로 전해인 1655년에는 조선통신사의 송영을 담당하기도 했다. 조선에 임시 사신으로 도항한 경험도 많았고, 무엇보다 1651년 조선이 관영무역의 대가로 쓰시마번에게 지급하는 공목(公木 : 목면) 가운데 300동(同)을 쌀 12,000석(石)으로 대체하는 '환미제(換米制)'를 처음 실현시킨 인물로도 유명하다. 농지가 적었던 쓰시마에서 이 쌀은 소중한 식량으로 기능하였고, 쌀 지급기한이 다가올 때마다 쓰시마번은 조선에 사신을 보내 기한을 연장시키기 위해 애썼을 정도이니 사고가 이루어낸 공적이 혁혁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조선통교에서 쌓은 실적을 인정받아 번내에서 안정된 위치를 확보했을 사고가 그로부터 몇 년 되지도 않아 막부가 금하는 '무기매매'를 감행했다는 사실이 실로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시기적으로 당시 일본제 무구류에 대한 조선의 수요가 매우 높았다는 점이 이 사건의 배경으로 작용했겠지만, 일설에 의하면 사고의 공적을 시기하는 자가 막부에 밀고하여 사태가 불거졌다고도 하니 막부가 알아버린 이상 쓰시마번으로서도 사고의 처형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고의 위치를 고려하면 그의 행동이 과연 철처하게 번청의 인지 영역 밖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어쩌면 사고는 조선으로부터 환미제에 대한 동의를 얻어내는 대신 '무기류의 제공'이라는 대가를 치렀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근거 없는' 상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