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1년 한 해 동안에 동아시아 지역에서 일어난 가장 큰 사건·사고라고 한다면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의 급습, 그에 이은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이하 원전)의 폭발과 방사능의 대량 유출이라는 실로 가공할 만한 재해일 것이다. 그것은 자연재해이자 인재(人災)이기도 한 복합 재해였다. 일본의 관측 사상 최대 규모 9.0의 초대형 강진, 사망자와 실종자를 포함하여 1만 9천여 명의 인명을 앗아간 쓰나미 대참사, 16조 9천억엔이라는 막대한 피해액과 재해로 인한 실업자 12만명, 멜트다운으로 녹아내린 핵연료를 회수하고 원자로를 해체하는 데 최장 40년이 걸린다는 역사상 최악의 원전 사고, 후쿠시마현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방사능에 오염된 토양과 해양과 대기, 오키나와를 포함한 일본열도 전역에서 검출되고 있는 방사성 세슘 등 일본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지진 이후 일본 사회 패러다임의 변화
동일본 대지진은 그 규모에 있어서도, 원전의 새로운 과제를 제기한 점에서도 일본 사회의 역사적인 전환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확실히 3.11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일본은 위기 이전과 다른 사회로 변모해 가고 있다. 시위를 잘 하지 않던 일본인들이 원자력 공포를 체험한 뒤 수천, 수만 명씩 거리로 나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에너지 정책을 바꿔 나가자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일본 여론은 사고 후 완전히 '탈원전' 혹은 '반(反)원전' 으로 이행하였다. 또한 12월 아사히신문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70%가 총리를 국민투표로 뽑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답했고, 원자력 등 에너지 정책의 방향을 국민투표로 정하자는 의견에도 68%가 찬성했다. 일본 국민 대다수는 민의를 반영하지 못하는 현 정치 시스템을 바꾸고 직접민주주의를 도입하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사회의 패러다임이 조금씩 바뀌고 있는 징표로 읽힌다.
다른 한편, 일본 국내에서는 자위대의 위상 강화를 외치고 독도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는 등 내셔널리즘이 강화되는 모습도 보인다. 2001년의 9.11이 미국을 네오콘의 시대로 밀어넣었듯이, 3.11이 일본 사회의 보수화와 경직화를 심화시킬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국민의 역량을 국가 부흥에 집중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경향은 내향적 내셔널리즘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그것은 때마침 재작년부터 학교 교육에서 강조하기 시작한 '국가와 향토에 대한 사랑'과 결합해 일본 사회를 한층 폐쇄적인 분위기로 만들 수 있다. 교과서 기술에서 보듯이 일본의 일각에서는 역사 인식과 영토 주권을 내셔널리즘을 고양시키는 호재로 이용하려는 움직임이 꿈틀대고 있다.
건전한 변화의 추동력, <역사학연구회>
3.11 이후의 일본은 과연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필자는 그와 관련하여 일본 역사학계의 동향에 주목하고자 한다. 일본의 역사 인식에 큰 영향을 미쳐온 역사학계의 움직임은 향후 일본 사회의 변모를 생각할 때 충분히 참고할 만하다. 또한 자연재해에 대한 역사연구자의 책무를 일깨운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일본의 대표적인 역사연구자 단체의 하나인 <역사학연구회> 는 2011년 5월 21일 총회에서 '3.11 이후의 역사학연구회의 책무' 라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학회지 《역사학연구》 84호(2011년 10월)에서 '동일본 대지진·원전사고와 역사학' 이란 주제의 긴급 특집을 게재하였다. 이들은 역사학의 담당자로서 사회적 책임을 자각한다는 입장에 서서 다음과 같은 결의와 함께 몇 가지 과제를 설정하였다.
첫째, 이번 대형 지진과 쓰나미에 대해서는 869년 동북 지방에서 발생했던 정관(貞觀)대지진을 비롯한 과거의 지진·쓰나미의 교훈을 살리지 못한 것이 피해를 키운 한 원인이 되었다고 반성하고, 재해를 둘러싼 역사연구의 성과를 사회에 환원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고 결의하고 있다.
둘째, 역사학 관계자의 사회적 책무 중 하나로서 역사자료의 보전·복원 활동을 강조하고 있다. 사료를 재해로부터 구출하는 일은 지역의 '기억' 과 '역사' 를 되살리는 것이고, 사람들의 생활 재건과 밀접히 결부된 장래 지역사회의 재생을 준비하는 작업이라고 평가한다. 이미 일본은 1995년 한신대지진을 계기로 '역사자료 네트워크' 라는 자원봉사조직이 고베대학에 설립되어 일본 각지에서 활동해 왔는데, 이번 대지진 직후 미야기현·후쿠시마현·지바현등 여러 지역의 네트워크가 협동하여 자료의 구출·보전에 나섰다.
셋째, 이번 원전 사고를 '인재' 로 규정하고, 원전 문제를 역사학의 본격적인 검토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인식이다. 전력회사와 역대 정부가 '안전 신화' 를 퍼뜨려온 것을 비판하고, 과학기술 과신의 위험성, 경제성장 우선주의의 문제, '원자력의 평화이용' 정책의 도입 경위 등을 정면으로 다룰 것을 제기하고 있다. 여기에는 피폭국 일본의 역사학계가 그간 원전 문제를 도외시해 왔다는 반성이 담겨있다.
넷째, 원전 사고와 관련한 정보의 통제·조작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 것이다. 사고 발생 후 정부·도쿄전력·전문가·매스컴 등이 신속하고 정확하게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정보의 일원화를 이유로 정보 발신을 규제 혹은 자주규제하는 움직임이 확대되었다고 지적한다. 또한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의 사례를 상기시키면서, 재해를 계기로 하는 통제 강화에 대해 강한 경계를 나타내고 있다.
지진사·재해사 연구나 역사자료의 보전·복원 같은 역사 연구자의 고유한 본령에 한정하지 않고, 원전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나 사회의 통제 강화 움직임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특집 논문에서는, 아사히신문을 포함하여 일본의 매스컴이 원전 사고에 관해 도쿄전력이나 정부의 발표를 흘려보내는 홍보기관으로 화했다고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역사학연구회> 는 일본 역사학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아카데미즘 단체의 하나이다. 이들의 활동과 연구 성과의 발신이 3.11 이후 일본 사회의 건전한 변화를 추동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