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재단은 지난 5년간 북으로는 남부시베리아의 하카스코-미누신스크 분지와 투바공화국, 몽골의 고비 알타이 아이막과 오브스 아이막, 그리고 서로는 카자흐스탄 동남부 지역과 키르기스스탄의 중ㆍ동부 지역 등지에 분포하는 선사 및 고대 바위그림을 현지 학술기관 및 연구자들과 공동으로 조사하였으며, 그 성과를 토대로 하여 바위그림 조사 자료집을 지속적으로 발간하여 왔다.
그동안 진행한 일련의 바위그림 조사 및 연구는 무 문자 시대에 남겨진 도상 자료들을 통하여 중앙아시아의 선사 및 고대 문화의 세계를 살핌과 동시에 한국 민족 문화의 계통성을 파악해 내기 위해서였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국사는 고조선으로부터 시작되어 부여 그리고 고구려 등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연속성을 띠고 있다. 그러나 그 민족적 정체성과 문화적 기반 등을 살펴내는데 기반이 되는 문헌 자료가 없음은 물론이고 물질적인 증거들도 대단히 빈약한 실정이다.
더욱이 지금 현재의 영토 개념을 놓고 볼 경우, 한국 민족 문화의 형성과 발전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던 역사 문화적 공간은 안타깝게도 중국의 동북 지역 속에 편입되고 말았다. 그에 따라서 이 지역 선사 및 고대 문화의 주인공들이 남긴 유적들을 우리는 자유로이 접근도 할 수 없게 되었고, 또 그와 같은 유적들을 중국 학계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으로 포장한 한족 중심적 시각, 즉 중화주의적인 역사관에 따라 해석하면서 한국 상고대의 문화사는 해괴한 모양으로 왜곡되었다.
광역의 문화권 속 한국 민족문화의 계통성 추적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중국의 동북공정 등 역사 왜곡에 근본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보다 적극적인 방안을 마련하고 또 합리성이 있는 논리를 개발하여야 했는데, 그 일환으로 시작된 것이 한국 민족 문화의 기원과 형성 과정 조사 연구 사업이었다. 익히 잘 알려진 것처럼, 한국 상고사를 객관적으로 기술해 놓은 당대의 문자 자료는 없다. 그에 따라서 무 문자 시대의 문화상을 살필 수 있는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들을 분석ㆍ연구하는 일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보다 광역의 문화권 속에서 한국 민족문화의 계통성을 추적해 내는 일들이 시급히 추진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한반도 북부와 만주, 몽골 나아가 남부시베리아와 알타이 산맥 동서를 아우르는 광역의 문화권을 설정하고, 그와 같은 권역 내에서 살펴지는 각 시기별 문화의 보편성을 추출해 내고자 하였다. 그런 다음 그것과 한반도의 선사 및 고대 문화를 서로 비교 연구 하여 우리 민족 문화의 기원 과정을 더듬어내고 또 시대의 추이에 따른 변화상과 갈래를 분석해 내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 조사 및 분석 연구의 대상으로 바위그림이라고 하는 선사 및 고대 조형예술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바위그림은 이미 구석기 시대부터 그 시대의 문화 주인공들의 손에 의해 그려지기 시작하였으며, 청동기와 철기시대 그리고 고대 등 그 이후 차례로 이어지는 문화기별로 그와 같은 현상은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바위그림 속에는 각 시기별로 해당 시기의 사회와 문화상을 반영하는 독특한 제재들이 그려져 있으며, 동시에 그것들 가운데는 앞뒤로 연속되는 문화기와 서로 구별되는 시대 양식도 또한 반영되어 있다. 그런 까닭에 바위그림 속 도상들을 통하여 동질과 이질의 문화권을 설정할 수 있고, 또 특정 민족과 그 문화의 계통성도 파악해 낼 수 있는 것이다.
키르기스스탄 고대 유목민들의 문화상 소개
이와 같은 일들을 추진하기 위하여 지난 5년간 남부시베리아, 몽골, 카자흐스탄 그리고 키르기스스탄 등지의 바위그림을 조사하였으며, 그 결과물을 하나씩 차례대로 발간하였다. 그리고 이번에 발간된 『키르기스스탄 중ㆍ동부 지역의 암각화』 는 지난 2010년에 키르기스스탄의 탈라스, 나르인 그리고 으이스이크 - 쿨 등지의 주에 분포하는 암각화들을 조사하고, 키르기스스탄 국립대학교 박물관 연구센터와 공동으로 발간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은 T.차르기노프, O.솔토바에프, M.졸도쇼프 등 키르기스스탄 측 공동 연구자들과 함께 집필하였다. 키르기스스탄의 선사 및 고대 문화와 암각화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조사 개요와 유적지 현황, 키르기스스탄의 지정학적 상황, 키르기스스탄의 고대문화, 키르기스스탄 암각화 연구사 그리고 키르기스스탄 중동부 지역 암각화의 세계 등을 차례로 소개하였으며, 그런 다음 2010년도에 조사한 유적지들과 현지에서 직접 촬영하고 또 채록한 형상들을 소개하였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유적지는 모두 8곳이다. 탈라스 주 소재의 볼쇼이 차츠케이, 말르이 차츠케이 그리고 카므이르든 벨리 등 세 곳의 유적지와 나르인 주의 코크 사이 유적지, 으이스이크-쿨 주의 촐폰 아타, 카라 오이, 총 사르 오이, 오르노크 등이다. 공동 조사단은 모두 여덟 곳의 유적지에서 약 1,893개의 암면에 그려진 그림의 내용을 파악하였고, 그 과정에서 3,256개의 형상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약 300여개의 암면에 그려진 형상들을 채록하였다.
이 책 속에는 그와 같은 자료들이 고스란히 제시되어 있다. 그동안 국내에는 한 번도 제대로 소개되지 않은 중앙아시아의 산악국가, 아시아의 알프스라 불리는 키르기스스탄과 그곳에서 일찍부터 삶의 터전을 꾸리고 생활을 영위하였던 선사 수렵 및 고대 유목민들의 문화상이 암각화의 형식으로 소개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이 즐겨 사냥하였던 동물과 그 사냥방법, 입었던 의복, 탔던 마차와 말의 이용 방법, 남녀 관계, 의례, 활과 창 그리고 전투용 도끼를 들고 싸우는 모습, 기마전사 등이 적나라하게 제시되어 있다.
북방 수렵문화권 속 한국 선사문화 계통성 발견
이 책에서 소개하는 암각화와 그 도상 하나하나는 이 지역에서 거주하였던 수렵 및 유목민들이 그들의 손으로 직접 남긴 그림문자(繪文字)이다. 따라서 각각의 도상들을 통하여 이 문화 공간 속에서 지나간 시간과 사라져간 민족들, 각 민족들이 이루었던 문화와 이상향 그리고 세계관 등에 대해 논할 수 있고 또 당대의 첨단문화와 이민족 간의 교류와 투쟁 등의 모습을 복원해 낼 수 있다.
이와 같은 도상 자료를 통하여 키르기스스탄의 선사 및 고대 문화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주변 지역과의 상호 관련성과 지역적 독자성도 살펴낼 수 있다. 또한 북방 수렵 및 유목민들 조형예술의 보편성과 시대상을 반영하는 제재와 그 성격, 그리고 동질의 문화권 등을 설정해 낼 수 있다. 물론 그 속에서 한국 선사 및 고대문화와의 계통성도 살펴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