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워싱턴 특파원 시절이던 2005년 1월 24일, 미국기업연구소(AEI)에서 열린 '네오콘 포럼'에 참석했다. 조지 W. 부시(George W. Bush) 대통령의 재선을 축하하는 신보수주의자들의 단합대회 성격이었다. 두 시간 넘게 진행된 포럼에서는 South든, North든, Korea라는 단어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포럼이 끝난 뒤 〈네오콘선집(Neocon Reader)〉의 저자 어윈 스텔저(IrwinStelzer)와 '네오콘의 이데올로그'라는 찰스 크라우트해머(Charles Krauthammer)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한반도나 동북아 문제에는 관심이 없는가?" 그들이 답변했다. "한반도와 동북아는 중동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평화롭고, 안정적인 지역이다. 미 정부는 앞으로도 중동정책에 집중하고, 동북아 정책은 현상을 유지하는데 주력할 것이다."
20세기와 21세기 국제정치의 중심 변화
20세기 국제정치의 중심은 중부유럽과 중동이었다. 중부유럽은 서유럽과 러시아가 충돌하는 지정학적 요충이었고, 중동은 석유라는 전략물자의 공급지였다. 20세기 말 소련이 몰락하면서 중부유럽의 지정학적 가치는 떨어졌고, 유일 강대국인 미국의 관심은 중동에 집중됐다.
그러나 '테러와의 전쟁'을 천명한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전쟁 등 중동정책에 몰두하는 사이에 미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국제적인 평판과 함께 조금씩 하강곡선을 긋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어느사이 '잠자는 사자'였던 중국이 크게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21세기로 접어들면서 동북아시아가 글로벌 경제와 국제 정치의 핵심 지역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동북아의 중심인 한·중·일 세나라는 2010년 기준으로 전 세계 인구의 22.3%, 전 세계총생산(GDP)의 19.6%, 교역량의 17.6%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 유럽연합(EU)과 맞먹는 규모다.
경제적 영향력이 커지면 정치적 위상도 달라지고 안보적 변동 요인들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우선 초강대국 미국이 동북아에 발을 더 깊이 들여놓기 시작했다. 중동 지역에서 발을 뺀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대통령은 올해 초 새로운 국방전략을 발표하면서 동아시아 지역으로의 회귀를 선언했다. 여기에 석유 수출을 통해 국력을 어느 정도 수습한 러시아가 시베리아 개발에 공을 들이며 동북아로의 접 근을 모색하고 있다.
동북아의 평화가 곧 세계의 평화와 직결되는 상황 도래
그런 상황들이 맞물리면서, 동북아 지역의 정세는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한국과 일본이 독도 영유권과 과거사를 둘러싸고 논쟁을 벌인데 이어, 중국과 일본이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 영유권 및 과거사를 둘러싸고 물리적 충돌 직전의 상황까지 돌입했다. 그런 과정에서 눈부신 경제 성장과는 크게 대비되는 동북아 지역의 안보적 취약성이 고스란히 노출되고 말았다. 국제안보 전문가들은 동북아, 더나아가 동아시아에서의 점증(漸增)하는 영토 분쟁은 미국과 중국이세력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하고, 일본이 센카쿠 섬을 국유화하고 하는 단발적 사건들 때문이 아니라, '미·중 간의 충돌이라는 거대한 구조 속에서 나타나는 변화'라는 주장이다.
오랫 동안 동북아에서는 지역 전체를 포괄하는 대화나 협력의 시스템이 거의 작동해오지 않았다. 오히려 '한·미·일 대 북·중·러'라는 냉전구조가 여전히 남아있고, 그 틀 안에서 남북과 북·미, 북·일, 일·중 등이 양자관계를 통해 크고 작은 변화를 모색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는 동북아의 평화가 곧 세계의 평화와 직결되는 상황이 됐고, 이 지역에서도 다자적인 협력 움직임이 태동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한·중·일 3국 정상회의다. 세나라 정상은 다섯 차례의 회담을 가졌고, 서울에 3국 정상회의 사무국이 개설됐다. 지난 5월에 열린 5차 한·중·일 정상회의에서는 3국간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위한 협상에 착수한다는 합의도 나왔다. 세 나라의 산업은, 물론 경쟁 관계에 놓인 분야도 있지만, 상호보완적인 측면도 강하다. 따라서 공통의 경제적 이익을 확대하는 것이 동북아지역 안정의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세 나라만의 협력은 곧바로 미국의 견제를 불러오게 된다. 미국 정부는한·중·일 사무국에 대응하는 한·미·일 사무국의 개설도우리 정부에 타진했다고 한다.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 중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의 역할이다. 다시 말해 6자회담이, 콘돌리자 라이스(Condoleezza Rice) 전 미 국무장관이 제안했던 것처럼, 동북아 안보 포럼으로 확대될 것인가이다. 참가국들은 이미 6자회담 내에 동북아 평화, 안정을 위한 공동 노력과 항구적인 평화체제 건립 등에 합의한 바 있다.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우리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이다. 한국이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해서 교류를 활성화할때 미국이나 중국 등에 더 큰 외교적 지렛대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경험으로 증명됐다. 따라서 차기 정부에서는 단절된 남북관계를 복원하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항구적인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은 남북한의 통일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는 목표다. 여론조사를 보면, 통일을 지지하는 한국인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통일이 가져올 안보, 경제 등 모든 분야의 엄청난 효과를 국민은 더 깊게 인식해야 한다. 그것은 동북아역사재단이 수행해야 할 역할 가운데 하나일 수도 있다.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우리의 기회와 역량을 최대한 살려나가야
동북아 정세는 내년 들어 더욱 큰 변화의 계기를 맞게 된다. 올해 북한의 김정은이 최고통치자의 지위에 오른 데 이어, 러시아에서는 블라드미르 푸틴(Vladimir Putin) 대통령이 재집권했다. 중국에서도 곧 10년만의 지도부 교체가 이뤄진다. 미국에서는 11월에, 한국에서는 12월에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고, 일본도 곧 정권교체가 예상된다. 따라서 내년은 동북아와 주변의 주요 국가들이 새 정부 출범에 맞춰 새로운 동북아 정책을 가다듬고 선보이는 시기가 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내년부터 2년 동안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이사국의 역할을 맡게 됐다. 마침 유엔 사무총장이 한국인인 반기문 총장이고, 국제안보와는 조금거리가 있지만 세계은행(WB)의 총재도 역시 한국계인 김용총재다. 일부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통일 외교를 주도할 수 있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라는 말도 한다. 이들의 말이 성급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 번영을 가져오는데 우리가 가진 기회와 역량을 최대한 살려나가야 할 시기를 맞이한 것이다. 우리가 그런 기회를 살려나갈 만한 국가적 의지와 역량을 갖고 있는가. 남은 문제는 그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