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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Q&A
최근 부각되고 있는 광해군의 역사적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 오항녕 전주대 교수

Question

최근 광해군을 다룬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광해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광해군의 역사적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Answer

예전 어떤 공영방송 프로그램에서 "인조반정은 조선을 기울게 한 치욕의 역사로 남았다"고 단정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조선을 두 번이나 침략하여 조선 백성의 생활터전을 유린하고 포로로 잡아간 후금에 대해서는 '대륙에 떠오르는 후금', '중원을 점령한 후금', '여진 1만이 되면 천하가 감당할 수 없다'는 말로 그 '위세'를 치켜 올리며 조선의 패배를 기정사실화했다. 후금 방송인지 조선 방송인지 알 길이 없다. 나는 이를 패배주의라고 부른다. 패배주의. '강자를 따르라'는 식민주의자들의 요구에 포섭된 정서. 뭔가 신중한 듯 보이지만 상황을 장악하지도 역동성을 창출하지도 못하는 무기력의 다른 표현. 아무리 광해군을 띄우고 싶었어도, 적어도 '침략'이 먼저 지적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대세 추종'보다 '자존심이 있는 패배', '자존심이 있는 죽음'을 택한 데 대해서는 경의를 표 하는 것이 순서가 아니었을까? 침략에 대한 '저항'과 '상처'에 대해서 '가슴 아프게' 동감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광해군의 중립외교·실리외교의 실상

이이와 유성룡이 제기했던 개혁정책인 대동법(大同法)은 시작하자마자 정책에 대한 광해군의 몰이해와 방납(防納)의 기득권에서 헤어나지 못한 북인(北人) 정권의 방해에 의해 좌절됨으로써 민생안정과 재정확보는 좌절되었다. 또한 끝없이 이어진 역모의 조작으로 사회통합은 물 건너갔다. 재위 기간 내내 광해군은 풍수설과 참위설에 빠져 대규모 궁궐 공사로 날을 보냈고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짰다. 군비를 챙길 군기시(軍器寺)의 철도 궁궐을 짓는데 쏟아 부었다.

1619년 심하전투(深河戰鬪)에 파병하면서도 훈련은 커녕 식량과 군비조차 제대로 갖추어주지 않고 군사를 전장에 내몰았다. 결과는? 1만 3천 명 중, 9천 명 전사. 심지어 명나라 황제가 조선의 부상자와 전사자 가족에게 전달해달라고 준 위로금 은(銀) 1만 냥조차도 광해군이 착복하여 궁궐공사에 쓴다. 이쯤 되면 누가 조선의 임금인지 헷갈린다. 이 무렵 광해군은 후금을 구슬릴 계책(?)에 분주하다. 그러나 내치(內治)가 망가져서 운신의 폭이 적었던 군주 광해군이 할 수 있는 대책은 뻔했다. 눈치 보기. 이것이 이른바 광해군의 중립외교, 실리외교의 실상이다. 하긴 언제나 기회주의는 실리주의라는 이름으로 행세하였다.

광해군에 대해 우리가 새로 알아야 할 것

'물타기'. 형인 임해군,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인 일에 대해서는 '정치의 비극'이라느니, '정치권력의 속성과 허무함'이라며 정치권력의 속성 탓으로 돌린다. 그러니 나머지 죽어나간 사람들은 고려 대상조차도 아니다. 물타기는 반정 세력과의 비교로 이어진다. 반정 이후에도 '별로 나아진 것이 없다'는 논리이다. 말하자면 '그 놈이 그 놈이다', '갈아 봤자 별 수 없다'는 버전인 셈이다. 실제로 광해군대 세력가들이나 반정 이후 공신(功臣)들이나 마찬가지라는 사료도 있다. 그러나 공신들의 이러한 특권세력화가 끊임없이 견제되고, 공론화되었던 것이 바로 반정 이후 인조대 정치사이기도 했다. 반정을 일으킨 사람들이 나는 안쓰럽다. 도저히 살 수 없어 일으킨 반정이었지만, 도대체 그렇게 망가진 나라를 어떻게 끌어가려고 반정을 했을까? 조선 사람들은 광해군 재위 15년 동안의 시간을 잃어 버렸다. 그 당시 명나라가 1순위로 두려워했던 조선이 조금이라도 정상적으로 경영되고 운영되었다면, 적어도 17세기 초반 우리가마주쳤던 호란(胡亂)의 양상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