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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광개토왕 1600주기 학술회의를 통해 본 광개토왕의 생애와 동아시아 세계관
  • 연민수 역사연구실 연구위원

고구려사의 증언록 '광개토왕비'

우리 민족사에서 기억에 남는 인물을 선정하라면 고대사 영역에서는 단연 광개토왕이 필두일 것이다. 만주 벌판을 무대로 역동적으로 전개된 고구려의 역사가 주변 강대국에 둘러싸인 분단시대의 현실에 투사되어 민족적 감정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압록강 이북의 광활한 지역은 고구려 700년사를 비롯하여 그 후의 발해의 영역으로 1천년 이상의 한민족사의 활동무대였던 까닭에 중국의 동북공정과 맞물려 한번쯤 화려했던 광개토왕시대를 회고하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닌가 생각한다.

광개토왕의 인물상은 대왕의 생애를 기록한 비문이 존재하기 때문에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광개토왕시대의 생생한 역사의 증언록인 이 비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비문 모두에서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은 천제의 아들임을 자부하고 고구려 건국의 기틀을 완성하고 황룡을 타고 승천한다. 그의 후손 광개토왕도 지상 통치의 소임을 다하고 국강상(國罡上) 언덕 위에 영면하여 올해로 1600주기를 맞이했다. 거대한 대왕의 능비는 지금도 한치의 흔들림이 없이 압록강변 국내성터에 당시의 위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지난 10월 18일과 19일 이틀에 걸쳐 '광개토왕비의 재조명'을 주제로 재단 대회의실에서 개최한 학술회의는 비문에 나타난 논쟁점을 점검하고 연구의 기초가 되는 탁본연구 등 기초자료에 대한 검토를 통해 그간의 연구의 도달점과 공동의 인식을 모색해 나가는 자리였다. 모두 15명의 발표가 있었고 종합토론에서 15명의 토론자와 함께 회의장을 꽉 채운 청중의 뜨거운 관심 속에서 진행되었다.

동북아의 평화적 공동체의 실현을 목표로 했던 광개토왕

약관 18세 청년기에 즉위한 광개토왕의 생애는 22년간의 즉위 동안 전쟁의 시대라고 할 만큼 역동적인 군사활동을 통해 국가의 안정과 동북아시아에서의 고구려의 위상을 높이는 위업을 달성했다. 대왕이 즉위하기 전 18년간의 유년기는 고구려사에 있어서 외침을 많이 받은 국가적 고난기였다. 이미 그의 조부시대에 전연(前燕)의 침략으로 미천왕릉의 시신이 도굴되고 5만여 명의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고 궁궐과 환도성이 파괴되는 대참사가 있었다. 371년에는 백제의 평양성 침공으로 고국원왕이 피살되었다. 태자로 책봉되기 1년 전에는 요동지방을 둘러싸고 후연(後燕)과의 치열한 전쟁이 있었다. 이렇듯 대왕의 유년기는 주변제국과의 치열한 전쟁 속에서 성장했고, 고구려의 수호라는 대명제가 국가적 과제로 그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대왕의 22년간 치적을 기록한 광개토왕비는 북방의 3개조(朝), 남방 5개조의 전투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비문의 기록은 단지 광개토왕의 훈적을 사실적으로 나열한 것이 아니라 주변 동아시아제국에 대한 고구려국의 인식을 반영한 기획된 논리에 의해 편집되었다. 당연 고구려국 중심의 천하질서를 구축한 광개토왕의 국가적 이념과 사상이 담겨져 있다.

전쟁기사의 중심은 백제였다. 대왕이 평생 공파한 64성 전체와 1400개 촌의 반을 백제전에서 획득했다. 조부의 죽음에 대한 철저한 응징이었다. 신라에 대해서는 불안정한 조공관계를 왜의 침입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고구려의 천하질서 속에 포함시키는데 성공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신묘년조의 고구려의 속민이었던 백제, 신라를 왜가 도해, 격파하여 신민으로 했다는 내용이다. 일찍이 일본근대사학의 한반도 남부지배설의 근거가 되기도 했으나, 이 기사야말로 고구려의 한반도남부에 대한 영토관, 국제의식을 보여주는 일절이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고구려는 남방전선에의 정토의 명분으로 백제와 동맹한 왜를 고구려의 천하질서를 교란하는 세력으로 자리매김하고 고구려의 성전을 정당화하는 필법을 구사했다. 이는 고구려의 정치적 이념인 덕치주의에 입각한 유교적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 필요한 요소이기도 했다.

수묘인연호(守墓人煙戶) 조에 보이는 구민을 제외한 36개의 새로 편입된 성 중 21개가 백제지역에서 공파한 성이다. 원래 광개토왕은 자신이 공파한 지역으로부터 데리고 온 한예(韓穢)의 민을 수묘(守墓)시키라고 했다. 광개토왕의 묘역을 지키는 수묘인의 상당수를 백제지역의 백성들로 배치시킨 것은 비문에 나타난 백제전투의 승전보를 물증하는 것이다. 비문과 전리품으로서의 수묘인을 일체화시켜 고구려가 백제우위의 국제관계를 현실의 장에서 확인시켰다.

고구려의 남방정책은 정복지에 군대를 주둔시켜 지배하는 방식이 아니라 복속의례를 통한 정치적 상하관계를 맺고 조공, 논사를 받는 것이었다. 이것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주변제국에 대한 천하질서의 구현과, 나아가 고구려의 한반도 남방에 대한 통일적 공통체의 실현이 국가적 지향점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광개토왕비의 진실 추구를 위한 향후의 노력

북으로는 같은 부여족에서 갈라져 나온 동부여를 속민(屬民)으로 간주하고 위무했으며, 미개민족으로 인식한 숙신을 토벌하고 거란의 일족인 패려(稗麗)의 공격을 철저하게 응징했다. 그러나 광개토왕시대에 요동지방을 둘러싸고 공방전을 벌였던 후연과의 전쟁은 보이지 않는다. 영락 17년조를 후연기사로 상정하기도 하지만, 진실은 비문에서는 의도적인 생략이다. 이것은 고구려국의 향후 예측되는 상황, 성공 가능한 목표로서의 지향성이 작용하였다고 생각된다. 즉 비문 작성자인 장수왕은 앞으로 전개될 상황에 대한 대비, 즉 후연을 계승한 북연과의 마찰을 피하면서 유동적인 동북아의 정세 속에서 고구려국의 안정을 위한 전략이었다.

광개토왕비문은 당대의 체험자에 의한 기록이지만, 일방적인 고구려 측의 논리만이 반영되어 신묘년 기사와 같은 비역사적 사실도 기술하게 되었다. 이는 훈적비가 갖는 하나의 특성이고 고구려의 시대적 사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간 비문을 둘러싼 논쟁은 일본학계의 학설을 중심으로 비판, 반비판의 논쟁이 수없이 반복되었다. 1600년의 긴 세월의 풍상을 이겨 온 광개토왕비는 이제 제 모습을 찾아주어야 한다. 연구자들에 의한 사상(史像)의 왜곡, 석회도부에 의한 비신의 손상 등 어쩌면 역사의 가장 큰 피해자는 광개토왕비 자신인지도 모른다. 이 동비에 대한 정확한 판독, 감정의 개입 없는 해석, 비문이 갖고 있는 사상성 등 비문의 진실을 추구하는 일은 금후의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