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니더작센(Niedersachsen) 주(州)의 고풍스런 소도시 브라운슈바이크(Braunshweig)에 있는 '게오르그-에커르트 국제교과서 연구소'(Georg-Eckert Institute for International Textbook)(이하 에커르트 연구소)는 전 세계 교과서의 수집·소장을 시발로 하여 역사화해와 교과서 문제에 한 체계적 연구업적과 국제적 활동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쌓은 전문 연구기관이다. 에커르트 연구소 운영의 실질적인 책임을 맡고 있는 에카르트 푹스(Eckhardt uchs) 부소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에커르트 연구소의 최근 활동상에 대해 집중 조명해보고자 한다. 이번 인터뷰는 황성준 정책기획실 행정원의 독일 출장 기간 중인 지난 9월 12일 푹스 부소장의 집무실에서 이루어졌다. - 편집자 주
에커르트 연구소는 한국 내 관련학계, 전문가들에게는 이미 친숙한 이름이지만, 일반 독자를 위해 설립 배경과 활동, 주요임무에 대해 소개해 달라.
에커르트 연구소의 탄생은 유럽의 역사적 경험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전 유럽을 전쟁의 참화로 몰아넣었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국제연맹 (League of Nations)을 중심으로 교과서 개정(Textbook Revision), 즉 각국 교과서에서의 상호 인식과 타자 서술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싹텄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지지부진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또 한번의 전재(戰災)를 겪은 후 유네스코(UNESCO)를 중심으로 재점화되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결국 두 번의 엄청난 비극을 겪으면서 지난 역사에 대한 반성과 역사화해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독일이 침략한 이웃국가들과의 역사화해를 위해 교과서 관련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을 해오고 있던 독일의 역사학자 게오르그 에커르트가 에커르트 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이후 1975년, 니더작센 주(州) 법에 따라 에커르트 연구소는 오늘과 같은 형태를 갖추게 되었고, 교과서, 교육 분야에서의 역사화해에 대한학술적, 실천적 공로를 인정받아 1985년에는 유네스코가 주는 평화교육상(UNESCO Prize for Peace Education)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에커르트 연구소는 교과서와 여타교육 매체에서의 자아와 타자에 대한 서술, 이미지와 지식구조의 형성체계, 교과서의 사회적 영향과 효과 등에 대한 연구활동을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이러한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교육정책 개발과 건의, 교과서 집필 가이드라인 제시 등의 실천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연구소 홈페이지를 보면 현재 진행하고 있는 연구프로젝트가 10여 건이나 되는 것으로 소개되어 있다. 최근 에커르트 연구소가 특별한 관심을 두고 있는 연구 주제나 분야가 있다면? 아울러, 차기 연구 주제 및 방향은?
최근 우리 연구소는 'European House' 라는 프로젝트명 하에 '유럽·유럽인'에 대한 연구를 중장기 연구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다소 의아할 수 있겠지만, 교과서에서 유럽, 유럽인을 어떻게 기술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현실적으로 EU의 확대, 인적·물적 교류의 일상화, 유럽 내 정치·경제·문화 지형의 변화와 융합 현상은 과거 냉전시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유럽, 새로운 유럽인에 대한 정의와 정체성 정립을 요구하고 있다. 변화된 시대에 부합하는 유럽·유럽인에 대한 교과서 기술 방법 연구는 매우 의미심장할 뿐 아니라, 중요한 시대적 과제로 우리 연구소는 현재 이 주제에 대해 각 부문별로 다양한 학제적 연구를 추진 중에 있다.
차기 연구주제로는 다소 두루뭉실할 수 있겠지만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다양성(Diversity)'이라고 답하고 싶다. 아직 구상 단계에 있고 연구소의 차기 중장기 프로젝트로 추진할 계획이기에 세심하게 다듬어야 할 부분이 있다. 그래서 현 수준에서 명쾌하게 설명 하는데는 한계가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다양성' 이라는 주제는 국가 간 혹은 한 국가 안에서의 마이너리티, 젠더, 인종, 종교, 문화적 갈등과 관련하여 '다양성'을 후속세대에게 어떻게 이해, 교육시키고, 그 과정에서 교과서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와 같은 내용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현재 중기(中期) 과제로 진행 중인 '유로피안 하우스(European House)' 프로젝트가 2015년 경 완료될 예정이므로 조만간 차기 연구주제가 결정될 것 같다.
연구활동 외, 기관운영이라는 측면에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사업은?
우리 연구소는 유관 학계 또는 전문가에게는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지다. 하지만 이는 바꾸어 말하면 지극히 한정 된 수요자만을 대상으로 지나치게 학술적, 전문적 방법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연구소의 연구성과와 업적을 더 많은 사람이 접할 수 있도록 대외적으로 '발신' 하는 문제는 여전히 취약부분 중 하나이다. 이에 기존의 학술서적 및 학술저널의 발간과 같은 전문가층을 대상으로 한 활동과 함께 일반대중이나 비전문가라도 교과서 문제에 관심이 있는 관심수요층을 대상으로 한 효과적 홍보방법을 고심 하고 있다. 현재 인터넷 기반의 웹사이트 'Edumeres.net'를 개발, 시험 운영 중에 있는데, 완성되면 각국의 교과서 제도와 현황에 관한 다양한 정보(집필·채택·보급 체계, 교과서 제작사 현황, 교육과정 등)를 제공하여 전문 연구자 뿐 아니라, 교사, 교재·교육자료 개발자, 기타 관련분야 전문가와 일반인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교과서와 역사화해 문제로 주제를 옮겨보자. 에커르트 연구소는 독일-폴란드 공동 교과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현재 추진현황 및 향후 계획 등을 개략적으로 소개해 달라.
우선 이해해야 할 것은 이번 공동교과서가 독-폴 양국 관계사나 과거사 문제에 한정한 특수한 교과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현재 독일, 폴란드의 학교 현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일반적인 '유럽사' 교과서이다. 다만, 시각과 접근에 있어서 동유럽, 중유럽의 관점을 좀 더 많이 반영할 계획이고, 이러한 전체적 맥락 하에서 독일-폴란드 양국 관계사 또한 종전의 교과서에 비해 좀 더 심층적으로 기술되고, 조망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불행했던 20세기 초반의 역사도 자연스럽게 다루어질 것이다.
집필내용과 방향에 있어서 소위 '과거사' 문제에 대해 이견이 표출되거나, 쉽게 합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울러, 독일과 폴란드 사이에는 교과서의 의미, 영향력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상이하고, 실질적인 교과서 발간, 관리, 보급 체계 등 제도적 차이 때문에 오는 의견 불일치 부분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과 폴란드는 1975년에 공동교과서 위원회를 설립하는 등 지난 수십 년 동안 학계, 전문가 그룹이 끊임없이 역사대화를 추진해 온 경험과 네트워크가 있다. 도전이 있긴 하지만 결코 넘지 못할 산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내용 문제와 더불어 심혈을 기울이는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실질적인 보급, 확산이다. 2006년에 처음 발간된 독-불 공동 교과서는 역사적 의미와 성과가 분명한데도 실질적인 시장성 확보에는 아쉬운 면이 많았다. 지난독-불 교과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 독-폴 공동교과서는 명실상부한 양국의 공동교과서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재단은 에커르트 연구소와 '유럽판 동아시아사 부교재 발간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 사업의 의미가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또 현재 진행상황과 애로사항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도 듣고 싶다.
재단에서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기존의 일국사(一國史) 중심적 서술이 아닌 지역사(地域史)적 관점에서 서술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했을 때, 직감적으로 좋은 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역 내 국가 간 역사 갈등이 첨예한 상황에서 기존과 같은 일국 중심적 역사서술은 주변국의 역사관, 인식체계와 충돌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일국 중심적 역사서술로 인해 한중일 3국의 역사·문화적 상호작용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부분도 분명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울러, 동북아 지역의 부상과 이에 따른 유럽의 관심 증대에도 불구하고, 한중일 3국의 상호작용의 역사를 대등하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다루고 있는 교육자료가 많지 않다는 재단의 지적 또한 타당한 면이 있었다.
이렇게 시작한 공동 프로젝트는 올해가 3년째로 올해 말까지는 집필을 완료하여 내년에는 출판과 보급에 주력할 생각이다. 내용도 중요하지만 실질적인 시장성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이미 언급하였고, 이를 위해 교육도서 전시회 참여, 교재개발자, 교사연합체 모임 활용 등 다양한 홍보 전략을 논의 중이다. 새로운 시도이기에 한국의 시각에서 보면 다소 부족한 부분, 아쉬운 부분도 많이 있을 것이다. 새로운 시작, 새로운 도전이므로 겪어야 하는 진통으로 이해해주었으면 좋겠다.
동북아 지역의 역사 갈등이 첨예하다. 역사화해를 위한 해법이나 교과서 분야에서 할 수 있는 실천방안을 조언한다면?
역사갈등 문제는 역사적 사실(史實) 그 자체보다는 그러한 과거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역사인식'의 문제와 더욱 더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래서 역사화해 문제는 단기간에 해결되지 않는 특징이 있다. 여기에 국가정책, 국민정서, 정치적 상황, 국가 간 관계 등의 상호작용이라는 변수까지 더해지면 역사화해는 훨씬 더 복잡다단해진다. 유럽의 경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좀 더 긴 호흡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대화하고, 인식차이를 극복하려는 자세와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교과서 분야에 한정하여 구체적 실천 방안을 말한다면, 양국의 학계, 전문가, 교사 등 각계각층이 참여하여 부교재를 개발·보급하는 것이 의미 있는 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정부가 공인하는 정식 교과서와 같은 영향력이나 파급력을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역으로 말하면 공인 교과서에서 쟁점사안에 대해 합일점에 도달하고, 역사화해의 단초를 마련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 라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학교 현장에서는 기존 종이 교과서 이외에도 다양한 학습용 자료와 매체를 활용하고 있다. 그 자체가 해법은 아니지만 분명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재차 말하고 싶다. 이러한 측면에서 동북아역사재단이 한일공통부교재 개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무척 반갑고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