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올림픽 한일 축구경기에서 보이듯이, 한국과 일본 사이에 운동 시합은 물론 문화 교류에도 언제나 과거 한일 간의 역사 문제가 깔려있고, 이로 인해 형성된 골은 좀처럼 메워지지 않는다. 한일 간의 역사와 영토 문제는 근대적인 한일 관계의 산물이다. 1965년 한일 간에 새로운 관계가 성립된 이후, 경제적인 교역이나 인적, 문화 교류가 진전되었지만, 정치외교적 관계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처럼 여전하다. 이런 대립은 앞으로도 더 지속될 것임에 틀림없다. 이런 분쟁의 발생 이유가 매우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것에 있기 때문이다.
점진적인 일본의 과거사 인식 변화
한일 간 역사 문제로 인한 대립은 1910년 일본의 한국강제병합, 식민지배에서 비롯된 문제들이다. 따라서 1965년 한일 국교를 정상화하면서 이 문제를 매듭짓고 넘어가야 하였다. 하지만 그 문제가 미흡하게 처리되면서 지금도 장애물이 되고 있다. 한일회담에서 우리 대표들이 최선을 다해 많은 것 얻었다고 평가되고 있지만, 적어도 과거사 문제는 그러하지 못했던 것이다.「한일기본조약」의 2조에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 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의 '이미'의 시점이 한일 간에 다르다는 점도 서로 인정하였다.
'과거사'에 대한 불명확한 처리 때문에 이후의 한일관계는 언제나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태도 표명이 중요한 이슈가 되어 왔다. 한국 정부는 줄곧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였고, 일본은 식민지배의 유효, 정당성 위에서 한국의 요구를 조금씩 반영하는 식으로 표현을 고쳐왔다.일본 정부도 활발한 한일 간 사회, 경제, 문화 교류에 부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과거사'에 대한 의견도 한 발자국씩 나아갔다. 처음에는 "금세기의 한 시기에 있어서 양국 간에 불행한 역사가 있었던 것은 진심으로 유감이며,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1984. 히로히토) 혹은 "우리나라에 의해 초래된 이 불행했던 시기에 귀국 국민이 겪었던 고통을 생각하고 본인은 통석(痛惜)의 염(念)을 금할 수 없다"(1990. 아키히토) 등과 같이 매우 애매한 표현들을 사용하였지만, 점차 일본측은 "사죄"라는 단어도 사용하였다. 그러다 1995년 무라야마 총리의 담화나 1998년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총리의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쉽 공동 선언」 등으로 발전하였다.
2010년은 강제병합 100년이 되던 해였다. 한국, 일본의 지식인이 공동으로 한일의 병합이 강제적이고, 따라서 불의, 부당한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민주당 간 나오토 총리의 담화는 종전 일본 정부의 입장 위에서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이 담화는 직접적으로 '사죄한다'고 표현하지 않았지만, 그나마 진전된 것으로 평가되었다.
"3.1 독립운동 등의 격렬한 저항에도 나타났듯이, 정치적, 군사적 배경 하에, 당시 한국인들은 그 뜻에 반(反)하여 이뤄진 식민지 지배에 의해, 국가와 문화를 빼앗기고, 민족의 자긍심에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 아픔을 준 쪽은 잊기 쉽고, 받은 쪽은 이를 쉽게 잊지 못하는 법입니다. 이러한 식민지 지배가 가져다준 많은 손해와 고통에 대해 여기에 다시 한번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의 기분(심정)을 표명합니다."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일본의 최근 우경화
21세기에 들면서 동북아시아의 정세 변화와 더불어 일본의 우경화가 심화되었다. 일본 정치지도자들의 과거사에 대한 망언과 행동이 더 노골적으로 표출되었다. 일본의 군사대국화가 진전되고, 미일동맹이 강화되면서 더욱 그러하였다. 단적으로 고이즈미 총리는 중국과 한국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야스쿠니 신사를 지속적으로 참배하고 있으며, 일련의 정치 지도자들도 독도 문제, 교과서 문제에 관한 '망언'을 자행하고 있다. 2005년도 일본 역사교과서 검정 과정을 둘러싸고 불거진 한일 간의 현안도 이런 사정에서 터져 나온 것이다.
일본의 우경화는 최근 들어 더욱 노골화되었다. 작년 12월 선거에서 민주당 정권을 무너뜨리고 다시 정권을 잡기 위한 자민당의 전술이었다. 아베(安倍晋三) 총리는 20년 전에 고노(河野洋平) 당시 관방장관이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사과한 담화도 수정하겠다고 천명하였고, 심지어 일본이 군대를 가지지 못하게 한 '평화헌법' 개정을 전면에 내걸고 있다. 제3당으로 등장한 '일본유신회' 또한 이 대열에 힘을 보태었다. 심지어 핵무기 기술개발까지 천명하고 있다.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군국주의로 등장했던 일본의 역사적 경험에서 '유신회'라는 이름조차 우리의 소름을 돋게 한다. 이는 일본이 저지른 2차 대전의 '원죄'를 지우고 새로운 군국주의, 패권국가가 되겠다는 천명임에 틀림없다. 일본 정권의 입장이 이러하니, 독도 영유권 주장, 교과서의 역사 왜곡은 더욱 노골화되고 있다. 중국과의 영토 분쟁도 마찬가지로 격화되고 있다.
역사인식 공유를 위해 동북아역사재단에 역할 기대
우리는 흔히 과거사가 미래를 나아가는데 장애가 되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 과거사를 명백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북아시아 지역의 분쟁은 20세기까지 형성된 역사적 산물이고, 대부분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은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이었다. 따라서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진솔한 반성이 없으면 앞으로 동북아시아의 화해를 얻기 힘들다. 일본이 진정으로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다면 동북아시아에서는 일시적으로 우호관계가 유지된다고 하더라도, 언제 다시 분위기가 악화될지 모른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출발도 바로 이 점일 것이고, 우리의 역사 교육도 마찬가지이다.
역사분쟁의 해결은 역사인식을 공유함으로써 시작되어야 하고, 역사인식의 공유는 미래에 대한 각 국가와 민족이 공통의 전망을 가져야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렇다고 마냥 오래 가서도 자연적으로 되지는 않는다.지금보다도 더 동북아역사재단의 역할이 중요하고, 재단을 중심으로 우리의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정부, 학자, 민간 각각의 입장에서 역할을 해야 한다. 각종 조직이나 위원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자칫 자신이 '국가대표 선수'라는 것으로 착각해서 안 된다. 또한 이러한 작업에는 반드시 북한도 고려해야 한다.최근 북한의 3차 핵실험으로 남북 관계가 상당히 경색되어 있으나, 민간 차원이나 학술 차원에서 북한과의 교류는 동북아시아의 평화체제 구축에 매우 중요하다. 힘든 일임에 틀림없지만,북한을 포함한 한중일의 역사학자 모임을 적극적으로 추진해봄 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