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4월에 걸쳐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이 한껏 고조되었다. 이 시점에 그 근원이 되는 한반도 분단의 성격을 비롯해, 한민족의 정치사상, 식민지사관의 극복 등을 주제로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와 좌담회를 가졌다. 경기도 남양주에서 2년째 은퇴생활 중인 신 교수는 요즘 얼마나 바쁘게 살고 있는지 소개하면서 동북아역사재단에 대해서도 애정어린 조언을 제시했다. 대담진행은 재단 정책기획실의 홍면기 기획팀장이 맡았다. _ 편집자 주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건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를 받았다. 건국대 교수로서 도서관장과 대학원장을 거쳐 석좌교수로 봉직했다. 한국정치외교사학회장과 한국/동양정치 사상사학회장으로 활동했으며, 두 번에 걸쳐 한국정치학회 저술상을 받았다. 저서로는 「동학사상과 갑오농민혁명」, 「한국정치사상사」, 「한국분단사연구」, 「이방인이 본 조선 다시 읽기」, 「한국사 새로 보기」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군주론」, 「대한제국멸망사」, 「은자의 나라 조선」 등이 있다.
홍면기 동북아역사재단 기획팀장
한국외대 정외과 졸업 후 고려대, 중국 베이징대에서 수학하였다(정치학석사, 박사 취득). 통일부에 근무하다 2007년부터 재단에서 일하고 있으며, 남북관계와 동아시아 평화,재외동포 문제 등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Q 홍면기 교수님께서는 한국 분단사를 연구하셨는데, 한반도 분단의 이유와 분단의 극복을 위한 방안은 무엇인지요?
A 신복룡 한반도 분단에 대한 저의 기본적인 시각은 내재적 모순이 분단과 한국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현대사에 나타나는 비극에 강대국의 야심이나 국제적인 요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분단과 전쟁에서는 내쟁(內爭)이 독립변수였고, 국제적 환경은 종속변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의 시각은 재수정주의에 가깝습니다. 1940~50년의 상황에서 민족지도자들이 소승적 욕망을 버리고 진심으로 조국의 미래상을 걱정했었더라면 분단과 전쟁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해방정국에서 정당·사회단체는 모두 463개였으며, 그 회원 수는 모두 7천만 명이었습니다. 이는 남한의 모든 성인이 7번 정당·사회단체에 가입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에서의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하여 한국인과의 협의를 거쳐 통일을 이루려던 강대국들은 이와 같은 현실에 절망했고, 통일을 체념했습니다. 미소공위의 결렬은 한반도 통일의 마지막 "돌아오지 않는 다리"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분단은 나뉘어짐(division)이 아니라 갈라섬(separation)이었습니다.
Q 홍면기 교수님은 여러 저서들을 갖고 계시는데 특히 「이방인이 본조선 다시 읽기」와 「한국사 새로 보기」 등은 한국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여러 한국사 관련 저서들과 비교해 교수님의 저서들이 가진 특징은 무엇인가요?
A 신복룡 역사는 흔히 냉정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당위(當爲)의 문제이고 현실은 그렇지 않아 많은 자기 연민과 미화(美化)를 수반합니다. 물론 역사에서 그러한 요소들이 민족에게 감동을 자아내게 하고 발분(發奮)하는 동기를 제공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로 말미암아 나르시시즘에 빠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저는 젊은 시절에 외국인이 쓴 한국사를 보면서 우리 역사자화상의 한계를 많이 고민했고, 그런 고민의 결과로 「한말 외국인기록」 23권을 번역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보지 못한 부분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저는 이 책들이 한국사의 지평을 여는 데 조금은 기여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당시 이 땅을 찾아온 서구인들의 시각(視角)을 통해 우리 자신을 되짚어 보는 것은 역사의 윤회(輪廻)가 주는 교훈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글과 사진을 통해 자신의 자화상을 되돌아봄으로써 이 시대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전집을 엮어내면서 백색우월주의에 젖어 있는 서구인들의 시각을 통해서 한국사를 다시 해석해 보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글이 "삼천리 금수강산" 식의 한국사의 인식에 자성(自省)의 계기를 제공해 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Q 홍면기 세계화 시대를 맞아 한민족이 어떤 정치사상을 견지해 나가야 하는지요? 그리고, 한국의 정치사상사는 왜 '종교사상사'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지요?
A 신복룡 저는 한국정치사상사를 공부하면서 한국사상사의 특수성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인류가 살아가는 모습이3천 년 전과 오늘이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고, 서구인과 한국인이 다를 것이 없다는 보편성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의 「한국정치사상사」는 나름대로 문화인류학적인 고민을 담고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 인류 보편적인선(universal good)은 무엇일까요? 정치가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가치란 무엇일까를 공부하다가 얻은 결론은 대체로 이런것들이었습니다.
첫째로, "정치사상이란 그 시대를 살던 사상가·정치가·종교지도자들이 국가 구성원들의 행복과 슬픔을 고민하면서 산출한 복음주의적(evangelical) 언어·저술·행동의 정치학적 해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작업은 대체로 종교적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종교는 편견에 빠질 위험이 크고 그래서 밖으로부터의 시비[外揷]의 부작용도 그만큼 크고 어렵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버(Max Weber)의 고 백처럼, 종교에 관한 논의는 그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지루함을 줄 수 있습니다. 저의 글이 종교적 성향을 띠고 있다는 동료들의 지적을 저는 깊이 유념했습니다.
둘째로, 제가 애착을 느끼는 것은 퇴계(退溪)·율곡(栗谷)의 이기론(理氣論)과 같은 거대 담론보다는 민중의 숨결이 담긴 기층(基層) 문화였습니다. 저는 억눌린 자에 대한 연민의 끈을 놓지 않았고, 그래서 젊은 날을 동학(東學) 공부로 보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정치학계에서 우리는 이 사람을 잊고 있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정치학에서 보는 역사적 인물의 평가는 어차피 철학이나 종교나 국사학계의 그것과 다릅니다.
셋째로, 저는 한국사에서 수없이 정형화된 틀들을 깨고 싶었습니다. 이를테면 김부식(金富軾)은 사대주의자였고, 신돈(辛旽)은 요승(妖僧)이었다는 식의 몽환적(夢幻的) 고정 관념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인물은 너무 신화화했거나 심하게는 달리 해석하는 것이 금기(禁忌)가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의 전기학(傳記學)은 주인공의 성인화 과정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이 우리 곁으로 내려오는 신화 벗기기의 작업이 필요합니다.
Q 홍면기 교수님이 기존의 여러 한국사 연구와 달리 한국사를 새롭게 보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나요? 일제시대의 역사학자로 전설이 된 박창화(朴昌和) 옹과의 인연은 어떠한가요?
A 신복룡 이익(李瀷) 선생은 학문에 성공할 수 있는 세 가지 자산을 꼽았는데, 첫째는 일찍이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이고, 둘째는 호학(好學)하는 성품을 타고나야 하며, 셋째는 경제적 여력(餘力)을 들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적에 이웃에 피난오신 박창화 선생을 먼발치로 뵙고 그분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었던 인연을 소중한 자산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감수성이 높던 유년 시절의 기억들은 저의 일생을 지배했습니다. 특히 고구려중심사관과 강역(疆域)의 지평에 관한 말씀은 나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한국 사학사(史學史)에서 처음으로 식민사학을 거론한 분을 스승으로 뵌 것이 저에게는 운명적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의 고대사를 보는시각은 신라중심사에 대한 강한 거부의 몸짓을 담고 있습니다. 이 신라중심사는 일본의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과 맞물려 한국사를 병들게 하는 치명적 병폐였습니다. 신라중심사는 한국인의 대륙적 기질을 거부하고 반도에 치중한 소국(小國) 의식과 왕실 중심의 환락을 담고 있으며, 더 나아가 한국인의 기마민족적 웅혼(雄渾)한 기백을 잊게 했습니다. 여기에 남북분단에 따른 북한의 고구려중심사와 남한의 신라중심사가 사태를 악화시켰습니다. 그리고 남한의 이와 같은 고구려 역사의 망실을 틈타 중국의 동북공정은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습니다.
Q 홍면기 일본의 '어용' 학자들이 올바른 한국사의 정립에 어떤 악영향을 주었고 한국사를 어떻게 왜곡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A 신복룡 식민지사학이라 함은 "한국에 대한 식민지주의적 지배를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한국의 역사를 왜곡(歪曲)·변조(變造)·누락(漏落)시키는 필법(筆法)"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식민지사학의 정체가 본질적으로 일본의 조선 지배 정당화와 그를 뒷받침할 수 있는 조선 민족의 열등화(劣等化)를 강조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첫째로, 한국사의 주체를 한국인 또는 한국의 저력으로 보지 않고 한국사의 주체적 추진력을 비하(卑下)하였으며, 둘째로 한국인들이 내포하고 있는 결함을 침소봉대(針小棒大)하거나 강점을 비하 또는 은폐하였으며, 셋째로 한국을 만주에 뿌리를 둔 기마 민족으로 보지 않고 반도의 왜소한 하천문화권으로 보기 위해 강역학상(彊域學上)의 위치를 왜곡하고, 넷째로 한국의 역사에 나타났던 문화 유형 중에서 바람직한 것은 무엇이었으며, 그러한 유산으로서는 어떠한 것이 있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오도(誤導)했습니다. 그러한 역사 왜곡이 아직도 청산되지 못한 이유는 첫째로는 서구 사회에 견주어 볼 때 한국인의 사상적 편력(徧歷)이 단조로웠다는 점, 둘째로는 기성 사회에 대한 개혁의 의지가 빈곤했다는 점, 그리고 셋째로는 식민지사학에 오염된 학통(學統)의 세대 교체가 아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 등을 지적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Q 홍면기 교수님은 '인문학예찬'이라는 글을 쓰신 바가 있는데 정치학 또는 정치사의 연구자로서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인문학은 교수님의 학문 역정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요?
A 신복룡 글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인들 젊어 한때 문필가가 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저에게도 열악하지만 나름의 독서시대가 있었습니다. 누구의 지도도 없이 마구잡이로 읽던 그 시절에 저는 제가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읽기만 했습니다. 그런 시절을 지나 사회과학도가 되었을 때 문득 저는 지난날에 읽었던 인문학의 글 읽기가 나에게 자산이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저의 강의와 글은 기본적으로 "그래서 그와 같은 지적(知的) 담론이 너의 삶에 무슨 의미를 주었다는 말인가?"라는 질문을 향해 있었습니다. 기말 시험 끝나면 잊어버리고 잊어도 되는 강의나 글을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결국 글쓰기의 시작은, 그가 무슨 전공을 하든, 인문학이 그 시초였습니다. 문사철(文史哲)은 만학(萬學)의 출발점입니다. 공대, 축대, 의과대 학생일수록에 인문학을 읽어야 합니다. 동서양의 고전은 전공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인생에 대한 담론을 담지 않은 자연과학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메마른 조밥을 씹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도, 아인슈타인(A. Einstein)도, 프로이트(S.Freud)도 모두 자연과학에서 출발했지만 끝내는 인생을 얘기하는 철학자로서의 삶을 마쳤습니다. 인문학을 하지 않으면 일차적으로 글쓰기와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컴퓨터가 우리의 삶을 대신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입니다.
Q 홍면기 교수님의 여러 저서 중 「서재 채워드릴까요」라는 특이한 제목의 책이 눈에 띕니다. 책의 성격상 여러 정치학 서적과는 어떤 면이 다른가요? 딱딱한 정치사 연구와는 달리 일종의 심리적 여유의 표현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지요?
A 신복룡 정년을 바라보던 어느 날 저는 문득 강의실에서 하지 못한 내 인생의 이야기들을 남겨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통속적인 삶의 애환일 수도 있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지식인의 넋두리일 수도 있고, 한 소시민의 삶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인생을 살면서 "사람 냄새나는 삶"을 살고 싶었고,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강의실 주변에서 있었던 일, 세속 도시에서 부대끼며 살아온 이야기, 그리고 내 자식들에게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을 정리해 본 글들의 모음집이 바로 그 책입니다. 제가 회고록을 쓸 처지도 못되지만, 이렇게나마 저의 살아온 이야기를 남길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Q 홍면기 남양주에서 언제부터 사셨나요? 요즘 근황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A 신복룡 남양주 아파트촌으로 이사한 지 2년 가까이 됩니다. 충청도 산골(괴산)에서 태어나 여러 차례 삶의 굴곡이 있었지만 이렇게 경기도 사람으로 유전(流轉)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조용히 책 읽고, 산보하고, 주일 미사에 참석하고, 가끔 그리운 친구들 만나러 한양에 올라가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자식들은 모두 내 품을 떠나고 빈 둥지 증후군(empty nest syndrome) 이 여울처럼 몰려오기도 합니다. 밥 먹으면 학교 가는 줄로만 알았고, 결석은 한국전쟁 때뿐이었던 제가 정년을 맞이하면 어찌 살까 걱정했지만 지금은 잘 견디고 있습니다. 요즘은 소싯적의 꿈이었던 「플루타크영웅전」의 주석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거의 마쳤습니다. 이것이 끝나면 「삼국지」를 번역하려고 합니다. 동서양의 두 영웅전을 번역한 최초의 인물이 되고 싶습니다. 그 두 책에는 저의 젊은 날의 고통을 이겨낸 영혼이 담겨 있어 애정이 갑니다. 그러고도 하늘이 나에게 더 시간을 준다면 한글판 「신구약성경」의 우리말 다듬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꿈이 이뤄질 수 있을지의 문제는 하늘의 몫일 것입니다. (그는 요즘 매주 한 번 가량 건국대 도서관에서 서적을 대출·반납하며, 간헐적으로 특강을 한다. 금년 들어 석좌교수직도 벗어났다는 그는 주석과 번역도 중요한 학문의 한 부분으로 다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Q 홍면기 마지막으로, 동북아역사재단에 부탁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해주셨으면 합니다.
A 신복룡 첫째, 역사전쟁에는 긴 호흡이 필요합니다. 중국이나 일본이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닙니다. 목전의 사건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고 길게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천년의 전쟁이 될 것입니다. 둘째, 정통 역사학과 분류사, 이를테면 정치사나 경제사나 군사(軍史)와 같은 특수사와의 조화롭고 우정 있는 관계를 유지하면서 융합학문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국사학과 분류사는 상호 보완관계이지 배척해야 할 상대는 아닙니다. 국사학의 사료수집 능력과 분류사의 방법론이 조화를 이룰 때 큰 학문을 이룰 수 있습니다. 셋째, 국가적 소명의식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예전 같으면 여러분은 홍문관(弘文館) 대제학이거나 승문원(承文院) 지사(知事)와 박사(博士)의 정삼품 이상의 당상관입니다. 사관(史官)과 교육자와 경세가로서의 자부심으로 무장한 지사(志士)가 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