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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후세 다쓰지, 민중과 함께 살고 민중을 위해 죽다
  • 김영필 한일평화의원회의 사무국장
후세 법복사진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1880년 11월 13일~1953년 9월 13일)는 일본 동북지방의 미야기현(宮城県) 이시노마키시(石卷市) 출신으로 인권변호사 또는 사회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고향인 이시노마키시 홈페이지에는 시가 배출한 유명인으로 그의 이름이 올라와 있다. 홈페이지는 그에 대해 '일본의 쉰들러'로서 "식민지 시대에 많은 한국인들을 구제한 것으로 유명한 변호사"라고 기술하고 있다. 미야기현의 농가에서 2남 3녀의 막내로 태어난 후세는 청년시대에 접한 톨스토이의 인도주의에 영향을 받아 인생의 행동규범으로 삼았다. 그는 변호사가 된 이후에도 약자구제와 사회운동 옹호를 이념으로 하는 변호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일생을 인도주의라는 한길로 매진하였다. 후세는 1902년 메이지(明治)대학을 졸업한 뒤 사법관 시보(검사)가 되어 우쓰노미야(宇都宮) 지방재판소에 부임했다. 하지만 자식과의 동반자살 미수로 자수한 어느 어머니를 살인미수로 기소해야하는 현실을 보면서 법률의 사회적인 미비와 적용에 회의를 느끼다가 결국 검사직을 사임하고 1904년 변호사의 길로 들어섰다.

변호사 후세는 왜 민중의 편에 섰는가

후세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톨스토이의 인도주의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고향에서 이미 그리스 정교와 조우했으며, 1899년 4월 고향을 떠나 입신출세가 아닌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도쿄에 상경했다. 그리고 그해 8월에는 간다(神田)에 있는 그리스 정교회 니콜라 이성당의 서생이 되었다. 따라서 그는 메이지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면서도 그리스정교적인 민본주의, 민중을 구제하는 종교적 책무를 몸소 체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후세는 변호사 개업 후 얼마 되지 않은 1905년 일련정종(日蓮正宗)의 독실한 신자였던 히라사와 미쓰코(平沢光子)와 결혼하게 되는데, 후세는 부인으로부터도 종교적으로 큰 영향을 받는다. 이렇듯 그가 그리스정교의 기독교적 사상과 일련정종과 같은 불교적 사상도 모두 다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나. 그러한 종교들이 민중의 편에 서는 교리를 가르친 점도 있지만, 후세가 그러한 교리를 모두 다 받아들여 체화시키는 능력이 출중한데다가오직 민중을 위한다는 마음가짐을 가져 이런 종교들에 열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권변호사와 사회운동가의 길은 다르지 않았다

부인 미쓰코와 함께(1943년)

후세가 처음 사회운동 탄압사건의 변호사로 법정에 선 것은 1906년의 도쿄시 전철요금 인상반대 시민대회가 발단이 된 소요사건을 변호하면서부터이다. 이후 후세는 도쿄시 전철파업사건(1911년), 제1차 세계대전 후 전국각지에서 벌어졌던 쌀 소동사건(1918년)의 변호를 맡았으며, 뒤이어 가마이시(釜石) 광산·아시오(足尾) 동산·야하타(八幡) 제철소 파업사건(1919년) 등 굵직한 노동관련 사건의 변호를 맡는다. 군대 적화 사건(1921년), 제1차 공산당 사건, 관동대지진 당시의 가메이도(龜戶) 사건, 일본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사건이었던 3.15사건과 4.16사건 등은 사상의 자유와 관련된 사건의 변호였다.

후세의 변론을 필요로 했던 민중은 일본인만이 아니었다. 1919년 2.8 독립선언당시 일본경찰에 의해 한국인 유학생 60여명이 검거되었고 그중 9명이 출판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는데, 후세는 이들을 위해 무보수로 변호했다. 그는 관동대지진 당시 무고하게 학살된 조선인의 진상규명을 위해 목숨을 걸고 국가권력에 맞섰으며, 1926년 일왕 왕가의 암살을 기획한 이른바 대역사건으로 기소된 박렬(朴烈)과 그의 부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를 위한 변호에도 나섰다. 의열단 사건(1923년), 조선공산당 사건(1927년), 대만농민조합소요사건(1927년)등의 변론은 후세가 일본을 떠나 조선과 대만으로까지 찾아가서 맡은 변론이었다.

후세는 단순히 변호활동만을 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조선에서 일어난 수해의 이재민을 구원하는 운동을 하기도 하였으며, 조선인 폭동을 상정하여 실시한 고등학교 군사교련에 대하여 항의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후세는 인권변호사이자 사회운동가였으며, 일본 국내뿐만 아니라 조선과 대만에서도 활동하였고, 조선과 대만의 민중을 일본의 민중과 똑 같이 대했던 것이다.

파란만장한 인생,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 받아

후세는 자신의 인권변호사, 사회운동가로서의 일생에서 민족을 차별하지 않았다. 사상을 차별하지 않았다. 빈부를 차별하지 않았다. 신분을 차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들을 동정한 것도 아니다. 그에게는 오로지 정의가 최고의 선이었다. 그는 인민대중의 편에 선 정의의 변호사였다.

후세는 암흑과 같은 일본제국주의 시대를 온 몸으로 항거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변호사 활동의 와중에서 두 번이나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다가 되찾았으며, 두 번의 투옥을 경험하였다. 그런 고통의 와중에 그의 삼남은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투옥 중 사망하는 불행을 겪기도 하였다.

그는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장을 역임할 정도로 노동자의 편에 섰으며, '법정보다 사회로(法廷より社会へ)', '생활운동(生活運動)' 등 잡지를 창간하여 사회계몽에도 힘쓴 민중의 친구였다. 보통선거권 도입을 위한 운동에도 매진하였으며, 비록 낙선하기는 했지만 스스로가 보통선거권 도입 후에 중의원 선거에 출마한 정치인이기도 했다. 또한 자유 법조단을 만들어 불의에 맞선 변호사의 양심의 표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는 그는 식민지 대한민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노력한 대한민국 건국의 일등공신이었다. 대한민국건국훈장 애족장이 그에게 수여된 것은 그가 식민지 조선인을 도와준 일본인이라서가 아니라 그가 아시아의 민중과 함께 살고, 아시아의 민중을 위해 죽었기 때문이다. 그의 묘비명은 "민중과 함께 살고, 민중을 위해 죽다 (生きべくんば 民衆と共に, 死すべくんば 民衆のために)"로 돼 있다. 묘비명은 후세 다쓰지의 삶을 한 마디로 요약해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