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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소식
"유라시아 고려인 150년 - 디아스포라의 아픈 역사"의 저자가 말하는 유라시아 고려인의 통사(通史) 겸 통사(痛史)유라시아 고려인 150년 삶의 고통과 역사
  • 김호준

서울신문 편집국장, 문화일보 편집인, 신문발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원로 언론인 김호준이 지난 10년간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각국을 다니면서 고려인의 아픈 역사를 담은 통사(通史) '유라시아 고려인 150년-디아스포라의 아픈 역사(주류성 펴냄)'을 최근 냈다. 필자의 친필 기고로 고려인의 이주 연원, 고려인의 어려운 삶, 집필과정 등을 들어본다. -편집자 주

우리가 흔히 '카레스키'라고 부르는 유라시아 고려인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역외(域外)개척의 선구자다. 서기 926년 발해 멸망 이후 한반도에 칩거하던 한민족의 지평을 저 광활한 유라시아 대륙으로 확장시킨 주역이 바로 그들이다. 오늘날 고려인의 생활영역은 러시아 동단(東端) 캄차카 반도에서 서쪽으로 중앙아시아를 가로질러 동유럽의 우크라이나에 이르기까지 장장 1만 2,000km에 뻗쳐 있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21세기를 열어갈 '대륙의 인도자'다.
올해는 고려인의 선조들이 1863년 두만강 너머 연해주로 이주해 대륙 진출의 문을 연 지 150년이 되는 뜻 깊은 해다. 이 역사적인 해를 맞아 고려인의 강인한 개척의지를 기리고 소련 붕괴후 위축된 그들의 재기를 북돋우는 작은 민족적 행사라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선 이책, 그들의 150년 역정(歷程)을 개괄한 최초의 고려인 통사(通史) '유라시아 고려인-디아스포라의 아픈 역사 150년'이 그 일을 선도하는 횃불이 됐으면 좋겠다.

고려인의 이주 원년은 언제?

고려인의 연해주 이주 원년(元年)을 두고는 몇 가지 설(說)이 있다. 한국 학계의 정설은 1863년 최초 이주설이다. 이해 9월 함경도 농민 13가구가 연해주 지신허(地新墟) 강가에 초가를 짓고 정착했다는 러시아 국경수비대장의 보고서에 근거한 것이다. 제정(帝政)러시아 정부는 그들이 고려인에게 공식적으로 이주허가를 내준 1864년을 이주 원년으로 정하고 있다. 고려인 사회는 러시아 측 견해를 따르는 입장이다. 이밖에 1853년설, 1860년설도 있지만 신빙성이 약하다. 우리로선 1863년 이주가 러시아 측 기록으로 명확하게 확인되고 있는 만큼 이를 오늘날까지 살아 역동하는 우리 한민족 역외 개척사의 출발점으로 견지할 필요가 있다.

'유라시아 고려인-디아스포라의 아픈 역사 150년'은 고려인의 연해주 이주부터 시작해 오늘날 '역사적 조국' 한국과의 만남에 이르기까지 잊힌 역사의 진실을 복원한 통사다. 150년 연륜의 고려인 사회가 달려온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변천사를 총체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옛날 서역(西域-오늘의 중앙아시아)을 통한 고대 선진문화의 한반도 유입을 비롯해 당시 서역을 누빈 고구려 사절, 신라 구도승 혜초, 고구려 유민 고선지 장군 등을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원조(元祖)로 보고 이들의 행적 등을 전사(前史)로 곁들였다. 아울러 고려인의 1920년대 친일행적, 해방 후 북한건국 참여와 김일성에 의한 숙청, 임차농업(賃借農業) '고본질'을 통한 소비에트 드림의 추구, 소련 붕괴 이후의 국가별 재이주 상황과 2000년대의 활발한 재기 노력 등을 통사의 한 편으로 엮었다. 동서냉전 종식 후 비로소 실현된 고려인과 '역사적 조국' 한국과의 만남은 고려인의 최근세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 중의 하나다. 현재 고려인의 한국 취업은 1만여 명, 영주귀국은 약 4,000명에 달한다. 고려인의 한국행이 그들의 최대 이동 요인으로 부상했음을 이 책은 '한국 속의 고려인'으로 정리했다..

간난의 역사로 점철된 고려인의 삶

2007년 9월 29일 아스타나에서 개최된
고려인 카자흐스탄 이주 70주년 기념행사.

역사를 되돌아 볼 때 고국을 떠난 고려인의 삶은 출발부터 차별과 박해의 연속이었다. 차르의 압제 속에 신음했던 연해주 고려인, 스탈린의 '피의 숙청'으로 공포에 떨다가 끝내는 일제(日帝)의 첩자라는 누명을 쓰고 중앙아시아로 추방된 고려인, 그곳에서 성공신화를 쓰며 정착하는가 싶더니 소련 붕괴로 다시 대륙을 떠도는 신세가 된 유라시아 고려인…. 그들의 기구한 운명을 회상할 때면 서러움이 가슴에 사무친다. 이 책은 서술의 초점을 고려인의 한 많은 수난과 시련에 맞추었다. 따라서 평범한 통사(通史)로 치부하기보다는 아플 통(痛)자 통사(痛史)로 보는 것이 옳다. 고려인을 나라 없는 유민(流民)으로 만든 조선조의 망국과 같은 민족사의 비극을 다신 되풀이하지 말자는 뜻이다.

원동(遠東)에 살던 18만 고려인을 일거에 중앙아시아로 추방한 소련의 1937년 강제이주 조치는 국가 테러리즘의 극치이자 부끄러운 인류사의 한 페이지였다. 강제이주에 앞서 스탈린은 고려인 지도자 2,500여 명을 투옥시켜 고려인 사회를 미증유의 공포로 몰아넣은 뒤 그 공포가 절정에 달했을 때 강제이주를 감행했다. 이때 희생된 고려인은 전체 인구의 10%에 가까운 1만 6,500명에 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금도 고려인 사회에서 1936~38년생을 발견하기 어려운 것은 그때 대부분의 젖먹이들이 비명에 갔음을 보여주는 어두운 흔적이다.

고려인을 조국 한반도와 유리시켜 20세기 디아스포라로 내몬 강제이주는 고려인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전대미문의 엄청난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 후 반세기 동안 소련은 고려인들에게 강제이주는 물론 그들의 뿌리와 고향에 대해서까지 침묵을 강요했다. 이로 인해 고려인에 대한 탄압의 역사는 잊히고 묻힌 것이너무 많았다. 소련의 민족사 교과서는 수천 명 밖에 남지 않은 소수민족까지 다루면서 40여 만이나 되는 고려인에 대해서는 전혀 취급하지 않았다. 1960년대에 출간된 고려인 역사학자 김승화의 '소련한족사(韓族史)'도 대서특필해야 마땅할 강제이주의 전말에 대해 언급조차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연해주에 있던 고려극장이 카자흐스탄 거주 고려인에게 봉사하기 위해 1937년에 크즐오르다 시로 옮겼다고 기술했을 뿐이었다. 고려인들이 자신들의 참담한 역사에 관한 언급이 가능했던 것은 1980년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이며, 강제이주의 진실이 밝혀진 것은 1991년 소련붕괴 이후였다. 그런 의미에서 고려인 통사의 저술은 잃어버린 역사의 복원이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에야 고려인 강제이주 과정 공개돼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언로(言路)가 트이고 소련 고문서의 비밀이 해제되면서 고려인 사회는 강제이주에 대한 비판과 한 맺힌 회고담을 쏟아냈다. 역사적 진실이 담긴 금서(禁書)의 발굴에도 열을 올렸다. 한국에서도 고려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소련붕괴 후 고려인 사회의 변화와 재이주 문제 등을 다룬 연구물들이 나왔다. 그러나 이런 파편화된 자료나 각론 위주의 단편적인 논문들을 모아 큰 틀의 통사로 바로 세우려는 노력은 뒤따르지 않았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물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 '보물'을 엮어내기 위해 필자는 지난 10년간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각국을 쏘다니면서 관계자 면담과 문헌연구를 비롯하여 고려인 역사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 및 사건의 사진, 관련 지도, 그림, 도표 등 자료 수집에 많은 땀을 흘렸다. 필자는 젊음을 취재현장에서 보낸 저널리스트다. 이 책에 쓰인 방법론이 저널리스틱한 어프로치에 치중했던 것은 필자의 이런 전력 때문일 것이다. 탐구하는 아카데미즘과는 달리 발로 쓰는 저널리즘의 결합으로 이뤄낸 것이 '유라시아 고려인… 150년'이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