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이 발간을 지원한 『근대한국외교문서(近代韓國外交文書)』 1권~5권이 최근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에 선정됐다. 이것은 이 역작이 학술적으로 탁월한 업적이었음을 반영한다. 이에 재단은 「근대한국외교문서』의 발간을 기획·추진한 김용구 한림대 한림과학원장을 만나 이 저서의 출간이 갖는 학술적 의미 등을 주제로 심층 좌담을 갖기로 했다. 우선 이 역작의 편찬사업 착수계기부터 물었다. _ 편집자 주
최덕규(崔悳圭) 재단 역사연구실 2팀장
한양대 사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러시아과학원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사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외교사와 동북아국제관계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근대한국외교문서』편찬위원으로 있다. 주요연구로는 「고종황제와 안중근의 하얼빈의거」(2012), 「고종황제의 연해주 망명정부 수립구상」(2011), 『제정러시아의 한반도정책(1891-1907)』(2008)등이 있다.
김용구(金容九)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원장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를 거쳐 사회과학대학 외교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2002년 정년퇴임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한일외교미간극비사료총서(韓日外交未刊極秘史料叢書)」 50책 (엮음)(1995~96), 「세계관 충돌과 국제정치학」 (1997), 「세계관 충돌과 한국외교사, 1866~1882」(2001), 「외교사란 무엇인가」 (2002),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사대질서의 변형과 한국 외교사」(2004), 「세계외교사」 (1988), 「만국공법」 (2008), 「거문도와 블라디보스토크. 19세기 한반도의 파행적 세계화 과정」(2009), 「약탈제국주의와 한반도」 (2013) 등이 있다.
Q 최덕규 근대한국외교문서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근대한국외교문서』 1권~5권이 2013년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된 것을 우선 축하드립니다. 원장님께서 근대한국외교문서 편찬사업을 구상하고 착수한 계기는 무엇인지요?
A 김용구 먼저 『근대한국외교문서』편찬이라는 역사적인 연구 사업을 지원한 동북아역사재단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현재 OECD 국가 중 자국의 외교문서집을 보유하고 있지 못한 국가는 한국이 유일한 경우일 것입니다. 우리의 정치·경제적인 위상에 비추어 보면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외교문서집을 보유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자신의 역사적 현주소를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외교문서란 단순한 대외관계 글들의 모음이 아닙니다. 한국이 대외정책과 주변 열강에 대해 어떻게 인식해왔는지를 알려주는 역사적인 자료입니다. 우리의 선현들이 무한경쟁의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고 변화를 겪는 과정에서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고 거기에서 비롯된 문제점들을 어떻게 해결해 나갔는지에 대한 성찰이야말로 오늘날 한국외교가 나아갈 방향을 가늠하는데 커다른 도움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국제사회에서 생활하는 데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고찰하려면 반드시 외교문서집이 존재해야 하는 것 입니다. 마치 환자를 치유하는데 필요한 진단서와 같은 존재인 거죠. 제가 외교문서집을 역사적 질병을 치유하는 처방전이라고 말해 온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계사의 흐름을 주도한 열강은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자국의 외교문서집을 발간하고 있습니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를 보면명치연간(1868∼1912)의 외교문서를 30년에 걸쳐 1963년에 총 75책으로 완간한 바 있습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 언제나 자괴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1966년에 『근세한국외교문서총목(외국편)』(4+6배판, 1,287면)을 발간한 것은 이런 자괴감을 불식하려는 조그만 학문적인 노력이었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인 외교문서집의 발간은 미래의 일이었습니다.
오랜 학문적인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게 된 것은 실로 우연한 기회 때문이었습니다. 2006년 가을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에 취임한 오랜 동료교수의 후원이 그 계기가 된 것이지요. 그 결과 2009년에 병인·신미양요에 관한 문서집 2책이 그리고 2012년에 3책의 조선과 열강의 수호조약에 관한 외교문서집을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Q 최덕규 근대한국외교문서 편찬위원회는 어떻게 구성돼 있습니까?
A 김용구 위원회는 조선, 중국,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그리고 러시아 등 8개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팀에는 전문교수 1인이 주관하고, 연구원 1인(박사과정)과 조교 1인(석·박사과정)이 그를 보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인의 책임연구원(국사와 외교학)이 모든 작업을 조정하고 통할하고 있습니다.
Q 최덕규 외교문서집 발간과 관련한 세계적인 추세는 어떠한지요?
A 김용구 외교문서의 뜻은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좁은 의미의 외교문서는 정부의 토의 문서와 훈령, 교섭담당자들의 교섭과정 문서(documents préparatoires), 그들의 왕복 문서, 본국 정부에 발송한 보고문들, 그리고 국제조약을 가리킵니다. 넓은 의미의 외교문서에는 이 밖에도 교섭 담당자들의 회고록이나 문집을 비롯한 개인 문서들도 포함해 사용합니다.
이런 외교문서의 발간은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영국이 먼저 기사 본말체의 형식으로 칼러 북스(colour books)라는 형식으로 외교문서집을 공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칼라 북스는 자국의 정책을 선전하는 것이 제1차적인 목적이어서 사용에 주의해야 합니다.
엄밀한 의미의 외교문서집은 미국의 경우를 제외하면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입니다. 특히 소련과 독일이 앞장을 섰습니다. 소련은 자본주의 열강의 타락상을 폭로해 세계혁명을 촉진시키기 위해서, 독일은 전쟁의 책임을 독일에 전적으로 전가시킨 베르사유 조약의 허구성을 폭로하기 위해, 외교문서집을 발간했습니다. 그 이후 외교문서집 공개는 국제사회의 한 관례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한국은 이런 국제사회의 현실과 괴리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Q 최덕규 한국에서 외교문서집을 발간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면 어떤 것을 들 수 있습니까?
A 김용구 외교문서집의 발간은 그 나라 외무부의 소관입니다. 열강의 공통된 관례입니다. 그리고 열강의 외무부에는 자신의 외교 사료들을 보관하고 정리하고 있는 기구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 사료관에서는 자국의 외교정책 관련 문서들을 주제에 따라 선별하여 발간하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19세기 이후 대외관계에 관한 문서들을 한 곳에 수집한 기관이 없습니다. 더욱이 조선의 기본사료들은 사대질서 밖의 행위자들에 관해서는 매우 절제된 형태로 기사들이 작성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강화도는 1866년 10월 16일부터 11월 21일까지 프랑스가 점령해 외규장각 문서 뿐 아니라 당시 시가로 20만 프랑에 달하는 은괴를 약탈하였습니다. 조선의 사료들은 이런 침탈에 대해 침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근대한국외교문서』를 편찬하는 데에는 조선의 공·사 자료들을 모두 조사해야 된다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근대한국외교문서편찬위원회는 좀 외람된 말 같지만 정조의 『동문휘고』의 전통을 되살린다는 역사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정조는 즉위한지 8년(1784)에 승문원을 찾고는 상당한 분량의 사대·교린 문서들이 일실되고 정비되어 있지 않은 한심한 현실에 직면했습니다. 곧 이들 문서의 정비 작업이 시작되어 1788년에 초편 60책, 속편 36책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3년마다 그동안에 있었던 문서들을 보완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보완작업은 10여 차례를 거친 1881년에 종료되었습니다. 그 이후 한국의 어떤 정권도 우리의 외교문서집을 발간하려는 의지는 커녕 생각조차 못하였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한국의 외교문서집은 1881년에 끝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Q 최덕규 동북아시아에서 역사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역사외교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이제까지 한국에서 외교사 연구가 소홀했던 원인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A 김용구 크게 보면 우리의 학문 풍토와 관련되어 있다고 봅니다. 이른바 지식인이란 활자와 기호를 통해 자신의 뜻을 사회에 전달하는 사회계층을 가리킵니다. 종교, 언론, 그리고 교수가 대표적입니다. 종교나 언론은 제가 잘 모르는 분야이고 교수들에 국한에 볼 때 크게 3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강대국 국제정치이론을 전달하는 기술자(technician)로서의 지식인입니다. 외국의 이론이 지니고 있는 가치체계를 염두에 두지 않고 전달하는 작업은 매우 위험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강대국 이론의 전파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특정 정치집단의 이념전달자(ideologue)입니다. 끝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려고 노력하는 철학자로서의 지식인입니다. 기초학문에 종사하는 지식인인데 우리 학계에서 이들의 활동이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데에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외교사 연구에는 언어와 역사에 대한 많은 노력이 경주되어야 하는데 그에 대한 반대급부가 있는가 하는 조급하고 근시안적인 생각이 학계에 팽배해 있다고 봅니다.
Q 최덕규 『근대한국외교문서』의 발간이 학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하십니까?
A 김용구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이제부터 본격적인 한국의 외교사 연구가 가능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희들이 작업하고 있는 외교문서집은 한국의 자료들은 물론 관련 열강들의 기간·미간 외교문서들을 가능한 한 모두 수록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한반도에 대한 열강의 왜곡된 인식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일본외교문서』에 의존해 온 해외의 연구성과들이 갖는 문제점들이 속속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각국의 외교문서집은 그 나라의 정책을 반영하고 있어서 『일본외교문서』가 일본 정책을 선전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근대한국외교문서』는 이제까지 의도적으로 배제되어온 일본외교사료관 소장 조선 관련 문서들을 새롭게 발굴하여 『일본외교문서』의 문제점들을 노정시키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1948〜1951년 미 당국은 일본 외무성의 문서들을 2,116릴(reel)로 복사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미 당국의 복사 태도는 한국을 철저히 경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항목의 중국 문서들은 모두 복사했으면서도 바로 옆에 비치되어 있는 한국 관련 문서들은 복사에서 철저히 배제하였습니다. 저는 1971~72년 동안 일본 외교사료관에 비치된 문서들 중 『일본외교문서』와 미 당국이 복사한 릴 중 제외시킨 조선 관련 문서들을 50책으로 세상에 알린 바 있습니다.
끝으로, 외교사 연구는 외교문서를 분석하는 작업입니다. 한국을 비롯한 열강의 외교문서 속에 응축되어 있는 대외관계의 정신구조를 분석하는 연구 분야입니다. 그러나 열강의 외교문서를 독해 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입니다. 이에 연구자들이 어렵고 힘든 외교사 연구를 외면함으로써 연구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Q 최덕규 근대외교문서의 향후 편찬계획은 어떻게 되는지요?
A 김용구 『근대한국외교문서』편찬은 3년 전부터 한국연구재단이 후원하고 있습니다. 금년에 임오군란 관계 2책, 갑신정변 관계 2책, 그리고 내년에는 거문도 점령 관련 1책을 발간하고 2015년까지 청일전쟁 문서집 3책을 발표할 예정입니다. 이들 문서집은 모두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에서 나올 예정입니다. 그리고 여건이 마련되면 1910년에 이르는 시기까지 외교문서 편찬을 계속하려고 합니다.
Q 최덕규 선생님께서 『근대한국외교문서』편찬을 주도하시게 된 것은 그동안 한국 외교사 연구에 대해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많은 업적들을 쌓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에 관해 말씀해 주시죠.
A 김용구 제가 조교시절 공부하던 공간이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조선과 일본의 외교사에 관해 탁월한 업적들을 세상에 내어 놓은 다보하시 키요시(田保橋潔)의 연구실이었습니다. 다보하시의 독서 카드를 보면서 신기한 기분과 함께 매료되기도 하였습니다. 1963~1966년 그 연구실에서 한국외교사에 관한 열강의 외교문서 색인을 주야 겸행으로 3만여장의 카드를 만든 것이 외교사 연구의 시작이었습니다.
1971~72년 하버드 옌칭의 도움으로 일본에서 연구한 것도 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도요분코(東洋文庫)의 자료는 동양학 연구에 보고입니다. 말로만 듣던 우리 외교사 분야의 자료들을 직접 대할 수 있었죠.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도 오래 머물렀습니다. 우리에 관련된 미간 사료들을 50책으로 세상에 알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한국외교사 연구만을 계속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일본에서 귀국하자 국제법을 강의해야 할 처지였습니다. 외교사에 관한 관심은 일단 자료 수집에 주력하고 소련 국제법 연구에 매진하는 기이한 학문적인 여건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실망도 하고 좌절도 겪었으나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의 학문적인 시야를 꽤 넓히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자부합니다.
한국외교사에 관해 전문 연구를 발표하기 시작한 것은 『세계관 충돌과 한말외교사, 1866~1882』(2001)를 필두로 The Five Years' Crisis, 1866~1871. Korea in the Maelstrom of Western Imperialism(2001), 『외교사란 무엇인가』(2002),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사대질서의 변형과 한국 외교사』(2004),Korea and Japan. The Clash of Worldviews, 1868~1876(2006), 『거문도와 블라디보스토크. 19세기 한반도의 파행적 세계화 과정』(2009), 『약탈제국주의와 한반도. 세계외교사 흐름 속의 병인·신미양요』(2013)를 잇따라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러하듯이 업적들을 내놓을 때 마다 아쉬운 감이 없지 않으나, 이는 후학들의 몫으로 돌리고자 합니다.
Q 최덕규 근대외교문서 편찬과 외교사 연구 활성화를 위한 재단의 역할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A 김용구 재단은 젊은 학자들을 많이 지원해야 합니다. 그리고 신진 연구 인력을 육성하고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합니다. 아울러 재단의 도움으로 외교문서 발간이 가능했다는 점을 감안하여, 향후 이 성과들을 DB로 만들어 학자들과 일반인들이 널리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Q 최덕규 향후 어떤 연구를 하실 계획입니까?
A 김용구 저는 젊은 교수시절부터 꿈꾸어 온 두 가지 일을 현재 진행하고 있어서 행운이라 생각합니다. 외교문서 발간과 개념사가 그것입니다. 개념사 연구는 2007년부터 10년간 한국연구재단으로 부터 지원을 받고 현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에서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희망을 말하자면 여건이 허락된다면, 실증적인 연구보다는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긴 안목으로 한반도 문제를 통찰할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향후 저의 주요 연구 과제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