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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
일본내 4개 평화공원에 묻힌 한국인희생자 실태 현장조사 시설별로 추도비설립 주체, 한국인희생 서술여부 등 차이 있어
  • 최운도 재단 정책연구실 정책팀장

우리가 6월 중순 일본을 방문했을 때 그곳의 날씨는 찜통 같이 무더웠다. 거기다 우리의 방문예정지인 4개 도시들은 오키나와, 나가사키, 히로시마, 도쿄로 모두 남쪽에 치우쳐 있다. 이번 출장은 일본 내 추도시설들에서 한국인 희생자들에 대해 추도와 기록 실태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방문 대상지들은 우리에게 낯익은 장소들이지만 이번에는 추도시설들을 한꺼번에 돌아봄으로써 비교를 통해 각각의 특징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

이 평화공원은 태평양전쟁 종반의 격전 끝에 많은 사람들이 몸을 던진 마부니(摩文仁) 언덕을 끼고 조성되어 있다. 1965년 처음 오키나와 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가 1972년 오키나와 반환과 함께 일본 유일의 국정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평화의 초석'은 오키나와 현이 태평양전쟁/오키나와전쟁의 종결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95년 6월23일 건립하였다. '평화의 초석'이라 불리는 100여개의 비석들에는 총 241,167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약 1만명의 한국인들이 오키나와전투에서 희생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신원이 확인된 365명의 한국 출신 희생자들과 북한 출신자 82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오키나와 한국인 위령탑

구름이 끼었음에도 불구하고 후텁지끈한 날씨에 1시간여에 걸쳐 마부니 언덕 가에 각 현이 조성한 추도시설을 돌아보면서 한국인 위령비 구역으로 향했다. 이 구역은 1975년 조성 당시 우리 정부 주도의 '한국인 위령탑 건립위원회'에서 추진한 것이다. 위령비의 비명은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이며, 비문 '영령들에게 바치는 노래'는 이은상 작임을 명시하고 있다. 큰 돌무덤은 당시 우리나라의 각 도에서 보낸 바위들을 모아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어서 평화기념자료관(1975년 설립)을 들렀다. 자료관을 걷다 보면 <조선인 학살>이란 제목의 패널이 나온다. 오키나와에서는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반도 등으로부터 강제 연행된 많은 사람들이 각지의 부대에 배치되어 비행장 건설이나 항구 등에서 노역하였으며, 혹독한 노동에 더하여 충분한 식량도 주어지지 않았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나가사키 원폭자료관

오키나와에 이어 우리는 비행기로 나가사키로 이동하였다. 나가사키 평화공원에는 뜨거운 햇살이 내리 쬐고 있어서 그늘이 아니면 걸어 다니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60여년 전의 8월 9일 햇빛은 6월보다 훨씬 뜨거웠을 터이고, 그냥 서 있기도 힘들 정도였을 터이다. 그 위에 원자탄이 작렬하였다니 상상만으로도 진저리가 쳐졌다.

나가사키 원폭 조선인 추모비

평화공원에는 1975년 피폭 50주년 공원개축시 세계 15개국으로부터 상징 기념물을 기증받아 세계평화 상징구역을 정비한 바 있다. 그런데 기증국들 중 7개국은 당시 공산주의 국가들이었다. 당시 동유럽 국가들의 체제를 생각해 보면 이들의 기증은 평화에 대한 기원보다 사실은 원자탄을 투하한 미국에 대한 비판에 무게를 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화에 대한 염원을 그렇게 활용해도 되는 것일까? 공원 한켠에는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가 서 있다.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회'에서 1979년 시민들의 뜻을 모아 설립한 조그마한 묘역이다. 그 모임에서 제작한 일본어 사죄문은 조선인 강제노동자들의 고통과 이들에 대한 사죄의 마음이 잘 담겨 있다. 이 사죄문은 영어, 한글로도 번역되어 3개 국어 판이 나란히 서 있다. 그런데 한글 번역은 북한식 표현이 많이 있으며, 번역도 조악한 수준이며, 심지어 얼핏 읽어보면 마치 조선인이 일본에게 사죄하는 듯한 문장도 눈에 들어온다. 무더운 공원을 뒤로하고 원폭자료관을 찾았다. 전시가 시작되는 첫번째 패널 <피폭전의 나가사키>에서 나가사키 역사를 매우 간략히 설명하고 있다. 특히 "나가사키의 시민들은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한발의 원폭에 의해…"라고 설명한 후 곧바로 1945년 미국의 핵무기 투하 결정과 그 실행, 그리고 그에 따른 피해의 참상을 보여준다. 그러다 보니 전체적으로 피해만을 강조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전시실의 마지막 부분에 가면 외국인 피폭자들의 증언을 비디오로 들려 주는 장소가 있다. 그 곳 설명 패널에는 <나가사키 외국인 피폭자>라는 제목으로, "피폭자 중 가장 많은 것은 조선인이었다. 조선반도로부터 강제 연행되고 군수 공장 등 노동자로서 동원된 사람도 많았다"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음성 가이드에는 "피폭자들의 평화를 위한 목소리를 들어 주십시오. 피폭자들 중에는 일본사람들 말고도 많은 외국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라고만 기록해 별도로 조선인을 지칭하지는 않았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나가사키 평화공원을 방문한 후 곧 바로 히로시마로 이동했다. 몇일째 뙤약볕에 돌아다니다 보니 출발 때 한 곁에 품고 있던 여행의 설렘은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히로시마 평화공원 입구에 있는 설명을 보니 공원은 평화기념자료관 이외에도 국립추도 시설이 있으며, 공원 내 별도로 한국인 추도비가 있다고 표시되어 있다. 1949년 히로시마평화도시건설법의 통과로 1954년 평화공원이 완성되자, 자료관은 히로시마 평화회관 원폭기념진열관이라는 이름으로 1955년 개관, 수차례의 개축을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인 희생자에 대한 설명은 나가사키에 비하면 수 차례에 걸쳐 보다 상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농어민의 조선이주>, <조선인, 중국인 등의 강제 연행> 등에서 피폭 이전의 조선인 관련 설명들이 문자와 음성으로 제시되고 있다. <피폭>, <외국인 피폭자> 부분에서도 국가 총동원령에 의해 강제 동원되어 온 조선인들이 희생자들이 속에 많이 포함되어 있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음성 가이드는 "참으로 많은 히로시마 시민이 희생되었습니다. 그때 조선과 중국에서 강제징용으로 와있던 많은 사람들도 희생되었습니다"라고 설명한다. 자료관을 나와 걷다 보면, 공원 한 곁에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가 서 있다. 이 비석은 민단이 1970년 설립한 것으로 히로시마시의 소극적 태도와 민단과 조총련간의 갈등으로 공원 밖 강변에 방치돼 왔다가 민단과 시민단체들이 '민족차별'이라고 항의한 결과, 29년만인 1999년 공원 내로 옮겨지게 되었다고 한다.

치도리가후치〔千鳥ヶ淵〕 '무명 전몰자의 묘'

신칸센을 타고 히로시마에서 도쿄로 이동하였다. 비로소 마지막날 오전 치도리가후치 '무명전몰자의 묘'를 찾았다. 일본 민주당 정부 시절, 야스쿠니를 대체할 국립추도시설의 후보로 거론되던 곳이다. 치도리가후치라는 연못(에도시대에는 성을 둘러싼 해자로 만들어졌다)을 사이에 두고 일본왕의 거주지인 황거와 마주하고 있으며, 그 반대편에는 작은 찻길을 두고 야스쿠니 신사와 마주하고 있다. 이 곳은 해외에서 사망한 무명 전몰자들의 유골을 모시기 위해 1959년 일본 정부(후생성)가 건설한 시설이다. 신원이 확인된 이들은 맞은 편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으니, 두 시설이마주보고 들어선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1953년 이후 정부파견단이 수집한 것과 전후 해외에서 귀환한 부대와 개인이 가지고 돌아온 유해를 모셨으니 군인과 군속 외에도 해외에서 희생된 일반 국민도 포함되어 있는 셈이다. 언제, 어느 전투에서 사망했는지 모르기 때문에 "앞의 전쟁에서(先の戦争で) 희생된 자들"이라고만 표현하고 있다. 입구의 외국어 안내판에는 5개 국어 중 한국어 음성안내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안내 내용이나 시설 어디에도 한국인에 대한 언급은 볼 수 없었다. 중일전쟁 이후 전몰자 총수를 240만으로 추정한다고 하는데 그 중 최소한 1%(2만 4천명)는 조선인희생자일 텐데 이를 입증할 수 없다니 안타까울 뿐이다.

비교의 관점에서 본 4개 추도시설의 특징

위의 네 군데 시설은 한국인 추도비 설립의 주체가 누구인지, 그리고 피폭과 전쟁피해 원인 대한 설명에서 서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조선인 또는 한국인 피해자에 대한 언급에 있어서는 오키나와의 평화공원이 가장 구체적인 반면 나가사키의 경우는 히로시마 평화공원보다 더 간접적으로만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치도리 가후치 묘역은 아예 이에 관한 언급이 없다. 보다 구체적인 비교는 추후에 하기로 한다. 다만, 나가사키 평화공원의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의 한글 번역에서는 잘못된 부분이 여러 곳 발견된 만큼 향후 상당한 정도의 수정을 해야 할 것임을 미리 지적해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