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재단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로고 동북아역사재단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로고 뉴스레터

역사인물
강위, 문호개방과 근대화에 앞장 선 선각적 지식인
  • 이헌주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고환당 강위(古歡堂 姜瑋, 1820∼1884)
조선 말기의 대표적 시인, 개화사상 형성의 선구자

고환당 강위(古歡堂 姜瑋, 1820∼1884)는 조선 말기의 대표적 시인이요, 개화사상(開化思想) 형성의 선구자다. 개화사상은 19세기 중엽 내우외환에 직면한 조선사회의 위기를 문호개방을 통해 서구의 우수한 제도와 문물을 수용하여 타개하려 했던 부르주아적 변혁사상이었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제자로 실학을 기반으로 개화사상으로 나아간 인물이라는 점에서, 또 임술민란(壬戌民亂), 병인양요(丙寅洋擾),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제2차 수신사(修信使) 등 중요한 역사 현장에 직접 참여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는 개화사상의 형성과정을 누구보다도 잘 보여준다.

문과 급제의 꿈을 버리고, 김정희에게 수학하다

강위는 1820년 경기도 광주에서 한미한 무반 가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양(晋陽)이고, 호(號)는 추금(秋琴)·자기(慈屺)·청추각(聽秋閣)·고환당 등 다양하였다. 병약하여 11세에 글 공부를 시작하였고, 14세부터는 정건조(鄭健朝)의 집에 머물며 함께 문과를 준비하였다. 22세가 되자 과거를 포기하고 고증학자 민노행(閔魯行)에게서 경학을 배웠고, 4년 뒤 스승이 타계하자 제주도에 유배 중인 김정희를 찾아가 수학하였다. 이후 유배에서 풀린 추사를 따라 서울로 왔다가 재차 북청의 유배지까지 쫓아가 1852년까지 7년 동안 배운 후 이듬해인 1853년까지 두 차례나 전국을 일주하는 방랑을 하였다.

「의삼정구폐책」을 짓다

방랑을 마친 그는 가족과 함께 전라북도 무주(茂朱)에 정착한 이후 덕유산을 중심으로 영호남을 오가며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러던 그는 40대에 접어든 1860년대가 되자 적극적인 현실 참여를 시작하였다. 1862년 3월 무주에 머물던 강위는 임술민란의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그는 격문을 써달라는 난민들의 요구를 거절하여 집이 불타는 화를 입고 간신히 몸을 피해 서울로 올라왔다. 민란이 확산되자 조정에서는 삼정이정청(三政釐正廳)을 설치하고 철종이 구언교(求言敎)를 내려 방책을 묻는 등 사태 해결에 부심하였다. 이때 정건조는 그에게 책론을 쓸 것을 거듭 권유하다 거절당하자 감금한 채 억지로 쓰게 하였다. 한 달여의 감금생활을 하면서 강위가 쓴 글이 3만여 자에 달하는 「의삼정구폐책(擬三政捄弊策)」이었다.

「의삼정구폐책」에는 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정약용(丁若鏞)등 남인 실학자들의 개혁론에 정통하였던 강위의 식견과 오랜 농촌생활에서 나온 농촌 현실에 대한 깊은 이해가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개혁론의 골자는 민란의 원인이 증세와 균등하지 못한 부세(賦稅) 징수로 촉발된 유민화에 있으며, 균등한 부세징수를 위해 양전의 시행, 군역의 공평한 부과, 환곡제 개혁 등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삼정문제를 삼정운영 개선으로 풀고자 했던 조정에서 이러한 개혁안이 반영될 리 만무하였다.

양요와 연행사행을 거치며 개국론자가 되다

병인양요는 강위의 관심이 국제정세로 옮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1866년 7월 하순 평양에서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발생했고, 8월 중순에는 프랑스 선박 2척이 한강의 양화진에까지 올라오는 일이 벌어졌다. 고종이 양이(洋夷)의 재침에 대비한 방책 마련을 지시한 가운데 그는 총융사(摠戎使) 신헌(申櫶)을 대신하여 강화도에서 양화진에 이르는 예상 침입로를 답사한 후 상세한 방어책을 담은 「청권설민보증수강방소(請勸設民堡增修江防疏)」를 썼다. 이 상소에서 그는 서양이라는 새로운 적을 상대하기 위한 방법으로 정약용의 『민보의(民堡議)』에서 제시된 민보방위론과 중국인 위원(魏源)이 쓴 『해국도지(海國圖志)』 「주해편(籌海篇)」의 방어책을 결합한 새로운 전술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양요에서 드러난 서양 군사력은 무기체계의 근대화와 같은 근본적인 변화 없이 단순한 전술상의 변화만으로 극복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양요를 통해 이 점을 절감한 강위는 서양을 경시하는 사회 분위기와 조정의 고식적인 무비책(武備策)을 크게 우려하며 서양의 실체 파악에 부심하였다. 1873년과 1874년 잇달아 다녀온 연행사행(燕行使行)은 강위가 보다 풍부한 정보를 바탕으로 국제정세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여 개국론(開國論)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연행을 통해 그는 조선이 살아남는 길은 승산 없는 전쟁이 아니라 문호개방을 통한 외교적 해결에 있다고 믿게 되었고, 귀국 직후부터 위험을 무릅쓰고 공공연히 개국론을 주장하였다.

조일수교와 조미수교의 당위성을 주장하다

강위는 1876년 접견대관(接見大官) 신헌을 수행하여 강화도 현지에 나아가 일본과의 수교 교섭이 무사히 이뤄지는 데 기여하였다. 당시 접견대관 일행은 조약을 무사히 타결하기 위해 두 가지 난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하나는 여론상 우위에 있었던 척사파(斥邪派)의 논리에 적절히 대응하면서 조약 체결의 당위성을 설득하는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일본의 무리한 요구를 막아내면서 조일관계가 파국으로 치닫지 않도록 조약을 성사시키는 문제였다. 그는 조약 체결을 즈음해서 「대상환재박상공규수서(代上瓛齋朴相公珪壽書)」, 「심행잡기(沁行雜記)」, 「의소(擬疏)」 등의 글을 남겼는데, 그가 강화도 현지에서 정세를 판단하여 중앙의 박규수에게 전달하고 그와 긴밀하게 의견을 나누면서 안팎의 난제를 해결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1880년 5월 김홍집(金弘集)이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될 때 강위도 서기(書記)로 동행하였다. 당시 수신사 일행은 주일청국공사관에서 『조선책략(朝鮮策略)』을 받아 귀국하였고, 이때부터 조선정부는 조미수교와 개화정책 추진을 본격화하였다. 하지만 『조선책략』 반입은 유생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유생들의 반대운동이 조일수교와 개화정책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까지 번져나가자, 그는 「박악라불가선연의(駁鄂羅不可先聯議)」와 「의고(擬誥)」를 지어 유생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개화정책 추진의 정당성을 역설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서구 열강 중 미국과 우선적으로 수교해야 하고 추진해야 할 자강정책의 구체적 내용도 제시하였다. 그의 연미자강론(聯美自强論)은 1882년 4월 6일 제물포에서 이뤄지는 조미조약 체결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개국의 첫걸음인 조일수교는 물론 조미수교 과정에도 일정한 역할을 함으로써 개화사상이 태동하는 데 초석을 놓았던 것이다. 이후 그는 1882년 김옥균(金玉均)을 따라 재차 일본에 건너갔다가,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발발하자 어윤중(魚允中)과 논의하고자 단독으로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환갑이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던 그는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기 8개월 전인 1884년 3월 10일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도(道)는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한 것

강위는 문호개방과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개화세력을 대표하여 척사론자들과 치열하게 이념적인 논쟁을 벌였다. 그가 척사론을 비판했던 핵심논리는 도(道)는 '보국안민(保國安民)'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일 뿐인데, 척사론자들의 주장에서는 도가 목적으로 전도되었다는 것이었다. 도에 대한 전도된 인식은 '보국안민'이 아닌 '위국살민(危國殺民)'을 초래할 것이라며 통렬히 비판하였다. 당시의 서세동점(西勢東漸) 현상을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인식했던 개화론자들과 그것을 일시적 현상으로 간주했던 척사론자들의 대응양태는 명백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한미한 무반가계 출신이라는 한계를 딛고서 평생을 치열하게 살다 간 강위! 김홍집은 강위문집의 서문에서 "홀로 변하지 않은 때에 그 변화를 보고서 이 세상을 미연(未然)에 구하려 하였으니 그마음이 어찌 지금 상상할 수 있는 바이겠는가? 그가 끝내 뜻을 펼 기회를 만나지 못하였으니 운명일 뿐이다. 후에 시문으로 선생을 알고자 하는 자가 또한 어찌 선생의 진면목을 다 알 수 있겠는가?" 하고 탄식하였다. 과연 김홍집의 말처럼 강위는 자신의 뜻을 펼 기회를 끝내 맞지 못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