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은 '한일협정'이 체결된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러나 한일협정의 협상과정과 협정문 해석을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2005년 8월 한국정부는 한일회담과 관련된 외교문서 161건 약 36,000장 분량의 문서를 전면 공개했다. 한국정부의 한일회담 관련 외교문서 전면공개 이후, 일본에서는 '한일회담문서의 전면공개를 요구하는 모임'이라는 시민단체가 결성되어 일본정부에 정보공개를 청구했고, 이 소송에서 일본정부가 패소함에 따라 외무성은 2008년 5월 약 60,000장 분량의 문서를 공개했다. 그러나 일본정부가 공개한 문서는 연도, 의제 등에 일관성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정리되지 않아 사실상 자료로서 그대로 활용하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또한 공개된 문서 중 약 25%가 내용을 알아볼 수 없도록 먹칠이 되어 있었다.
일본 외무성이 공개한 문서는 한일 간 국교정상화 교섭에 관한 일본 측 사고방식, 정책 등을 연구하는 데 가장 가치 있는 핵심자료로, 이에 대한 정리 및 분석 작업은 향후 한일관계와 관련한 분야의 지적 재산의 구축은 물론 한국 정부의 대일외교정책에도 크게 기여할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이에 따라 국민대 일본학연구소와 동북아역사재단 독도연구소는 일본 외무성이 한일회담 관련문서를 부분 공개한 이듬해인 2009년부터 2012년까지 4년간 이들 문서를 수집·정리·해제하는 작업을 했고, 이 책은 그 결과물의 일부에 해당한다. 연구팀은 6만 장의 문서를 주제별로 ①청구권·경제협력 문제, ②기본관계 문제, ③법적지위 문제, ④문화재 문제, ⑤선박 문제, ⑥어업 문제, ⑦독도 문제, ⑧북송 문제, ⑨억류자 문제 ⑩기타로 분류하였다. 그 중 독도와 관련된 문서만을 따로 추려내고 해제하여 2011년 동북아역사재단에서 『1952~1969 독도관련 일본 측 외교문서』(총 6권)와 『독도관련 일본 측 외교문서 해제집(1952~1969)』으로 출판하였고, 이 책은 자료집과 해제집 작업의 학술적 결과물이다. 책은 모두 7편의 논문과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수록된 논문의 주제는 다음과 같다.
* 한일회담 시기 일본의 독도정책 전개(이원덕)
* 한국 식민지시기 전후의 연속성 속에서 본 한일 독도문제의 역사성과 정치적 함의』(전상숙)
* 대일평화조약 형성과정에서 일본정부의 영토 인식과 대응 분석: '고유영토 다케시마(독도)' 영유 의사의 검증(장박진)
* 한일회담과 독도: 한국, 일본, 미국의 대응을 중심으로(조윤수)
*「분쟁해결에 관한 교환공문」 교섭과 독도 영유권 문제(최희식)
* 한일회담기 독도에 대한 일본의 인식과 대응 변화: 일본 국회회의록을 중심으로(정미애)
* 한일회담기 한국언론과 독도문제: 1961~1965년 일본외교문서 자료를 중심으로(박선영)
이상 7편의 논문 외에 부록으로 「독도 영유권 이론에 관한 교환각서」와 「독도문제 국제사법재판소에의 제소에 관한 교환각서」가 첨부되어 있어 독도 관련 연구의 귀중한 기초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독도 관련 일본 움직임을 세 시기로 분류
이 책에서는 일본 측 한일회담 문서 중 독도관련 문서를 분석한 결과, 일본 측의 독도 관련 움직임을 세 시기로 나누고 있다. 1단계는 1950년대로서 한국 측의 평화선 선포 이후 독도 분쟁화를 맞아 일본 측이 문제해결을 위한 대책을 다각도로 구상했으나, 결과적으로 국제사법재판소(이하 ICJ) 제소를 해결방식으로 내세운 시기다. 2단계는 청구권 문제가 진전됨에 따라 한국 측에서 나온 제3국 조정안이 새로운 해결방안으로 부각되자 그에 대해 일본 측이 대응을 모색했던 1962~1963년 무렵까지의 시기다. 3단계는 한일회담이 최종적인 타결국면을 맞이함에 따라 독도문제 해결규정을 교환공문으로 공식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시기다. 수록된 논문이 대상으로 하고 있는 시기는 다음과 같다.
1단계 : 전상숙, 장박진
1~3단계 : 조윤수, 정미애
2~3단계 : 박선영
3단계 : 최희식
한국의 식민지시기 전후 한일관계의 연속성 속에서 독도문제를 고찰해보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아시아 질서의 재편성이라는 미국의 정책구상과 미국이 전략적 파트너로 선택한 일본의 국가적 성장을 위한 국제적 역학관계가 한국문제를 규정하는 기본구도를 이루고 있고, 이것이 곧 독도로 표상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독도문제에 대해 한일회담 과정에서 보여준 한국, 일본, 미국의 대응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과거 독도에 대한 일본의 무관심 문서 통해 확인
한편 일본이 현재 펼치고 있는 주장과 달리 패전 이후 영토질서 확정시기에 일본이 보인 영토문제에 대한 인식이나 대응을 상세히 고찰한 결과, 일본은 이 시기에 독도 영유에 대해 적극적인 교섭을 벌인 일이 없었으며, 따라서 일본의 고유영토에 기초한 독도영유론은 타당하지 않다. 단적으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과 관련된 일본 외교문서에는 독도에 대한 언급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공식 교섭기록에 독도 기술이 나오지 않는 이유에 대해 세 가지 경우를 상정해볼 수 있다. 첫째, 교섭이 필요 없는 일본영토라고 확신하는 경우, 둘째, 한국영토로 인식함으로써 교섭을 벌이지 않았을 가능성, 셋째, 독도에 대한 낮은 관심. 이상의 세 가지 경우에 대해 면밀히 검토한 결과, 가장 타당한 이유는 일본의 '독도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것이다. 평화조약의 과정에서 일본이 일관되게 열의를 보인 것은 북방영토와 남서제도들이었으며, 현재 고유영토임을 강조하면서 그 귀속을 주장하고 있는 독도에 관해서 일본은 거의 대응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의 독도에 대한 무관심은 한일회담기 일본 국회회의록이나 독도관련 보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50년부터 1965년까지 요시다 시게루-하토야마 이치로-기시 노부스케-이케다 하야토-사토 에이사쿠 내각의 독도에 대한 인식과 대응을 살펴보면, 일본은 전후에는 독도에 관해 전략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으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독도에 대한 인식과 대응이 보다 구체화되고 강경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1단계에 해당하는 요시다 내각기에는 평화조약의 체결 외에도 한국의 평화선 선포도 있었다. 그러나 요시다 내각은 이에 대한 대응책을 고심하면서도 대립보다는 협력에 중점을 두고 절충하고자 했으며 독도를 크게 문제삼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이 독도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62년부터로 일본은 독도를 한일회담 타결의 조건으로 제시했고, 1963년에는 독도문제의 해결을 국교정상화의 전제조건으로 내걸었다. 한편 일본의 외교문서에는 한국 언론의 한일회담에 관한 보도내용이 자세히 보고되어 있어, 일본 당국이 한일회담에 대한 한국 여론을 주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독도관련 보도는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이는 당시 일본이 독도문제를 한일회담에 필요한 협상카드의 하나로 여기고 있었을 뿐 독도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고자 하는 의도가 크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연구팀은 특히 3단계에 주목하여 "독도는 한일회담의 의제가 아니며, 국교정상화 이후에 논의해도 된다"는 입장을 고수하던 한국과 ICJ 제소를 고수하던 일본이 어떤 이유와 경로를 통해 「분쟁해결에 관한 교환공문」 교섭을 시작했는지, 그리고 교환공문이 오늘날 독도문제에서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 일본 외교문서를 통해 답을 찾고 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 일본은 지속적으로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며 ICJ 제소를 제안하는 등 표면상 독도문제에 우선순위를 부여한 것은 사실이나, 일본정부는 독도에 대해 높은 전략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으며 국내 대책이라는 측면에서 독도문제에 접근했다. 둘째, 일본은 교환공문에 의해 독도문제 타결을 위한 실마리를 확보하려 했으나, 오히려 한국의 실효적 지배라는 '현상유지'를 더욱 고착화시켰다.
한일 공문서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 허상 드러내
이상과 같이 이 책은 한일회담과 관련된 한일 공문서를 통해 오늘날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의 허상을 명백히 밝히고, 독도문제가 갖는 정치적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이는 한일회담 외교문서라는 1차 자료에 기초한 연구결과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으며, 한일회담 외교문서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분석은 독도에 대한 일본의 논리를 반박할 수 있는 좋은 근거자료가 된다는 점에서 후속연구가 계속 나오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