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재단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로고 동북아역사재단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로고 뉴스레터

역사인물
다시 보는 '한일 평화의 사도' 사명대사'임란' 전쟁의 시대에서 평화의 시대를 도출한 '탐적사(探賊使)'
  • 손승철 강원대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

"관병이 왜적을 제압하지 못하니, 대사가 승병을 일으켰다. 위엄이 바다 멀리 뒤흔들고, 하늘이 큰 간담을 알았도다.
서 너 마디 선화답으로 달랠 뿐, 번거롭게 묘책을 짜내지 않았다. 귀국하여 임금님께 보고하고는, 옛날처럼 죽장 잡고 입산하셨네."
- 사명대사의 생애를 그린 택당 이식의 시에서 -

사명대사는 1544년 경남 밀양의 풍천 임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응규였다. 그는 16세때 직지사로 출가하여 묘향산 보현사로 서산대사를 찾아가 선리(禪理)를 배웠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승병 2천여명을 모집하여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평양성 탈환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1594년부터는 4차례에 걸쳐 서생포에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강화회담을 했다. 가토는 조선 4도를 일본에 귀속시킬 것과 순화군을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했지만, 사명대사는 이를 거절하고 일본군의 철수와 조선과의 교린(交隣)을 지킬 것을 주장하였고, 결국 회담은 결렬되었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죽음으로 7년간의 무모한 전쟁은 끝이 났다. 임진왜란은 동양 삼국에 커다란 정치적 변화는 물론, 침략을 당한 조선에게는 아물 수 없는 전쟁의 깊은 상흔을 남겼다. 200만 명 이상이 죽거나 다쳤으며, 전국의 328개 읍 중 182개가 유린되었고, 150만결이었던 농지는 그 5분의 1인 30만결로 크게 줄었다. 서울의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과 불국사 등 수많은 사찰이 불탔고, 서적을 비롯하여 엄청난 문화재가 약탈당했다. 왜군들은 조선 여성들을 집단으로 성폭행고, 살인과 납치를 자행하였다. 임진왜란 후에 순절자를 포상하기 위해 1617년에 간행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의하면, 국가에서 정표(旌表)를 내려 준 숫자가 효자 98명, 충신 54명, 열녀 433명이었다. 열녀가 효자와 충신의 숫자보다 3배나 많았다. 실제로는 훨씬 많은 순절자가 있겠지만, 이 통계만 보더라도 여성들이 얼마나 많은 수난을 당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또한 일본군은 조선여인이나 어린아이들을 납치하여 굴욕적인 생활을 강요하는가 하면, 노예로 팔아 넘기기도 했다. 얼마나 많은 조선인이 납치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5만명에서 20만명까지 추산된다.

사명대사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 삼국 상황은 매우 급박했다. 중국의 경우, 무리한 군사동원으로 명의 군세가 약화되었고, 만주에서는 여진(금)이 성장하는 것을 억제하지 못해 결국 명·청이 교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전쟁으로 전국토가 유린된 조선은 피로인(被虜人)의 쇄환(송환) 등 전후 복구가 급선무였고, 무엇보다 만주에서 여진이 성장하는 것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침략자였던 일본에서도 새로 수립된 도쿠가와 정권은 국내정치를 안정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면서도 명이나 조선의 보복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전쟁에 의해 식량 공급이 끊어진 대마도의 경우, 조선과의 무역재개는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따라서 삼국 모두 이러한 국내 상황 속에서 대외적으로 새로운 국제질서를 만들어 가기 위한 노력을 모색하게 되었다.

'탐적사'로 임명된 사명대사, 도쿠가와 상대로 강화 담판

조선과 일본의 강화에 앞장섰던 건 대마도였다. 조선국왕으로부터 매년 하사 받던 쌀도 콩도 들어오지 않게 되었고, 또 무역도 단절되었으니 조선과의 접촉을 서두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1603년 10월에는 도쿠가와 막부는 하동 유학 김광을 귀국시켜 강화를 요청했다. 김광은 상소를 통해 일본의 동향을 전했는데, 조선이 강화를 불허하면 일본이 재침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조선에서는 일본의 국정도 탐색할 겸 사절파견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사절파견을 앞두고 명칭이 문제가 되었다. 기본적으로 일본과의 교린관계에서는 믿음을 통한다는 '통신사(通信使)'가 파견되었지만,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는 한 그 명칭을 사용할 수 없었다. 결국 사절의 명칭은 도적놈을 정탐한다는 의미의 '탐적사(探賊使)'로 했다. 일본에 대한 조선인의 대일감정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리고 탐적사의 정사로는 임진왜란 때 의병승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했고, 또 강화회담의 경험이 있던 사명대사를 임명했다.

1605년 3월, 사명대사는 교토의 후시미성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났고, 4월에 피로인 3천여 명을 인솔해 귀국한 후, 강화의 조건으로 일본장군국서, 범릉적 박송, 피로인 쇄환의 3가지를 요구했다. 이 3가지 조건은 양국 관계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교토 후시미성

첫째, 국서요구와 일본국 왕호 요구는 일본으로 하여금 전쟁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는 것이다. 일본국 왕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의 최고통치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명으로부터 일본국왕으로 책봉을 받아야 가능하다. 나아가 일본국왕은 조선국왕과 대등한 입장이라는 의미이다. 조선 측의 이러한 요구는 명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외교질서를 재편하겠다는 의도였다.

둘째, 1592년 4월 부산으로 침입한 일본군은 20일 만에 서울에 이르러, 일본군의 한 부대가 현재 지하철 2호선 선릉역 부근에 있던 성종의 왕비능인 선릉(宣陵)과 중종 능인 정릉(靖陵)을 도굴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왕릉 도굴이 결코 개인적인 범죄가 아니라, 조선이란 국가를 범한 것에 대한 응징을 의미하는 내용이었다.

셋째, 침략전쟁은 조선인에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큰 고통을 주었는데, 그 중 하나가 민간인을 강제 연행해 간 것이다. 이들을 군인포로와 구분해서 '피로인(被虜人)' , 즉 잡혀간 사람들이라는 용어를 쓴다.

사명대사 양국 강화 성사시켜 조선후기 평화시기 열어

이 강화조건은 의외로 빨리 이루어져, 불과 1개월 만에 개작된 장군국서와 범릉적으로 대마도인 두 사람을 압송해 왔다.예상보다 빠르게 어려운 조건이 실행이 되자, 조선에서는 이미 그것들이 거짓임을 알아냈다. 그러나 조선은 요구가 관철되었다는 현실적인 명분과 교섭의 주도권을 갖는다는 외교적인 실리를 취해, 사절을 파견하기로 했다. 하지만 사절단의 명칭은 일본의 진심이 미심쩍어 통신사라는 칭호는 사용할 수 없고, 일본의 강화요청에 대한 회답과 피로인을 쇄환시킨다는 의미의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로 했다. 이들은 1607년 6월에 에도에 도착하여 강화의 국서를 교환하고 피로인 1,240여명과 함께 한양으로 돌아왔다. 이로써 임진왜란에 의해 단절된 양국의 국교가 정식으로 재개되었다. 2년 뒤, 1609년에는 기유약조(己酉約條)를 맺어 단절된 교역을 다시 회복하였다. 이후 조선후기 260여 년간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다. 탐적사 사명대사가 이루어낸 외교적인 쾌거였다. 일본의 침략에 의해 저질러진 전쟁의 시대를 종식시키고, 평화의 시대로 이끌어 간 사명대사는 1610년 해인사에서 입적하였다. 지금부터 50년 전, 일제강점기 36년간의 식민통치를 청산했다고 하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과정과 비교해 보면 곱씹어 볼만한 많은 역사적인 메시지를 던져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