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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백범 김구, 장제스, 그리고 카이로선언
  • 한시준 단국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위의 3대국은 한국인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자유 독립되게 할 것을 결의한다"

이는 1943년 12월 1일 발표된 카이로선언에 들어 있는 내용이다. 카이로선언은 1943년 11월 23~26일까지 미·영·중 3국 정상들이 이집트 카이로에서 회의를 갖고, 그 회의에서 합의한 내용을 발표한 것이다. 여기에 일본이 패망하면 한국을 자유 독립시킨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는 연합국들이 전후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 것으로, 한국 민족의 운명을 결정지은 그야말로 '대한민국 독립의 문'이었다.

카이로선언에 "한국독립문제"가 들어간 것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지난 2013년 카이로선언 70주년을 맞아 일부 언론에서 이에 대해 "루스벨트(Roosevelt)와 홉킨스(Hopkins)의 합작품"이라거나 "장제스(蔣介石)는 카이로회의에서 한국문제를 공식거론한 일이 없다"거나, "카이로선언 탄생은 이승만의 외교활동의 성과"라는 내용을 부각한 것이다. 이는 "김구 주석을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장제스를 찾아가 한국의 독립을 주장해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라는 기존 견해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고, 미국과 이승만의 역할을 내세운 것이다.

중국 측 자료에 나타난 카이로회의

필자는 이를 보면서, 카이로회의와 관련한 자료를 찾았다. 그 결과 장제스의 비서로 카이로회의에 참석했던 왕충후이(王寵惠)가 작성한 '카이로회의 일지'를 비롯하여 중국 측의 많은 자료들을 새롭게 발굴하였다. 이들 자료에 카이로회의 전 과정이 소상하게 나타나 있다.

카이로회의는 미국 측이 제안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1943년 6월 루스벨트가 장제스에게 만날 것을 제의하였고, 최종적으로 11월에 이집트 카이로에서 루스벨트·처칠·장제스가 참석하여 회의를 갖기로 결정하였다. 회의를 앞두고 중국 측은 중국이 제안할 내용에 대해 사전준비를 하였다. 군사위원회 참사실과 국방최고위원회 판공청에서 각각 별도로 준비하여 장제스에게 보고한 자료에는 모두 '한국독립문제'가 들어가 있었다. 국방최고위원회에서 작성한 것에는 "중·미·영·소는 즉시 함께 또는 개별적으로 조선의 독립을 승인하거나 조선의 전후 독립을 보장하는 선언을 발표한다"고 하면서, 중국이 먼저 제안할 경우, 중국에 미칠 장점과 단점을 분석 정리하기도 하였다.

중국은 카이로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제의한다는 방침이었다. 카이로회의는 11월 23일 오전 11시에 세 정상이 참석한 제1차 정식회의로 시작되었다. 이 날 저녁 장제스는 부인 쑹메이링(宋美齡)과 함께 루스벨트 숙소를 찾아가 홉킨스가 배석한 가운데 4시간여 동안 만찬을 했다. 이 자리에서 장제스는 만주·대만·펑후다오(澎湖島)등 중국 영토 반환을 제안하는 한편, 일본이 패망하면 한국을 자유 독립국으로 할 것을 제의하였다. 루스벨트는 이에 동의하였다. 그리고 보좌관 홉킨스에게 장제스와 토론한 내용을 근거로 초안을 작성하도록 지시하였다.

11월 24일 오후 4시, 왕충후이는 홉킨스의 초안을 검토한 후 장제스에게 보고하였다. 장제스는 펑후다오가 오가사와라섬(小笠原島)으로 잘못 기재되었다며 이를 수정하도록 지시하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동의하였다.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 카이로 선언

11월 26일 오후 세시 반, 왕충후이·홉킨스·영국 외무차관 카도간 세 사람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때 영국 측은 "한국을 자유 독립국으로 만든다"는 내용을 "일본의 통치에서 벗어나도록 한다"로 수정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아예 한국문제는 빼버리자고 하였다. 왕충후이는 일본의 침략정책이 한국에서 비롯된 것을 이유로 들면서, "말도 안되는 일"이라며 반대하였다. 그러자 카도간은 영국은 한국문제에 대해 내각에서 결정한 바가 없다는 것, 소련이 반대할 것이라는 이유를 내세우며 한국문제를 빼버리자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루스벨트는 카이로에 와 있던 주소련미국대사 해리만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 해리만은 "소련은 이와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소련과 협의할 필요가 없다"고 대답하였다.

왕충후이·홉킨스·카도간 세 사람은 루스벨트·처칠·장제스·쑹메이링이 회담하고 있는 곳에서 작성한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이때 루스벨트는 한국독립문제에 대해 소련의 의견을 헤아릴 것이 없으니 그대로 하자고 하였고, 세 영수도 이에 찬성하였다. 이로써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보장한 카이로선언이 완성되었다.

김구, 장제스를 통해 독립을 이끌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로 보면, 카이로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여 관철시킨 데에는 중국의 역할이 컸다. 그렇다면 중국이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주장하게 된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일까 하는 문제가 남는다. 그것은 이미 공개된 1943년 7월 26일 주석 김구를 비롯하여 외무부장 조소앙, 선전부장 김규식, 광복군 총사령 이청천, 부사령 김원봉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통역 안원생을 대동하고 장제스를 면담한 자료가 말해준다.

1942년 이래 미국과 영국에서 국제공동관리 문제가 대두되자, 임시정부는 1943년 초반부터 이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2월 1일 외무부장 조소앙이 국제공동관리를 반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한 것을 비롯하여, 5월 10일에는 충칭(重慶)에서 활동하고 있던 모든 단체들이 모여 재중국자유한인대회를 개최하고 반대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이때 장제스가 루스벨트를 만난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장제스를 찾아가 중국은 국제공동관리에 현혹되지 말고 한국의 독립을 지지 관철시켜 줄 것을 부탁하였고, 장제스는 한국의 독립 지지에 힘쓰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카이로회의에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카이로선언에 한국독립문제가 들어가게 된 것은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의 독립의지와 노력을 통해 이룬 성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