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동북아시아 정세는 정확히 100년 전인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전야의 유럽 정세에 종종 비유되고 있다. 다른 시간과 공간이지만 두 현장 모두 과거사나 영토 문제로 여러 나라들이 서로 갈등관계이거나 갈등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 아래 지금 동북아역사재단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더 크다.
동북아역사재단은 10년이 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수많은 사업성과를 이루었다. 사업성과의 제목만 나열해도 100쪽이 넘을 만큼 방대하고 다양하다. 이런 방대한 사업결과들이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묻혀버린다면, 애초에 사업을 추진하지 않은 상황보다 못하다.
연구성과의 활용도를 높이는 방안 가운데 하나는 재단의 연구활동과 성과들을 서로 연계해 축적하는 것이다. 연구성과들이 선행연구를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또 후행연구도 이를 비판적으로 수용하여야 연구결과 활용의 효율성이 증대되고 학문도 발전한다. 여러 연구 내용들을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홈페이지에 공개하는 것뿐 아니라 주제어로 다양한 자료들을 검색하고 또 그 연구의 요지들을 바로 읽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연구사업의 활용도를 높이는 것은 동북아역사재단의 권위를 드높이는 길이기도 하다. 그 권위의 원천은 양보다 질이고, 특수성보다 보편성이며, 배타성보다 개방성이다.
배타적 점유와 개방적 공유
역사와 영토는 근대국가체제의 속성상 매우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 센겐조약(Shengen Agreement)으로 국경 출입이 자유로운 유럽과 달리 동북아시아에서 국경 출입은 엄격히 통제되고 있고, 이런 근대국가체제에서는 특정 영토를 공유할 수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특정 역사를 배타적으로 소유하려는 노력도 전개되고 있는데, 우리 역사를 타국이 공유하는 것을 무조건 나쁘게만 볼 필요는 없다. 현재의 남이 과거의 우리 역사를 자기 영역으로 주장한다면 오늘날 우리의 영역은 축소되는 면이 있겠지만, 동시에 오늘날 남의 영역을 우리가 점유하는 것이 되는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배타적 점유와 개방적 공유는 각각 일장일단(一長一短)이 있는 것이다.
현재 관계가 좌우하는 과거사 갈등
흔히 두 나라의 과거사는 오늘의 두 나라 관계를 지배하는 것으로 일컬어지는데, 오히려 오늘의 양국 관계가 두 나라의 과거사 갈등을 좌우하기도 한다. 역사 해석은 주관적 측면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주관적 차이는 현재의 적대관계 때문에 심화되기도 하고 현재의 우호관계로 말미암아 완화되기도 한다. 우적관계에 관한 뚜렷한 경향 가운데 하나는 상호성(reciprocity)인데, 이는 상대국이 호감을 표하면 이쪽도 상대국에게 호감을 느끼고, 상대국이 비(非)호감으로 대하면, 이쪽도 비호감이 된다는 것이다. 즉 과거사 문제로 현재의 우호관계가 훼손되는 경로뿐 아니라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는 경로 역시 상호성에 있다.
양국 간 우적관계는 다른 국가에 대한 선호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100년 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이탈리아는 동맹을 맺은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저버리고 반대편에 참전하였다. 실제 유사시 돕고 돕지 않고는 100% 동맹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매우 다자적인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 동북아시아에서도 우방국의 우방에 대해 우호적이고, 우방국의 적국에 대해 적대적이며, 적대적 국가의 우방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경향이 관찰된다. 물론 적대국의 적대국을 우호적으로 대하지는 않지만, 대체적으로 구조균형(structural balance)적 경향이 관찰된다. 동북아시아의 과거사와 영토 문제도 이런 구조균형적 다자관계 속에서 전개되고 있다. 특정 국가와 과거사나 영토 문제가 있으면, 그 국가뿐 아니라 동북아시아 역내 다른 국가 그리고 역외 국가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
흔히 영토 영유권을 둘러싼 실제 이해관계가 영토 인식을 결정한다고 일컫는데, 거꾸로 영토 인식으로 영토분쟁이 좌우될 때가 더 많다. 이 경우 인과관계 경로는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규정한다는 유물사관과 정반대다. 예컨대 독도나 이어도 쟁점들은 한국인뿐 아니라 다수 일본인이나 중국인의 실생활과 직접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정체성 문제와 연계되어 갈등을 빚는 것이다. 저항적 정체성과 패권적 정체성은 구분해야겠지만 지나친 정체성은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전통적 영토 정체성의 탈근대적 업그레이드
특히 일본 정부의 영토 교육 강화는 영토 문제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2013년 일본 정부가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독도를 자국 영토로 인식하는 일본인 비율은 그렇게 높지 않다. 이런 낮은 수치는 일본 정부가 추진하는 인위적인 영토 교육 강화로 몇 년 후 빠르게 증가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동북아시아 여러 나라의 영토적 정체성 현황을 실증적으로 또 객관적으로 정리해놓아야 한다. 이는 한국 입장에 유리한 타결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당사국 간 인식 차이가 커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여 화해와 번영의 동북아시아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정치적·경제적·국제법적·역사적 영토 개념은 배타적 관할권과 특수한 이해관계를 중시한다. 이에 비해 문화 예술적 영토 개념은 국가를 초월한 보편적 가치에 더 가깝고 또 탈근대적 영토 개념에도 더 가깝다. 물론 문화·예술적 영토라고 반드시 공존과 상생이라는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문화적 제국주의와 식민지가 그런 예다. 역설적으로 그런 속성 때문에 특수성과 근대성을 고수하는 측도 영유권의 문화 예술적 강화 방식에 동의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관이나 영유권을 근대적 방식뿐 아니라 탈근대적 방식으로도 업그레이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