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은 러시아의 대문호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곤차로프(Ива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Гончаров, 1812~1891)가 집필한 『전함 팔라다』(문준일 옮김)를 번역서로 출간하였다.
이 책은 곤차로프가 제독 뿌쨔찐(Е.В. Путятин)의 비서로 '팔라다' 함대에 승선하여 여정 중에 남긴 일지와 편지를 바탕으로 쓴 여행기다. 곤차로프는 1854년 당시 조선의 거문도와 동해안을 탐사하고 관련 기록을 남겼다. 이 글을 통해 당시 제정 러시아가 인식한 조선의 역사와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그가 중국과 일본, 류큐(琉球, 현재의 오키나와)를 서로 비교하고 각 나라의 역사를 소개하는 모습에서 당시 러시아인들이 동북아 지역에 대해 이미 상당한 지식을 축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 여행 애호가들의 필독서
곤차로프의 『전함 팔라다』는 19세기 중엽 세계 여행기라는 측면에서 문학적으로 주목받았다. 『전함 팔라다』는 젊은 시절 안톤 체홉(А.П. Чехов)을 비롯한 여행을 동경하는 당대 사람들의 베스트셀러였다. 『전함 팔라다』는 영국, 일본 등의 식탁을 소개해주는 '식유기(食遊記)'라는 점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곤차로프는 1812년 6월 6일(러시아력) 심비르스크(Симбирск)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곤차로프는 1820년 사제 트로이츠키가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입학하여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배웠다. 곤차로프는 1822년 모스크바상업학교에 입학했고, 1831년 모스크바국립대학교 문학부에 입학하였다. 당시 모스크바국립대학교에는 게르첸, 레르만또프, 뚜르게네프 등이 다녔고, 곤차로프는 모스크바국립대학교에서 푸쉬킨을 직접 만날 수 있었다.
곤차로프는 1834년 대학을 졸업하고 심비르스크 현의 관리로 임명되었다. 곤차로프는 1847년 장편소설 『평범한 이야기』를 발표했다. 1849년 잡지 『현대인』에 『오블로모프의 꿈』을 발표했다. 곤차로프는 제독 뿌쨔찐의 비서로 전함 팔라다호를 탔고, 1852년 10월 7일 러시아를 출발해서 1855년 2월 13일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곤차로프는 항해 중 일지를 작성하고 편지를 보냈다. 여행기는 1855~1857년 사이 『전함 팔라다』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고, 1858년 2권의 책으로 발간되었다. 곤차로프는 1855년 12월 검열관이 되었지만 1860년 2월 사직했고, 1859년 10년 전부터 준비한 『오블로모프』를 완성하였다. 곤차로프는 1862년 7월 신문 『북방우편』의 편집장을 지내고 1863~1867년 사이 출판과 관련된 위원직을 맡았다.
곤차로프는 1869년 소설 『절벽(단애)』을 20년 만에 완성하였다. 곤차로프는 1870~1880년대 『안하는 것보다는 늦는 것이 낫다, 백만의 고통, 벨린스키라는 인물에 대한 단상』 등의 몇몇 비평만 썼다. 곤차로프는 1891년 말년에 쓴 모든 작품, 편지, 단상을 소각했고, 1891년 9월 15일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제독 뿌쨔찐은 1852년 함대를 구성했다. 전함 팔라다호(Фрегат Паллада), 캄차카 함대 소속 코르벳함(군함) 올리부차호(корвет Олибуца), 스쿠너 범선 보스톡호(шкуны Восток), 수송선 공작 멘쉬코프호(транспорт Князь Меньшиков) 등이다. 제독은 소령 코르사코프(Корсаков)를 추천하여 스쿠너 범선 보스톡호의 함장으로 임명했다. 팔라다호는 함장 소령 운콥스키(Унковский)를 비롯하여 장교 22명과 승무원 439명으로 구성되었다. 이 중에서 보스톡호에 승선할 장교 6명과 수병 37명도 포함되었다. 수도원(Alexander Nevsky Lavra) 아바쿰(Аввакум) 신부는 중국어 통역을 맡았다.
러시아황제 니꼴라이 1세(НиколайⅠ)는 1852년 중국과 일본과의 개항을 추진하기 위해서 러시아 제독 뿌쨔찐을 특사로 임명하였다. 팔라다호는 1852년 10월 7일 크론쉬타트(Кронштат)를 출항하여 영국에서 구입한 스쿠너 범선 '보스톡호'와 함께 극동으로 항해했다. 이들은 1851년 극동함대 소속 코르베츠 '올리부차호' 및 수송선 '공작 멘쉬코프호'와 합류하여 1853년 8월 10일 일본의 나가사키(長崎)에 도착했다.
팔라다호 조선 방문의 의미
팔라다호는 1854년 4월 2일부터 4월 7일까지 거문도에 정박했다.(1차 조선 방문) 곤차로프는 거문도의 첫인상을 기록했다. "여기저기 조선인의 농가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보이는 것은 초가지붕뿐이었고 드물게 주민이 보였다. 모두들 마치 수의를 입은 것처럼 흰옷을 입고 있었다."
곤차로프는 거문도를 직접 답사했고, 필담으로 조선 주민과 대화했다. 팔라다호는 1854년 4월 20일 조선 연안에 도착해서 동해안 조사를 시작했다.(2차 조선 방문) 팔라다호는 1854년 4월 25일 위도 39도의 조선 동해안을 측량했고, 5월 5일 위도 41도의 동해안을 측량했다. 팔라다호는 1854년 5월 9일 두만강에서 6마일 거리에 정박했다. 팔라다호는 4월 20일부터 5월 11일까지 22일간 초산만(울산만)에서 북위 42도 31분(두만강 하구) 지점에 이르는 동해안 전역을 실측했다.
서양에서 최초로 독도의 서도와 동도를 명명한 국가는 러시아였다. 조선의 동해안을 조사한 함대는 러시아 제독 뿌쨔찐이 이끄는 '팔라다호'였고, 독도를 발견한 함정은 '올리부차호'였다. 러시아는 19세기 중반 조선의 동해안을 탐사하면서 서도와 동도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면서 독도의 명칭을 표기했다. 이는 러시아도 독도를 한국의 영역으로 파악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먼 여행을 돌아온 곤차로프는 『전함 팔라다』에 자신이 깨달은 절대악에 대한 비판과 처벌에 관한 이중성을 꼬집었다.
"돌을 천 개 던져보아도 소용없던 악에 작은 돌 하나를 쓸데없이 던져야 할까? 일은 논쟁의 여지가 없이 분명하다. 비난받는 쪽은 죄를 인정하면서 침묵한다. 재판에서 선고는 내려졌지만 선고를 이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