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에 처음 한국을 찾은 후 거의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한국과 오랜 인연을 맺고 있는 에드워드 슐츠 교수를 이정일 연구위원이 서강대학교에서 만났다. 한국 대학의 변화를 여느 한국 사람보다 잘 알고 있으며, 역사를 배우는 젊은이들이 고대사, 중세사를 외면하는 현실을 걱정하는 그와 함께 고려시대에 관한 이야기와 해외에서 한국사 연구를 활성화하기 위해 재단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대화를 나누었다. _편집자 주
에드워드 슐츠(Edward J Shultz) 하와이대학 명예교수
영미권 한국학 연구자 1세대이자 한국중세사 분야에서 손꼽히는 권위자로 고려시대를 전공했다. 지난해 하와이대학에서 정년퇴직했고, 올해 다시 한국을 찾아 서강대학교 사학과에서 초빙교수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현재 『고려사절요』 영역 등 연구를 지속하며 한국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이정일 30여 년 이상 영미권 한국사 학계에서 활동하다가 지난해 정년을 맞이한 후 한국에 다시 왔다. 감회가 새로울 것 같다.
에드워드 슐츠 1966년도에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처음 부산에 왔다. 하와이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논문을 쓰기 위해 다시 서강대학교에 왔고, 이기백 선생님 등 한국의 저명한 학자 분들을 사사했다. 학생으로 또 교수로 한국을 드나들며 한국 학자들과 교류하고 연구를 하면서 꾸준히 한국과 인연을 이어왔다. 정년퇴임을 할 때 주변에서 만류하기도 했지만 개인 연구를 할 수 있게 되어서 오히려 기분 좋게 퇴임할 수 있었다. 건강이 허락할 때 가고 싶은 곳도 가고, 하고 싶은 것도 하려고 한다. 교수들이 지나치게 오래 일하는 것도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학문발전을 위해 후배 학자에게 양보도 해야 한다. 사실 퇴임 후에도 개인적으로 해야할 일은 많다. 내년에는 다시 하와이로 가서 하와이대학 동서문화센터와 함께 작업을 해야 하고, 하와이대학 출판부의 고문도 맡아야 한다.
이정일 고려시대사는 한국 사학계에서도 상대적으로 전공자 층이 두텁지 못하다. 이 시기를 전공한 계기는?
에드워드 슐츠 고등학교 때부터 불어를 배웠는데, 대학에 들어와 완전히 다른 외국어를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중국어를 배웠다. 중국어 강의를 듣는 사람이 2~3명밖에 없어서 강도 높게 배울 수 있었다. 한국에 와서 서강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했을 때 다른 학생들보다 내가 한자를 조금 더 알고 있으니 중세사를 하면 좋겠다고 당시 지도교수님께서 권했고 고려시대 공부를 시작했다. 거부감은 없었다. 유학생들에게는 새로운 개척지였고 시작할 당시에는 내가 거의 유일한 외국인 연구자였다. 특별히 뛰어난 사람도 없었고 외국 학생이 고려사를 공부한다고 하니 주변의 한국 연구자들이 도움을 많이 줬다. 고려대학교 강진철 교수님께 특히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정일 중점 연구 분야가 정치사, 그 중에서도 ‘무신의 난’인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에드워드 슐츠 박사 논문을 쓸 때가 박정희 정권 때였고 고려 무인시대와 당시 박정희 정권을 비교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고려 무인시대와 박정희 정권을 비교하면 비슷한 점이 많다. 고려의 최충헌과 박정희는 모두 군사력으로 정권을 잡았고, 그 후에는 문치(文治)주의를 표방했다. 또 두 쿠테타 이후에는 경제적인 성장이 있었다는 점에서 평가가 갈리기도 한다. 또 고려시대 무신을 반대한 세력은 불교, 그중에서도 교종 스님들이 주를 이루었다. 마찬가지로 박정희 정권 때는 학생들과 노동자들뿐 아니라 천주교, 개신교 목사들이 종교적 반대를 이끌어냈다.
이정일 해외 학계에서는 아직도 중국사와 일본사가 동양사의 주류이고 한국사를 연구한다고 해도, 현대사나 근대사 쪽으로 몰려 있다. 중세사를 연구하는 데 어려움은?
에드워드 슐츠 해외에서 중국사와 일본사에 비해 한국사쪽 연구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또 요새 젊은이들이 장학금이나 펀딩이 많아서인지 중국사나 일본사에 매력을 많이 느끼는 것과 비교해 한국사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다. 한국사를 전공하려면 기본적으로 한국어를 알아야하는데 특히 고대사나 중세사를 연구하려면 한자도 알아야하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선뜻 연구에 나서지 못하는 것 같다. 또 한국어를 하는 교포들이 고대사, 중세사를 연구한다면 좋겠지만 교포 연구자들도 대개 자주 접하고 당장 한국이 직면하는 역사 문제들이 많은 현대사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고대사, 중세사를 모르면 현대사와 현대문화를 깊게 이해할 수 없다. 한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근대사나 현대사 분야에서는 학생들이 수준 높은 질문들을 던지며 열띤 토론을 하지만 중세사와 고대사로 거슬러 올라가면 자신 없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늘 뿌리를 먼저 알아야 한다고 학생들에게 강조하고 있다. 뿌리를 알지 못하면 결국 껍데기만 배우는 것과 같다. 고려시대와 현재의 접점은 생각보다 훨씬 많다. 시험제도, 인쇄문화, 오늘날 한국의 다원문화도 고려시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니 고려시대를 들여다보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를 파악하고 앞으로 생길 문제를 대비하는 데 아주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정일 구체적으로 고려가 현대 한국(사)에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에드워드 슐츠 묘청과 김부식의 대립을 보면 묘청은 국수주의자였고 김부식은 국제적인 감각으로 현실적인 외교관계를 중시한 인물이었다. 이런 대립관계가 쌀 시장 개방 등 현대 한국 사회에도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 지금 한국 사회는 고려의 현실주의 외교정책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김부식은 당시 중국을 방문하면서 국제 감각을 키우고 현실적인 외교를 많이 펼쳤다. 1127년 금나라 공격을 받은 송나라가 고려에 협공을 요청했는데 고려는 나라의 이익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오랜 우호관계를 맺어왔던 송나라의 부탁을 거절하는 현실적인 외교를 실천했다. 미국이 한국에게 자국의 미사일방어체계에 가입하기를 원하고 있지만 확실한 답을 내놓지 않고 중국과 북한 눈치를 보며 주저하고 있는 현재 한국 상황에서는 특히 고려의 현실적인 외교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고려의 왕성했던 다원주의 문화도 주의 깊게 봐야한다. 고려는 외국문화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것을 덧붙여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능력이 탁월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전통을 합쳐 새로운 고려의 전통을 만들었다. 유교, 불교, 도교, 샤머니즘까지 편안하게 받아들였던 고려 사람들은 중국에서 건너온 선종에 고려의 색을 덧입혀 다시 중국으로 전했다. 청자도 중국에서 들여왔지만, 고려만의 특색이 살아 있는 청자를 제작했다. 다른 나라의 문화를 흡수하여 자신의 문화를 창조할 수 있으면 개인 문화가 더욱 발달할 수 있다. 요즘 한류열풍을 살펴보면 한류 콘텐츠는 100% 한국 것만 사용해 만든 것은 아니다. 외국의 영향을 받고 한국의 것을 더해 더 좋은 문화를 생산한 것이다. 그 원형을 우리는 고려시대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인들이 자긍심을 느껴도 좋다. 한국의 중세사나 고대사에는 관심이 덜한 교포학생들에게도 현대와 긴밀하게 연관된 이런 부분을 이야기해주면 오랜 한국문화와 역사 전통에 놀라기도 하고 자랑스러워하기도 한다.
이정일 한국의 중세사나 고대사에 해외 학계가 흥미를 느끼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에드워드 슐츠 우선 재미있어야 한다. 고대사와 중세사의 강점은 이야기가 있다는 점이다. 가령 원효대사가 공주와 연애를 하고 설총도 낳았다는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이런 이야기를 활용해 고려 불교를 소개하는 것이다. 한국 고전에는 정말 흥미로운 인물들이 많다. 그 인물들을 통해 고려사를 풀어 이야기해주면 외국인들이 한국의 고대사, 중세사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삼국사기』 번역을 진행하고 있는데 주로 외국인들이 흥미를 가질 수 있는 인물 이야기가 중심인 열전을 번역하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서양 사람들이 재미있게 중세사, 고대사에 대한 사전지식을 얻을 수 있도록 하고, 한국 사람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이정일 국내 학계와 해외 학계가 어떤 방식으로 교류하면 중세사 연구와 교육에 기여할 수 있을까?
에드워드 슐츠 중세사 연구는 후진하고 있는 것 같다. 아직도 나와 같이 공부했던 세대가 번역을 하고 있는 실정이고 아직 눈에 띄는 신진 연구들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학생들은 물론 교수들도 부족하다. 이 상황을 헤쳐 나가려면 국내 학계가 나서서 외국의 뜻있는 학자들과 협력해야 한다. 단순 번역보다는 워크숍을 병행해 토론을 하며 함께 공부하고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일정기간 협업 후, 외국학자들이 영어와 한국어로 논문을 발표한다면 좋은 자료들이 많이 나올 것이다. 다양한 지원이 필요하지만 시스템을 만들어 각국 연구원은 물론 외국 학생들을 조교 자격으로 참여시키면 좋겠다. 이후 이들이 유학을 오거나 갈 때도 도움을 준다면 고대사, 중세사 연구를 활성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정일 지금 하고 있는 연구와 계획 중인 연구를 소개해 달라.
에드워드 슐츠 요즘 개인 연구를 거의 하지 못했다. 『삼국사기』, 『고려사절요』를 번역하는 데 집중하고 있고, 작년 하와이대학과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지원한 논문을 편집중이다. 이 일이 끝난 다음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중세 동아시아사 교과서를 쓸 생각이다. 서양 사람들이 서양 중세사로 프랑스, 독일, 영국을 같이 공부하듯이 한국, 중국, 일본을 합쳐 공부할 수 있는 영어교과서를 만들면 재미있을 것 같다. 3국의 불교문화, 유교문화, 건축 등 주제를 잡아 풀어보면 지금까지와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어 흥미로울 것 같다. 이 부분 역시 한국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함께 해나갈 과제다.
이정일 재단 학술 연구와 관련해 조언을 구한다.
에드워드 슐츠 재단이 하버드대학과 진행한 'Early Korea Project'를 아주 높게 평가한다. 현재 발행한 책 여섯 권은 학자뿐 아니라 일반 지식인들에게도 꽤나 매력적인 한국학 자료가 될 것이다. 앞으로 이런 연구 사업을 계속하면 좋겠다. 한국인과 서양인들이 공동으로 연구하며 결과물을 만들어 냈는데, 그런 면에서 앞으로 해외 학계에 한국학을 알리는 아주 좋은 모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동북아시아는 그 중요성에 비해 해외 학계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우리는 독도문제부터 고구려사까지 외국에 알릴 필요가 있다. 외국에 알려진 일본의 주장, 중국의 논리만 살펴보면 문제의 본질을 깊게 알 수 없다. 한국의 연구성과를 알리기 위해 재단은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한 가지 더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항상 20년 후를 생각해야 한다. 미래연구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학자뿐 아니라 대학원생들의 네트워킹도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아야 한다. 해외 한국학 연구 후속세대를 위한 양성사업에 재단이 힘을 써주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