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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동아시아 격변기 유교적 관료의 전형 린쩌쉬
  • 이영옥 전남대학교 교수

중국인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근대인물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린쩌쉬(林則徐, 1785~1850)는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인물 중 한명이다. 그는 동아시아 격변기에 '새로운 눈으로 세계를 바라본 지식인'이고, '외국의 침략에 저항한 애국적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아편문제를 엄격하게 처리하고 영국 침략에 적극적으로 대비하여 명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린쩌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 것일까?

린쩌쉬는 건륭시대(乾隆, 1736~1795)에 태어나 가경시대(嘉慶, 1796~1820)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 뒤 관료사회에 발을 들였고, 소금 전매·치수·사법과 관련한 요직을 두루 거쳤다. 관직을 수행하며 늘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일을 처리하여 송나라 때의 포청천(包靑天)이라는 재판관에 빗대어 임청천(林靑天)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아편밀수행위를 엄벌할 것을 건의하다

1830년대 말, 린쩌쉬는 청나라 남부지역 총독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당시 영국의 아편밀수가 청나라 사회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사회기강은 해이해졌고, 화폐로 쓰던 은(銀)이 유출되면서 백성들의 세금부담은 크게 늘었으며, 세금 체납으로 나라 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도광제(道光帝)는 관료들에게 아편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건의하도록 하였다. 린쩌쉬는 아편밀수를 금지하고 아편쟁이를 엄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도광제는 그가 한 건의를 받아들였고 광저우(廣州)에 전권대신으로 파견하여 아편문제를 해결하도록 명령하였다. 린쩌쉬는 광저우에서 영국을 비롯한 외국상인들이 불법으로 들여온 아편을 모두 몰수하여 석회와 함께 바다로 흘려보내는 방식으로 폐기처분하였다.

1840년, 영국의회는 아편문제가 아니라 광저우에서 자국민들이 청나라의 가혹한 대우를 받았다는 이유로 군대 파견을 승인하였다. 영국 전함이 청나라 해안에 나타나고 전쟁이 시작되자, 도광제는 전쟁 책임을 물어 린쩌쉬를 파면하였고, 신장(新疆) 지역으로 유배를 보냈다. 그는 5년 뒤에 복직하여 청나라 남서부 지역 지방행정을 담당하였지만 1850년에 황제의 명을 받아서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러 가던 중 병사하였다.

관료로서 린쩌쉬의 생애를 살펴보면, 황제의 신하로서 유교 경전에서 배운 것을 실천하려 했던 왕조시대 인물로 보인다. 그런데 린쩌쉬는 청나라가 아니라 근대 중국의 인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이것은 19세기 중반 이후 중국역사를 서양열강에 저항하고 마침내 자주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으로 보면서, '새로운 눈'이나 '애국적'이라는 말이 인물평가의 중요한 잣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역사를 청·영의 아편전쟁을 기준으로 전근대와 근대로 구분하였고, 인물도 그에 맞춰서 이분법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는 애국주의나 새로운 눈으로 세계를 보는 흐름은 중국사회가 직면한 위기감이나 그 위기를 벗어나려는 행동들을 서술하는 데 유효한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서술이 당시 인물들이 살던 '사회 상황'이나 그들의 '현실인식'을 정확하게 그리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현재 중국에서는 역사인물을 평가하면서, 기존의 흑백논리에서 벗어나서 실사구시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다양한 분석을 시도하고 그들의 진면목을 충실히 밝히려 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충신과 간신 모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린쩌쉬에 관한 평가도 주로 그가 언제 어떻게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를 보았는지', 또 얼마나 '뛰어난 애국적 행동을 하였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평가는 인물의 실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각과 행위를 당시 사회 속에 놓고 파악하기 힘들게 한다.

천비(穿鼻) 해전에서 격파되는 청 군함 (왼쪽 그림) 아편을 빼앗아 불태우는 린쩌쉬 (오른쪽 그림)

근대 중국의 애국지사 모델에 대한 냉정한 검토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먼저 린쩌쉬에게 애국심이 있었을까? 그는 국가를 위해 제 모든 것을 바친다는 생각을 하기보다 천조(天朝)로 여겼던 청나라의 안녕을 위하여 충성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 유교의 민본주의적 관점에 따른다면, 린쩌쉬에게 중요한 것은 백성들의 삶이었고 그들이 고통받지 않게 하는 일이었다. 그는 애국적 지식인이 아닌 '유교적 관료'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린쩌쉬는 '새로운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았을까? 그가 외부세계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새로운 눈'은 오로지 외부세계에 대한 호기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린쩌쉬가 '새로운 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판단할 기준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기준은 그가 영국을 비롯한 소위 '야만인들(夷人)'이 펴낸 외국지리에 관한 책을 번역하게 한 것이 단순한 호기심이었는지, 아니면 청나라의 변화를 위하여 필요한 지식을 배우려는 의도였는지의 여부다. 사실 그는 '야만인들'의 침략에 전통적인 방식으로 대응하였고, 새로운 무기도입이 필요하다는 인식도 부족하였다. 그는 공명정대하고 사심 없으며 존경받을 만한 유능한 관료이며 유학자였지, 시대를 앞서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본 지식인은 아니었다. 그에게 근대라는 맞지 않는 옷을 입히는 것은 역사인물을 바라보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19세기 중반 중국은 정치·경제·사회·문화 여러 분야에서 커다란 변화에 직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물을 평가할 때, '변화'의 측면을 부각하려 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변화' 측면만을 강조하면 19세기 중반 사회가 실제보다 더 앞선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다. 근대 중국은 명확하게 발전 정도가 서로 다른 두 개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외국과 접촉하면서 변화를 추구하던 지역이었고, 다른 하나는 여전히 과거 방식대로 생활하던 지역이었다. 그리고 19세기 중반 이후를 살던 중국인들 중에는 이 두 세계에서 영향을 받은 인물들이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린쩌쉬는 18세기 후반에 살았던 스승들에게서 교육을 받았고, 19세기 초반에 자신의 사유 방식을 형성하였으며, 19세기 중반에는 자신의 경험을 기초로 하여 당시 상황을 판단하고 행동하였다. 따라서 린쩌쉬의 행위와 그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세기 중반이라는 정지된 시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중반에 이르는 삶의 궤적을 추적함으로써 그의 행위를 바라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