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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재단의 최고 전략은 전문성 축적"
  • 글 이 훈 (한림대 연구교수·재단 명예 연구위원)
위. 독도연구소 개소 2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에서
인사말을 하는 이훈 명예 연구위원
아래. 지난 12월 31일 퇴임식에서 김학준 이사장
에게 꽃다발을 받는 이훈 명예 연구위원

동북아역사재단 근무 8년 만에 '정년퇴임 1호'가 되었다. 사실 이 '1호'라는 것 때문에 원고라도 부탁받으면 어쩌나 했는데 걱정대로 되어버렸다. 처음이라니 어쩌겠는가? 언제나 그렇듯 궁시렁(?)거려 본다.

재단 근무 8년은 이전 직장인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근무했던 기간과 비교하면 절반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고, 근무 환경이나 업무 내용도 많이 달랐다. 나이 들어 옮긴 직장이었지만 동북아 역사와 관련 있는 여러 분야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생각하고, 말할 수 있었던, 개인적으로는 역동적으로 보낸 즐거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내 긴장을 풀지 못한 시간이기도 했다. 왜 그렇게 긴장했을까? 우선은 시간적으로 안전거리가 확보되지 않은 사안을 다뤄야 하는데서 오는 불안감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 같다. 전선(戰線)에 나오기는 했지만 정작 탄환은 가져오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랄까?

재단에 오기 전까지는 연구자로서 아주 편한 시간을 보냈다. 곰팡이 냄새가 가시지 않은 문서를 만지면서 성과를 내고, 상상력을 발휘해서 소신껏 논문을 쓰던 시절이었다. 바로 지금 일어난 일도 정확히 분석하기가 어려운데 옛날 사료만 보고 상상력을 발휘해서 몇백 년 전 일어난 일을 그럴 듯하게 쓰다 보면 어느 때는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의 시정거리가 점술가보다 더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앞선 연구자들과 다른 새로운 얘기를 하면 좀 어떤가? 그렇게 해석한다는데! 참 마음 편하던 시절이었다.

백화점 식 대응에서 비롯한 피로감

그런데 멀지 않은 과거에 일어난 일, 바로 얼마 전 근대 역사를 연구하는 재단에 오고 나니 사정이 달랐다. 재단에서는 일본과 역사 현안을 다루는 제1연구실, 조직개편 후 역사연구실, 그리고 독도연구소에 근무하면서, 일본교과서 기술, 일본군'위안부' 문제 등 지금 현재 외교 현안이 된 모든 과거사 문제들에 직접 부딪히게 되었다. 사안에 따라서는 관련 당사자가 존재하고 고려해야 할 대상과 고객이 많아 용어 하나하나에도 조심해야 하는 등 상상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세계였다. 재단을 떠날때까지 이 긴장과 불안은 가시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불안감의 정체가 바로 나 자신의 전문성이 부족해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재단에서 다루는 일본 교과서, 일본군'위안부' 문제 등은, 사실 학문으로써 역사는 길지 않다. 연구 대상으로 본다면 틈새시장의 주제라 할 수 있고, 지금까지 누가 관심을 가지고 그 문제를 취급했는지 하는 관점에서 보면 적어도 연구자들이 주체는 아니었다. 그런 만큼 각 분야별로 연구 성과 축적도 충분하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재단의 대응이 일방적인 억지 주장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적어도 상대방이 우리에 관해 알고 있는 만큼은 전문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했다. 일본과의 관계만 보더라도 예측할 수 있는 도발 일정이 1년 내내 끊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전문성이 필요함을 절실하게 느끼면서도 시간을 흘려 보내고 말았다.

현재 재단에는 한·중, 한·일 간 역사 현안 관련 전문가들이 50명 정도 있다. 한국, 일본, 중국의 역사, 지리, 국제법 분야 연구위원들과 이들을 지원하는 행정원들을 합치면 100명 정도가 근무하는 곳이다. 그런데 누가 보더라도 이 작은 기관에서 감당해야 할 일은 매우 많다. 현안 대응은 물론이고, 전문성 확보, 또 재단을 지켜보는 고객들의 요구와 취향까지 신경 써야 한다.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문제지만, 돌이켜 보면 우선순위 없이 백화점 식으로 대응하다 보니 재단에 근무하는 몇 년 동안 '전문성' 대신 '피로'만 축적된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사실 이런 피로나 긴장감은 재단에 근무하는 구성원이라면 대부분 꽤 누적되어 있을 것이다.

새로운 10년 준비, 업무 우선 순위 설정부터

2016년은 재단이 출범한 지 딱 10년이 되는 해다. 재단의 모든 연구부서에서 근무해 본 경험자로서, 또 전문성을 확보할 시간이 없어 아쉬워했던 사람으로서 이 대목에서 한 마디 하자면, 지금은 재단이 과연 이 모든 일들을 이전처럼 백화점 식으로 해야 하는지 한 번 점검해 볼 때라고 말해주고 싶다. 어려워진 한·일 관계, 달라진 한·중 관계 속에서 새로운 10년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우선 순위를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

사실 어떤 것을 우선으로 놓고 어떤 것을 뒤로 미뤄야 할 지 결정할 수 있는 기준은 바로 전문성이다. 전문성은 재단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갖춰야 할 기본이라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데 필요한 전문성이란 상대방의 대응을 향후 몇 년 치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정도여야 한다. 그리고 이 전문성은 결정하는 위치에 있을수록 더 필요하다.

앞으로 한·일, 한·중 관계가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따라 전문성 축적이야말로 재단의 최대 전략이 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재단 근무 시절에는 시간이 없다고 투정만 했는데, 과거 역사가 외교 현안이 되는 곳에 근무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역사를 보는 눈이 생긴 것 같다. 지금은 TV에서 어떤 뉴스를 들어도 긴장하지 않는 호사를 누리고 있는 만큼, 재단 근무 덕분에 생긴 안목을 살려 그동안 하지 못했던 것들을 다시 보고 쓰는,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무쪼록 재단 임직원들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며 동시에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