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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진시황제, 우리가 아는 '중국'의 뼈대를 세우다
  • 글 임병덕 (충북대학교 교수)

시황제(B.C.259~B.C.210)가 천하를 통일하기 전, 진왕 정은 유능한 인재를 국적에 관계없이 발탁하여 내정을 공고히 하고, 동시에 교묘한 외교술과 기마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무력을 통해 B.C.230년 한나라를 멸망시킨 것을 필두로 조, 위, 초, 연, 제 이렇게 여섯 나라를 불과 10년 만에 평정하고 통일을 달성하였다. 천하를 통일한 진왕 정은 '왕' 대신 '황제'라는 칭호를 채택하였다. '황제' 칭호는 그 후 청조가 멸망할 때까지 약 2,100여 년 동안 중국 역대 왕조에서 군주를 부르는 정식 호칭으로 사용하였다. 또 시황제는 천하를 36군으로 나누어, 각 군마다 수(守)·위(尉)·감(監)을 두고 전국에 군현제를 시행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하였다.

도량형·화폐·도로·문자 통일로 일군 불멸의 업적

시황제는 전국시대 각 국가마다 달랐던 도량형을 통일해 진량(秦量)·진권(秦權)이라 불리는 승(升)이나 분동(分銅)을 반포하였다. 중앙에서 보내온 한 홉짜리 용기가 동북지방 근처에서도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사실상 전국에 이 용기를 배당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산업과 경제가 발달하였다. 한편 화폐경제의 맹아도 이미 서주춘추시대에 보이기 시작하였지만 전국시대에 이르자 나라마다 형태가 다른 화폐를 주조하였다. 시황제는 지금 우리가 아는 둥근 동전 중앙에 사각 구멍을 뚫은 반량전 형태로 화폐를 통일하였다.

당시 각국은 다른 나라 수레가 자국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퀴 폭을 달리 하고 있었는데, 시황제는 수레 폭을 6척으로 통일하고 전국 도로망도 정비하였으며 문자를 통일하였다. 또 치도(馳道)를 건설해 지방에 대한 중앙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는 본래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군대를 신속하게 이동시켜 효과적으로 진압하기 위해 만든 것이지만, 이후 교통과 상업 발달에도 기여했다. 이와 함께 문서행정에서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이사가 고안했다는 소전(小篆)으로 문자를 통일하였다. 그런데 '수호지진간'은 통일 이전, 즉 시황제가 아직 문자를 통일하기 전 문자인데도 예서 형태임이 밝혀졌다. 이사의 문자 통일은 공용문자 통일을 의미하는 것이지 개인들의 서체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상제'의 권위를 탐한 '황제' 권력의 몰락

황제의 위상을 빛나는 상제와 동일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황제는 스스로 생사 밖 영원한 존재가 되어야 했다. 시황제는 살아 생전 영원한 안식처인 여산릉을 건설했다. 현재 남아있는 묘는 거대한 분구(墳丘)로 높이가 100여m, 한 변이 500m인 정방형으로 깊게 판 묘실 안에 궁전을 짓고 백관의 자리도 정해져 있으며, 사후에도 호사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현세를 그대로 재현해 작은 중국세계를 만들었다. 또 1974년에 묘의 동쪽 약 1.5㎞ 떨어진 지점에서 유명한 병마용갱이 발견되었다. 병마용은 7,000개 이상에 달하는 인체, 말, 마차 등이 정연하게 늘어서 있는 장엄한 지하공간이다.

진이 6국을 멸하고 시황제가 장군 몽염에게 십만 군사를 주어 흉노를 치게 하였다. 그리고 험준한 산의 능선을 국경으로, 골짜기를 참호로 삼아 여러 성을 수리하여 임조(臨洮)에서 요동에 이르는 약 1만 리 이상 대장성을 축조하였다. 만리장성과 치도 건설 등은 통일 중국의 유지와 미래를 위한 사업이었지만, 아방궁과 여산릉은 황제의 위엄을 과시하려는 성격도 있었다. 더욱 이 사업들이 약 1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대규모로 이뤄져 엄청난 국력을 소모하였다. 막대한 비용은 고스란히 농민에게 부과되었다. 가혹한 법치와 함께 과도한 증세와 징발로 농민의 부담은 한계를 초월하였다.

B.C. 213년 시황제는 이사의 건의에 따라 역사서와 의약, 복서(卜筮), 농업 이외의 서적을 몰수하여 30일 내에 소각하였다. 그리고 이후 고서(古書)에 관해 논하는 자는 사형, 옛 것을 찬미하고 진을 비방하는 자는 일족 전체를 죽인다는 금령을 내렸다. 그 목적은 민간이 소장한 서적과 사학(私學)을 금지하고 그것을 관이 소장하며 관학으로 일원화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분서령이 반포된 후에도 수도 함양에서는 여전히 유가의 경전을 소장하였으며, 박사들이 이를 정리·연구하였다. 갱유는 시황제의 신선술에의 동경이 그 계기가 되었다. 분서를 행한 다음해 자신을 속인 방사(方士) 노생(盧生)에게 분노하여 460여 명을 파묻어 죽였는데, 이러한 분서갱유는 학자와 학문을 탄압한 것으로 후세 사람들이 시황제를 비난하는 근거가 되었다.

중국에서 왕조 교체는 요순에서 했다는 평화적 선양과 실력으로 전 왕조를 타도하는 무력혁명으로 나누는데, 진에서 한으로 이행은 당연히 후자에 해당한다. 한은 진이 법치주의를 근거로 행한 가혹한 폭정을 타도하면서 성립한 왕조다. 따라서 한은 진나라에서 행한 정책을 모두 부정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일 뿐 이면에서 실질적으로 한이 채용한 각 제도는 모두 진대에 만들어진 것이고, 진의 제도를 답습한 것이다. 진의 제도는 그 후 중국 역대 왕조에 계승되었고 지금의 중국공산당 체제 또한 시황제가 완성한 중앙집권적 군현지배체제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진시황은 중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고 오늘날 중국 자체를 만든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동아시아의 책봉체제는 한무제 시기에 성립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또한 진시황이 이룬 통일제국 출현을 전제로 했기에 비로소 가능하였음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