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두 나라는 국교 정상화 후 50년 동안 서로 이웃한 나라인데도 실타래처럼 얽힌 과거사 갈등을 풀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2015년 11월 재단과 한국정치외교사학회는 "동북아 역사화해 학술 인프라 구축을 위한 국제 학술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한·일이 갈등을 극복하고 역사화해로 나가기 위한 여러 논의들이 나왔다. 이 날 독일의 전후처리를 주제로 발표한 다무라 미츠아키 교수를 재단의 김관원 연구위원이 만났다. _ 편집자 주
다무라 미츠아키(田村光彰) 일본 호쿠리쿠(北陸)대학 명예교수
2006년 일본 가나자와에서 뜻 있는 일본인들과 함께 '윤봉길 의사와 함께하는 모임'을 발족해 활동하고 있으며 이 모임의 대표를 맡고 있다. 현재 일본 내에서 전후보상 관련 시민 운동에도 힘쓰고 있다.
김관원 일본에서 전후 보상을 위한 시민운동을 하고 계신데 현재 거주하고 있는 가나자와(金澤)는 일본에서 '보수천국'으로 불리는 곳이라고 알고 있다. 또 가나자와는 윤봉길 의사의 '암장지(暗葬地)'가 있어서 한국인들에게 더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현재 가나자와에서 전개되고 있는 윤봉길 의사를 기리는 활동에 관해 설명해 달라.
다무라 미츠아키 윤봉길 의사는 1932년 12월 9일 가나자와에서 처형당했다. 그러나 군부는 시체를 몰래 묻어버렸고, 사람들은 그 시체가 묻힌 곳 위를 아무 것도 모른 채 걸어 다녔다. 전후 재일조선인들이 암장지에서 윤 의사의 유해를 찾아냈다. 현재 가나자와에서는 일본인이 만든 '윤봉길 의사와 함께하는 모임'과 재일조선인들이 만든 '월진회' 일본지부를 통해 윤 의사의 독립정신을 함께 배우고 한·일 시민 간 우호를 다지자는 목표로 시민 차원의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의거일인 4월 29일, 윤 의사의 고향인 예산군에서는 제향(祭享)이 개최된다. 우리는 매년 이 제향에 참가하고 있다. 6월에는 한국 월진회 회원을 가나자와에 초대하여 매년 '동북아 평화연대 가나자와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있다. 또 12월에는 예산군뿐만 아니라 한국 전역의 초·중·고교와 대학생이 매년 가나자와를 방문하고 있다. 우리들은 학생들을 초대하여 가나자와에 남아 있는 강제연행·강제노동 현장을 답사하는 학습을 시행하고 있다.
김관원 한국 드라마가 '한류'라고 해서 일본 현지에서도 인기가 있었는데, 현재도 한류의 영향이 있는지요?
다무라 미츠아키 일본은 현재, 보수 출판계나 '넷우익' 사이에서 혐한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다. 그들은 '한·일 국교 단절'을 외치며 남·북한 사람들을 일본에서 추방하자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다른 민족을 차별하는 이러한 헤이트스피치(hate speech) 세력이 커졌지만 다른 한편으로, 다문화 교류를 추구하며 헤이트스피치에 대항하는 '사이좋게 지내자 퍼레이드'도 퍼져나가고 있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TV에서 방송하고 있는 한국 드라마 인기는 여전하다. 헤이트스피치 때문에 일시적으로 한국 드라마 방영을 중단했던 방송국이나 위성방송 후지TV도 지금은 다시 한국 드라마를 방영하고 있으며, 하루에 두 편 정도 방영하고 있다. 이런 수치는 최근 10년 이래 변함이 없다.
일본의 역사 드라마 소재는 특히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시대에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한국 드라마는 건국시대부터 시작해 해방 후와 모든 시대를 망라하고 있다. 주인공도 무사뿐만 아니라 상인, 궁녀 등 다양한 인물들이 활약하고 있다. 특히 드라마 '그린 로즈' 내용 중에 윤봉길 의사의 이름이 두 번 등장했는데 안방으로 들어오는 이 한류의 힘과 영향력은 우리 '윤봉길 의사와 함께하는 모임'의 홍보력을 능가하고 있어 기쁘다.
김관원 2006년에 《나치 독일의 강제노동과 전후처리(ナチス・ドイツの強制労働と戦後処理)》라는 책을 출간했다. 어떤 내용인지,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 이 책을 썼는지 간략하게 소개해 달라.
다무라 미츠아키 2000년 7월 6일, 독일 연방의회(하원)는 나치시대에 강제노동을 했던 사람들에게 보상하기 위해 '기억, 책임, 미래 기금' 설립 법안을 가결하였다. 이 기금 설립은 사회민주당과 녹색당 주도로 이루어졌고, '20세기에 저지른 과오는 20세기에 해결한다'는 취지로 정부와 기업이 각각 50억 마르크씩 추렴하여 창설한 것이다. 나치시대에는 있지도 않았던 기업조차도 이 기금에 기부하도록 설득했다. 그 이유는 나치 시대에 있었던 강제노동으로 전 독일사회가 윤택해졌으며, 전후 독일 경제번영이 이 시기에 벌어진 강제노동으로 얻은 것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고 때문이다.
졸저는 다음과 같은 점에 초점을 두고 있다. 첫 번째, 전후처리 문제에는 다섯 가지 행동을 하나로 묶어 실천해야 한다는 점이다. '역사 해명, 사죄, 보상·배상, 책임자 처벌,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화해 노력'이다. 두 번째, 독일이 소홀히 해 온 강제연행, 강제노동에 따른 보상 문제의 전모를 미국, 서구와 국제관계 속에서 해결하고자 했다. 오늘날 각국은 상호 의존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독일에서 강제노동 보상기금을 성립할 수 있었던 요인을 분석했다. 전후보상을 바라는 사람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진상규명 노력과 기업에 자사의 '기업역사'를 쓰게 하여 기업 스스로 어두운 과거사를 마주하게 하고, 또 대화하게 하는 것이다. 또 최근 국제법상 인권을 고려한 흐름도 요인 중 하나다. 반인도적 범죄는 개인이 국경을 초월하여 직접 상대국이나 기업에 소송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다. 개인이든 국가든, 개인을 상대로 범죄를 행한 경우에는 당사자인 개인에게 사죄하고 보상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1996년 독일연방법재판소는 개인의 배상청구권을 원칙적으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한국에서도 이와 관련한 획기적 판결이 있었는데, 2012년 5월 대법원에서 개인의 배상청구권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약으로 소멸하지 않는다는 판결을 한 바 있다. 또 미국에 거주하는 사람들 중 과거에 강제노동을 했던 사람들이 미국에서 독일 기업을 상대로 연이어 집단소송을 일으킨 것도 영향을 주었다. 독일 기업이 나치시절 강제노동과 살육의 역사를 눈감은 채로 미국시장에 진출하기에는 기업 이미지가 매우 나쁘고, 이는 결국 시장을 잃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기업은 결국 집단소송을 그치도록 정부와 공동으로 기금을 창설한다고 선수를 친 것이다.
네 번째, 1950년대부터 독일 전후처리 역사를 정리하였다. 강제노동에 따른 개인보상은 앞서 언급한대로 전후 56년을 지나서야 겨우 시작하였다. 보상대상자는 생존자뿐이다. 보상이 늦었지만 독일의 전후처리는 평가할 만한 점이 많다. 첫 번째로 한정된 것이긴 하지만, 개인보상 문제에서 기선을 잡았던 연방보상법 제정에 관한 것이다. 두 번째로 책임자 처벌이다. 독일은 시효를 철폐함으로써 자국에서 나치가 저지른 범죄를 심판하고, 이 범죄를 영원히 용서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국내외에 표명하고 있다. 세 번째로 바이츠제커(Richard von Weizsacker) 전 대통령이나 브란트(Willy Brandt) 전 수상 등 정치 지도자들이 과거 문제에 눈 감지 않고 과거 반성에 기반을 둔 발언과 자세를 취했다는 점이다. 네 번째로 나치시대를 다시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노력이다. 여기에는 재판관의 시민적 자유, 국제연맹시대부터 이어져 온 교과서 기술의 국제주의, 기본법(헌법)으로 정치 망명자 인도를 선언할 것, 독일이 주변 여러 나라에게 가해국가였음을 나타내는 추도비, 기념비, 기념관 건설 노력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자칫하면 잊어버릴 수 있는 가해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싸움을 의미한다.
김관원 한국에 대한 일본의 전후처리 실태를 독일과 비교해서 평가해 달라.
다무라 미츠아키 일본의 전후처리 문제 중 전후보상에 관하여 말하자면, 첫째 과거 식민지 출신자인 외국인 병사에게는 '국적제한'을 두어 피폭자를 제외하고는 보상 대상에서 완전히 제외하고 있다. 황국신민화 정책을 시행하여 강제로 일본 시민을 만들어 일본 국적을 부여해 놓고, 전후에는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일본 국적을 잃게 만들고, 설상가상 일본 국적이 아니기 때문에 보상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수법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둘째, 강제로 연행하여 일본 기업에서 열악한 조건 하에 강제노동에 시달렸던 노동자들에게도 현재까지 화해한 세 건을 제외하고 보상은 없었다. 일본 재판소는 강제노동 사실을 인정했고, 강제노동자들의 안전을 배려하지 않은 노동정책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국적이나 시효 문제를 이유로 보상을 거부하고 있다. 최고재판소는 2001년 일본 정부의 견해를 추인하여 한일청구권협정과 일본 국내법으로 한국인의 청구권은 소멸되었다는 판결을 내렸다. 최고재판소는 한국에게는 2001년 이후, 중국인 강제 노동자에게는 2007년 이후 일본에서 사법구제할 수 있는 방법을 포기해버렸다. 한편 독일에서는 명백하게 재판소가 개인청구권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사법적 해결은 진척되지 못했다. 따라서 사회민주당과 녹색당 연립정권이 이 문제의 정치적 해결에 적극 나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창설한 것이 앞서 언급한 강제노동 보상 기금이다.
세 번째는 의회에서 정치가의 리더십이 독일과 일본은 차이가 크다. 전후 50년을 계기로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하였다. 일본은 이 담화의 역사적 의의를 인정하고 이것을 한층 더 발전시켜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무라야마 전 총리는 "일본은 국가 정책을 그르쳐서 전쟁을 하는 길을 걸었고 (중략)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막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겼다"고 말했다. 그 후, 아소 다로(麻生太郞),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아베 신조(安倍晋三)로 이어진 내각은 정도 차이는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이 담화를 답습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준 피해와 고통"에 대해서는 보상을 해야 한다. 일본이 일본국 헌법 전문에서 주장하는 대로 '국제사회에서 명예로운 지위'를 차지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일본 정치가는 독일처럼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네 번째로 독일에서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서독이 통일한 시점에 유난히 동독의 역사 자료를 많이 공개했다. 자료 하나가 해명되면 이와 관련한 역사사실이 차례로 뿌리내리며 명백해진다. 2005년 한국에서 한·일 외교문서를 전면 공개한 일은 역사 규명으로 '다섯 가지 세트'를 실천하는 과정의 하나다. 일본이 계속 무시하는 태도로 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다섯 번째로 시효 문제다. 독일은 개정을 두 번 하여 1979년에 시효를 철폐했다. 나치가 저지른 범죄를 영원히 용서하지 않겠다는 자세는 2015년 7월 15일 열린 재판에서도 분명히 나타났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홀로코스트 범죄로 과거에 나치의 친위 대원이었던 사람이 금고 5년 판결을 받았다. 이때 피고 나이는 94세였다. 한편 일본에서는 독일처럼 시효를 폐지하고 있지 않다.
김관원 한·일 간 역사 갈등의 해결과 화해는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가능하다면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다무라 미츠아키 한·일 역사 갈등 해결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일본 정부가 '다섯 가지 세트' 중 하나인 역사 규명부터 시작하여 독일과 같이 국회에서 전후 보상 관련법을 만들어 시행해야만 한다. 그러나 정부와 국회에 기대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교류를 더 많이 긴밀하게 하여 '민간외교'를 활발하게 해야 한다. 시민의 자주성, 주권자로서 행동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라에만 의지하지 말고,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시민 의식과 용기가 필요하다. 인간은 변혁을 일으킬 수 있는 존재다. '석기시대를 벗어난 것은 돌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마이니치 신문 2015. 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