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은 2015년 11월 20일, 을사늑약 110년을 맞아 그 세계사적 의미를 조망하기 위한 국제 학술회의를 한국역사연구원과 함께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했다.
을사늑약 110년인 올해는 시모노세키조약 120주년, 포츠머스조약 11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청일전쟁(1894~1895) 후 한반도에는 러·일 공동보호체제가 형성되었고, 러일전쟁(1904~1905) 후에는 일본의 단독보호체제가 확립되었다. 따라서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드는 과정은 한반도에서 발발한 두 차례 전쟁과 연계하여 비교검토가 필요하다. 특히 을사늑약의 폭력성과 불법성을 밝히고 제국주의 열강이 방조하고 묵인한 끝에 한반도에서 침략국의 폭력이 시작되었음을 밝히는 을사늑약의 역사화 작업은 중요하다.
1부 이종국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2부 반병률 교수 사회로 진행한 학술회의의 대요를 살펴보면, 우선 지난 을사늑약 100년 때 학술회의의 주요 논제였던 을사늑약의 불법성, 강제성, 무효론의 연장선에서 역사 사례들을 비교 연구하고 실증하는 작업이 다양해지고 또 심화되었음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을사늑약 합법성을 주장하는 것이 더 이상 학문적으로는 어렵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학문적으로 더 이상 을사늑약 합법성 주장 어려워
일본의 사사카와 노리가쓰(笹川紀勝) 명예교수는 일본 침략으로 한국 국민이 불이익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 잡으려는 안중근 의사의 저항 논리에 주목했다. 이는 1905년 조약이 일본이 한국에 강제하여 체결되었기 때문에 불법이고 유효하지 않다는 안중근 의사의 국제법 인식에 기초하고 있었다. 따라서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은 의병장으로서 전투 상태에서 공적인 권위로 행해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또 이번 학술회의를 기획한 이태진 명예교수의 '1919년 파리 대표부의 병합무효론'은 을사늑약의 연구 지평을 1920~1930년대까지 확대하여 연계한 점, 그리고 포츠머스 강화회의에 앞서 민영환이 특파한 이승만의 역할과 비교검토해 볼 때 역사적 실증 작업으로 유용하다.
도츠가 에츠로(戶塚悅朗) 교수가 발표한 1963년 UN국제법위원회보고서(國連國際法委員會報告書)에 관한 사례 연구는 1905년 조약이 무효 조약임을 재삼 확인하고 있다. 그리고 더든(Alexis Dudden) 교수가 한 발표는 을사늑약에 탈식민과 문화사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새로운 방법론을 제안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2001년 더반 선언의 시각에서 비교접근의 필요성을 제기한 그녀는 서구중심을 뛰어넘어 반인종주의, 인종차별, 외국인 혐오와 불관용 철폐라는 '트랜스내셔널'한 접근법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1905년 이후 일본이 한국과 한반도를 불법과 야만의 공간으로 만들었음에도 식민지 개척의 합법적 역사로 정당화시킨 왜곡 행위는 부당한 것임을 지적했다. 한 가지 예로 2015년 8월 14일의 제2차 세계대전 70년 연설에서 '러시아에 대항한 일본의 승리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식민화된 사람들을 고무 "encouraged"시켰다'는 아베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언어가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백인을 위해 백인처럼 행동한 일본의 식민지 개척 프레임 워크에 대한 반성적 대안이란 점에서 재고할 여지가 있다.
다른 한편, 학술회의 발표들을 종합해 보면, 주요 논지는 명치 일본의 침략성으로 수렴하고 있다. 그것은 러일전쟁이 일본의 조선 침략을 위한 전쟁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일본 외무성, 해군 및 육군 사료에 기초한 이나바 치하루(稻葉千晴) 교수 발표에 따르면 일본은 이미 1903년 5월 러시아와 전쟁을 결의하고, 1904년 1월 12일 개전을 결정한 뒤 2월 6일에 국교 단절을 통보하고 군사 행동을 시작했으며, 2월 9일 일본군이 서울을 점령한 것은 실질적인 한국 지배를 시작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을 시작하던 당시 국제법을 위반한 것은 아니지만, 선전포고 이전에 군사행동을 개시한 일본의 행위는 옳지 않다는 것이다.
영토 보존과 독립을 위한 고종의 외교 재평가
이같은 부당한 군사 행동은 쑤용(徐勇) 교수에 따르면, 근대 일본의 만한불가분정책에 근거한 것으로 한반도와 중국 동북부, 만주를 겨냥한 침략정책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본의 만한철도건설과 군부의 북방정책을 연계한 것으로 아시아 식민시스템 구축의 기본 요소였다. 또 동북아시아를 공식적으로 일본의 영토로 편입하려는 것으로 류큐, 대만, 한반도 그리고 만주순으로 침략하는 과정이었으며 본격적인 일본 중심 식민지 지배 판도를 구축하는 과정이었고, 마침내 대륙 식민지로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최덕규 연구위원에 따르면, 일본의 침략적인 전쟁 기도와 불법적이고 강압적인 지배체제 확보 조치에 맞선 고종의 을사늑약 저지 역시 적극적이고 다각적인 것이었으며, 이한응이 제안한 4국 조약은 그 방책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러일전쟁 시기에 을사늑약의 대응조치로써 고종을 중심으로 한 미국과 러시아에 외교적 지원을 요청한 것은 전쟁 재발 방지와 영토 보존, 독립 유지라는 거시적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보호조약과 헤이그 평화회의의 역사적 맥락을 연계하였다는 점, 한·미 공조에서 한·러 공조체제로 전환점에서 헤이그 평화회의에 고종 황제의 특사 파견이 연계된다는 점에서 서영희 교수의 발표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장희 명예교수 사회로 김민규 연구위원, 필자, 미야지마 히로시(高嶋博史) 명예교수, 이근관 교수가 참여한 종합토론은 러일전쟁과 을사늑약을 둘러싸고 행해진 폭력과 불법성, 침략과 약탈로 인한 인권 유린과 자주성의 말살 행위 등이 동아시아와 세계 질서에 위기와 긴장을 초래하였음을 재확인하는 자리였다. 그것은 명치 일본의 제국화와 식민지화 광기에 휘말렸던 동북아시아의 긴장과 위기 상태가 110년이 지난 현재 정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진단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혜안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