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반포로 전국 각처에서 일어난 항일운동인 이른바 '을미의병'은 고종의 권고로 해산하였다. 그러나 1904년 한일의정서 강제 조인과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은 제2차 항일의병이 거병하도록 재촉하였으니, 경북 구미 출신 의병장 왕산 허위(許蔿, 1854~1908)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1907년 정미7조약 강제 체결 후 경기, 강원, 충청, 황해 등지에서 의병들이 항일 투쟁을 재개했고, 이 와중에 대한제국 군대 해산 명령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군인들까지 참여하면서 정미의병 전력이 매우 커진 상태였다. 경기도 연천과 적성 등에서 의병활동을 하던 의병장 허위와 원주의 관동창의대장 이인영은, 힘을 모아 연합 부대를 만든 뒤 서울로 진격하자는 내용을 담은 격문을 전국 각지 의병들에게 발송하였다.
이후 전국에서 경기도 양주로 속속 모여든 의병이 총 48진, 약 1만여 명에 달했다. 양주에 집결한 의병장들은 회의를 통해 13도 창의군(倡義軍)의 총대장으로 이인영, 군사장으로 허위를 선출하였다. 그리고 허위가 이끄는 선발대 3백 명은 1908년 1월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깊숙이 진공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하늘의 도움은 거기까지였을까. 후발 본진의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해 급거 귀향했고, 이미 누설된 서울 진공계획 작전에 만반의 대비를 하던 일제의 공격을 이기지 못한 채,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후 흩어진 의병들은 부대 단위로 독자 항전을 벌였으며, 허위 의병장도 임진강과 한탄강 일대에서 항일전을 이어갔으나 1908년 6월 결국 일제에 체포당했다. 장군은 체포 후에도 항일투쟁이 정당함을 거듭 주장하며 의기를 굽히지 않다가 사형을 언도받고 그해 9월 서대문교도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1962년 정부는 허위 의병장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으며, 종로6가에서 청량리까지의 6차선 도로를 선생의 호를 붙여 '왕산로(旺山路)'라 정하였다. 1990년에는 동아일보사가 3·1운동 유적 보존 운동으로 중랑구 망우동에 '13도 창의군 탑'을 건립하기도 했다.
산천초목이 꽁꽁 얼었을 한겨울에, 전국 각지에서 모인 1만여 의병들. 그들이 무력을 이용한 국권 회복이 실제로 가능하다고 얼마큼 확신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성공 여부와는 관계없이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 꼭 해야만 하는, 아니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그들을 그곳에 서게 했을 것이다. 추운 겨울, 이름 모를 많은 의병들의 희생 앞에 더 머리가 숙여지는 까닭이다.
참고 자료 : 국가보훈처 - 이달의 독립운동가 허위
http://cafe.naver.com/bohunstar.cafe
독립기념관 《서울 독립운동 사적지》 - 13도 의병 서울진공작전지
http://sajeok.i815.or.kr/ebook/ebookh01/book.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