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적으로 명백한 우리 고유 영토입니다.”
이 문장은 대한민국 외교부 홈페이지 내 독도 섹션의 첫머리에 제시되고 있으며, 우리 국민 개개인 모두의 생각과도 동일한 내용이다. 이 문장의 핵심적인 내용은 독도가 지리적으로 일본의 오키섬보다 울릉도에서 더 가깝고, 역사적으로 512년 신라의 우산국 정벌 이래 우리의 영토이며, 이렇게 확립된 우리의 독도 영유권은 국제법적으로 정당한 권리라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우리나라가 독도를 불법적으로 점거하고 있다는 억지 주장을 지속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옛 지도 속에 나타난 독도의 모습을 살펴 일본 주장이 부당한 것임을 재확인하고자 한다.
지리 정보의 증가에 따라 위치가 바르게 수정된 우산도(于山島)
현존하는 우리나라 옛 지도 중 독도가 기재된 가장 오래된 지도는 『신증동국여지승람』(1531년) 내의 「팔도총도(八道總圖)」이다. 이 지도에는 독도의 옛 지명인 ‘우산도’가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기재된 ‘우산과 무릉 두 섬이 현의 정동 쪽 바다 가운데 있다’라는 기사가 지도상으로 반영된 부분이다. 여기에서 우산도는 독도의 옛 명칭이고, 무릉도는 울릉도의 예전 이름이다. 특히 이 기사 다음에는 바로 ‘두 섬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고 하여 명백히 우산도가 독도임을 밝히고 있다.
「팔도총도」 내 우산도(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그런데 일본 정부는 이 지도에 기재된 우산도의 위치 및 크기가 실제와 다르다는 이유로 우산도를 가공의 섬일 뿐 독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근대적 측량 기술이 없던 이 시기에는 가까운 바다가 아닌 멀리 떨어진 섬의 경우 크기나 거리, 방위 등이 왜곡되어 표현된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해상에 울릉도와 독도인 우산도가 명확하게 그려진 점은 우리 선조들이 명확하게 두 섬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일본 정부의 우산도 관련 주장이 틀린 또 다른 이유는 18세기 중반 이후 제작된 지도에 우산도의 위치가 울릉도의 서쪽에서 그 동쪽으로 이동했고, 크기도 울릉도보다 작게 그려졌다는 점 때문이다. 『영조실록』에 기재된 정상기의 「동국대지도(東國大地圖)」에는 명확하게 우산도가 울릉도의 동쪽에 그려졌다.
정상기의 「동국대지도」 내 우산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이러한 위치 이동은 조선과 일본 에도 막부 간 사건인 ‘울릉도쟁계(鬱陵島爭界)’에 기인한다. 안용복이 울릉도와 독도를 거쳐 일본에 다녀온 일로 인해 ‘울릉도쟁계’가 발생했고, 1696년 1월 에도 막부가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하고, 자국민의 울릉도 도해(渡海)를 금지시키는 것으로 이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이 과정에서 ‘우산도’는 일본이 말하는 ‘송도(松島)’라는 점이 밝혀졌고, 이 기록은 『동국문헌비고』(1770년), 『만기요람(萬機要覽)』(1808년) 등 여러 관찬 사료에 기재되었다. 이처럼 조선 전기의 「팔도총도」에 기재된 우산도 관련 내용이 ‘울릉도쟁계’를 통해 사실과 다르다는 점이 파악되었고, 이 점을 명확하게 인식한 우리 선조들이 지도에서 우산도의 위치와 크기를 사실에 가깝게 수정한 것이다.
일본 정부도 인정한 조선의 독도 영유권
‘울릉도쟁계’ 이후에도 막부는 울릉도와 독도가 자신들의 영토가 아닌 까닭에 자국민들의 도해를 금지했고 이 내용은 그들이 만든 여러 지도에 남아있다. 대표적인 지도에는 에도시대 유학자인 나가쿠보 세키스이(長久保赤水)가 1779년에 그린 「개정일본여지로정전도(改正日本輿地路程全圖)」를 들 수 있다. 이 지도에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의 영토 밖에 기재되어 있고, 울릉도와 독도 옆에 『은주시청합기』에 나오는 문구인 ‘고려를 보는 것이 마치 운슈(雲州)에서 온슈(隱州)를 보는 것과 같다’를 기재하고 있다. 울릉도와 독도가 자신들의 영역 밖인 고려(조선)의 영토라는 의미이다.
「개정일본여지로정전도」 내 울릉도와 독도(출처: 동북아역사재단)
독도를 조선 영토로 기재한 중요한 지도에는 태정관지령에 첨부된 「기죽도약도(磯竹島略圖)」(1877)를 들 수 있다. 메이지 유신 이래 근대적 지적(地籍) 편찬 사업을 진행한 일본 내무성은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의 지적에 등록해야 하는지 메이지 정부 최고 기관이었던 태정관에게 서면 질의하였다. 태정관은 이에 1877년 ‘죽도(竹島, 울릉도) 외 1도’가 일본과 관련 없는 땅임을 확인하고 이 내용을 내무성에 지령으로 전달했다. 이 지령에는 「기죽도약도」라는 지도가 포함되어 있는데 울릉도에 해당하는 죽도와 독도에 해당하는 송도가 그려져 있다. 이 점은 명백히 메이지 정부가 독도를 자신의 영토로 인지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태정관지령 첨부지도인 「기죽도약도」 내 울릉도와 독도(출처: 일본국립공문서관)
독도를 우리의 영토로 기재한 서양 고지도
17세기 이래 서양에서는 중국에서 입수한 지도를 바탕으로 다양한 동아시아 지도들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 지도에는 주로 중국이 묘사되었고, 한반도는 매우 간략하게 표현되었으며, 독도는 기재되지 않았다. 서양에서 만들어진 지도 가운데 독도가 기재된 첫 번째 지도는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나타났는데 프랑스인 당빌(Jean Baptiste Bourguignon d’Anville)이 그린 「조선왕국도(Royaume de Corée)」(1735년)이다. 이는 조선만을 단독으로 그린 유럽 최초의 지도이며 한반도의 지리 정보가 상세하게 기재되어 있다. 청나라의 「황여전람도(皇輿展覽圖)」를 바탕으로 제작되었으며 이 때문에 지명은 중국식 발음으로 기재되었다. 즉, 독도인 우산도는 챤찬타오(Tchian-chan-tao), 울릉도는 판링타오(Fan-ling-tao)로 표기했는데 이는 우산도(于山島)를 천산도(千山島)로, 울릉도(鬱陵島)를 범릉도(範陵島)로 잘못 읽은 결과다. 이 표기는 이후 서구에서 제작된 지도에 다수 등장하고 있으며 19세기 중반 한반도의 동해안이 실측되어 이 두 섬이 지도상에서 사라질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당빌의 「조선왕국도」 내 독도와 울릉도(출처: 동북아역사재단)
19세기에는 일본에서 작성한 동북아시아 지도를 번역한 지도가 등장했다. 저명한 독일의 동양학자 겸 언어학자인 클라프로트(Heinrich Julius Klaproth)가 하야시 시헤이(林子平)의 『삼국통람도설(三國通覽圖說)』 「삼국통람여지노정전도(三國通覽輿地路程全圖)」를 번역한 것이 대표 사례이다. 『삼국통람도설』은 하야시 시헤이가 일본의 주변 3국인 조선, 에조(홋카이도), 류큐(오키나와) 등의 풍속에 대해 삽화를 곁들여 해설한 책이다. 이 책에는 지도가 총 다섯 장 삽입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삼국통람여지노정전도」는 「삼국총도(Carte des Trois Royaumes)」(1832년)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여기에 동해 한가운데 큰 섬과 작은 섬을 하나씩 그려 넣고, 큰 섬의 왼쪽 편에 ‘조선령 울릉도(Takenosima à la Corée)’라 써넣었다. 아울러 이 두 섬을 조선에 그려진 색과 동일한 황색으로 표시했다. 다케노시마라 쓰인 큰 섬은 울릉도이고, 그 옆의 작은 섬은 독도이다. 이처럼 서양에서 작성된 지도들에도 독도가 우리 땅으로 기재되었던 것이 다수 확인된다.
클라프로트의 「삼국총도」 내 울릉도와 독도(출처: 미국 하버드대 도서관)
지도가 말하는 진실
한국 고지도에는 독도인 우산도가 16세기 지도에 이미 기재되고 있었고, 18세기 중반의 지도에서는 위치와 크기가 실제와 가깝게 수정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일본 고지도에서는 ‘울릉도쟁계’ 이후 18세기에 작성한 지도에서 독도와 울릉도를 조선 영토로 기재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적인 지적(地積)을 편찬하면서 울릉도와 독도를 자신들의 지적에 포함하지 않았다는 점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서양에서는 이미 18세기 초반에 독도가 포함된 조선 지도가 그려진 점 그리고 19세기에는 일본이 작성한 지도를 번역한 지도 내에 독도가 우리 땅으로 기재된 지도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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