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은 지난 8월 13일 몽골 울란바토르의 몽골과학아카데미에서 2024년도 한몽 공동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했다. ‘역사학과 고고학의 만남: 고·중세 초원 제국을 중심으로 본 동아시아 국제관계’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학술회의에서는 한국·몽골·호주의 역사학자와 고고학자가 만나 그간 동아시아사 서술에서 소외되어 온 몽골 초원의 역사를 재평가하고, 중국 중심적 동아시아사 이해 방식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적 동아시아사 이론 개발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2024년도 한몽 공동 국제학술회의는 체렝도르지 몽골과학아카데미 부원장의 개회사와 박지향 재단 이사장의 환영사로 시작됐다. 박지향 이사장은 환영사에서 최근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역사를 무기화하는 현상을 지적하며, 한국과 몽골이 중국의 자국 중심적 역사관과 역사 왜곡 행위에 공동으로 대응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고대 초원제국 연구
첫 번째 발표를 맡은 김현진 호주 멜버른대학교 교수는 내륙아시아의 유목민들에게 ‘국가’가 없었다는 기존의 통념을 비판하며 유목민이 건설한 스키타이와 흉노제국이 중국 및 유럽 지역과 구별되는 ‘내륙아시아 국가 모델’을 개발했다고 지적했다. 내륙아시아 국가 모델에서 국가 권력의 중심부는 군주와 함께 이동했고 이러한 이동성으로 인해 내륙아시아 유목국가는 비대한 중앙 관료조직을 유지하지 않고도 넓은 영역을 효율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다.
알탄수흐 몽골과학아카데미 연구위원은 두 번째 발표에서 흉노제국의 국가 조직에 대한 흥미로운 학설을 제기했다. 흉노제국의 영토와 국가 조직이 ‘좌익-중앙-우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본 기존 학설과 달리, 알탄수흐 연구위원은 『사기』·『한서』 등의 기록을 면밀히 분석하여 흉노제국이 ‘좌익-중앙-우익’의 삼분 체제가 아닌 ‘좌익-우익’의 양익 체제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결론 내렸다.
세 번째 발표에서 에렉젠 몽골과학아카데미 고고학연구소장은 흉노의 무덤·성곽·공방 유적의 최신 발굴 성과를 소개했다. 먼저 흉노 무덤의 다양한 구조와 부장품은 흉노 사회가 정치·경제적으로 계층화된 사회였음을 보여준다. 제사·농업·수공업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한 것으로 밝혀진 흉노의 성곽 유적은 흉노 사회가 다양한 경제생활을 포괄했음을 알려준다. 아울러 최근 발굴된 토기 가마터와 철기 용광로 유적은 흉노가 토기·철기 등 필수품을 생산할 때 외부에 의존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네 번째 발표에서 심호성 재단 연구위원은 흉노제국이 남과 북으로 분열한 이후의 역사를 흉노의 시각에서 재해석함으로써 지금까지 고대 동아시아 국제관계 서술에서 과소평가되어 온 남흉노의 역할을 재평가했다. 남흉노가 형성된 이후 북흉노는 군사·외교적으로 고립된 끝에 동아시아에서 세력을 잃고 결국 소멸하였는데 이는 후한(後漢)이 아닌 남흉노가 그 정치·군사·외교적 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한 결과였다.
다섯 번째 발표에서 이데르항가이 몽골국립대학교 교수는 2018~2023년에 새로 발견된 선비 무덤 유적의 최신 발굴 성과를 소개했다. 이데르항가이 교수팀은 최근 몽골 북부 셀렝게 아이막 지역에서 168개의 내부 시설을 갖춘 무덤을 발견하고 이들이 선비 귀족의 무덤임을 확정했다. 이러한 발견은 선비인들이 흉노제국 후기에 이미 셀렝게강 유역에서 흉노인들과 함께 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몽 공동 국제학술회의 전경
중세 초원제국 연구
여섯 번째 발표를 맡은 최진열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연구교수는 북위(北魏)의 멸망 과정에 몽골 초원의 유연제국과 중국 북방 변경의 이주영(尒朱榮)이 미친 영향을 재평가했다. 북위 멸망의 원인으로 지적되어 온 육진(六鎭)의 난은 기존 통설과 달리 탁발선비인들의 내부 분화와 갈등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유연에 의해 발생했다 유연에 의해 진압된 사건이었다. 또한 육진의 난보다 북위의 멸망에 더 큰 영향을 준 것은 이주영 정권의 등장이었다.
엥흐투르 몽골과학아카데미 연구위원은 일곱 번째 발표에서 몽골 소재 돌궐제국 시기 유적에 보이는 유연의 문화적 영향을 논하였다. 돌궐 시대의 제사 유적은 해가 뜨는 방향인 남쪽(혹은 동쪽)을 숭배했고 아울러 돌궐 비문에는 불교와 관련된 표현이 다수 보이는데 이는 모두 유연의 문화적 영향이라고 한다.
이기천 경북대학교 교수는 여덟 번째 발표에서 당나라 시대의 책봉 체제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했다. 중국은 군현제를 통한 직접 지배를 관철할 수 없었던 지역에 일종의 간접 통제 방식으로 책봉체제를 도입했다. 따라서 책봉과 조공에 대한 중국의 기록이 중국과 주변국 사이에 실질적인 군신 관계와 예속 관계가 있었음을 증명한다고 볼 수는 없다.
아홉 번째 발표를 맡은 조종성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은 당나라 후기 국제관계에서 번진(藩鎭)이 맡은 역할에 주목했다. 조종성 연구원에 따르면 당나라 후기의 역동적인 국제관계는 당나라와 인접국의 양자 관계가 아닌 ‘당나라 중앙 조정-번진-인접국’이라는 삼자 간의 관계에 주목해야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마지막 발표에서 에르덴볼드 몽골과학아카데미 연구위원은 몽골 소재 거란 시대 성곽 유적에 대해 고찰했다. 지금까지 몽골에서 발견된 거란의 성곽 유적은 통치용 성곽·군사 요새·여름 별장·농경민 주거지·수공업 작업장·제사 유적 등으로 구별할 수 있다. 에르덴볼드 연구위원은 이러한 거란의 성곽이 거란제국의 멸망과 함께 버려졌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1125~1126년경 야율대석과 함께 서방으로 이주하여 중앙아시아에 카라키타이를 건설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한몽 공동 국제학술회의 참석자
몽골 고·중세 유적지 답사
학술회의를 마친 후에는 몽골 고·중세 유적지를 답사했다. 재단 답사팀은 돌궐 제2제국의 창건자인 쿠틀룩 카간 사당 발굴 현장, 카라코룸 박물관, 몽골제국의 첫 번째 수도인 카라코룸의 불교 사원터, 위구르제국의 수도인 카라발가순, 호쇼 차이담 박물관, 하르 보흐 발가스 등을 답사했다. 이번 답사의 중요 성과로는 하르 보흐 발가스에 대한 더욱 정확한 정보를 습득한 것을 들 수 있다. 한국 학계에 위구르제국의 성곽 유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하르 보흐 발가스에는 두 시대의 유적이 공존하고 있다. 먼저 하르 보흐 발가스의 외부를 이루고 있는 토성은 위구르가 아닌 거란제국에 의해 축조된 것이고 내부의 석조 건물군은 17세 초 할하 몽골의 귀족들이 사원과 주거지 등의 용도로 건설한 것이었다.
이번 한·몽 공동 국제학술회의는 한국과 몽골의 역사학자와 고고학자가 만나 몽골 초원의 고·중세사와 중국 중심주의에서 벗어난 대안적 동아시아사 이론을 함께 고민한 뜻깊은 자리였다. 한·몽 양국 학계의 교류·협력·공조가 앞으로 더욱 활성화되길 기원하며 이 글을 마친다.
몽골 고중세 유적지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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