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시중(時中)은 “때에 맞게 행한다”의 뜻으로 쓰였다. 원래는 『중용』에 “군자가 중용을 이룸은 때에 맞게 하기 때문이다[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라는 문장에서 나온 말이다. 이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지만 현대적 관점에서 풀어보면 적당한 때에 적당한 일을 해야 얻고자 하는 결과를 얻고, 그렇지 못하면 때를 잃고 만다는 의미가 오늘날 우리 일상에 비추어 가장 와닿는다. 그러니 요샛말로 하면 시중은 ‘타이밍(Timing)’ 정도에 가깝다.
어떤 일이든지 타이밍이 있다. K드라마, K팝, K푸드, K뷰티에 이어 소설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K문학이 세계적인 반열에 올랐다. K컬처가 높은 파고를 내며 한류를 더욱 매료시키고 있다. 유럽에서 다시 한국학 부흥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면 바로 지금이 ‘굿 타이밍’이다.
유럽 한국학, 마티노 마티니의 Corea에서
샤를르 달레 신부까지
유럽에 한국을 가장 먼저 알린 사람은 예수회 선교사 마티노 마티니(Martino Martini)이다. 청에서 선교활동을 벌인 그는 1655년에 펴낸 『신중국지도(Novus Atlas Sinensis)』에서 조선의 지리를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했다. 여기에는 북경에 볼모로 있던 소현세자와 선교사의 교류에 관한 설명도 있다.
그다음은 우리에게 낯익은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의 표류기이다. 이 책의 원제목은 ‘스페르베르호의 불운한 항해 일지’이다. 책에는 조선의 지리, 풍토, 산물 등에 관한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에 관한 묘사는 그다지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책은 1668년 네덜란드에서 출판된 이후 1670년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간행되는 등 꽤 인기리에 읽혔고, 유럽인들은 이로부터 조선에 관심을 두게 됐다.
이후 조선에 관한 정보는 가톨릭 신부들에 의해 유럽으로 전달됐다. 1836년부터 조선에 입국한 신부들은 조선 국내 여러 정황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본국으로 보냈다. 이들 가운데 샤를르 달레(Charles Dallet: 1829~1878) 신부가 프랑스어로 『한국천주교회사(Histoire de l’Eglise de Corée)』(1874)를 펴냈다. 이 책에는 한국의 교회사뿐만 아니라 역사·지리·정치·경제·사회 문화 전반이 소개되어 있어서 『하멜 표류기』 이후 200여 년 만에 서양에서 출판된 한국에 관한 책이 되었다. 그러니 유럽에 한국 관련 전문서적이 출판되어 한국사가 알려진 것은 올해로 딱 150년이 되는 셈이다.
유럽의 한국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나라는 러시아다. 지금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 중이라 한러 관계가 소원해졌지만 러시아의 한국학사는 17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오래다. 17세기 러시아는 중국과 인접한 여러 나라의 역사, 지리, 정치 등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기록하였는데, 조선에 관한 내용도 상당했다. 러시아는 대청(對淸) 외교관을 통해 조선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였다. 조선과 러시아 사신이 북경에서 만나 교환했던 필담 관련 보고서가 1824년에 발표되기도 했다. 1850년대에는 조선을 여행한 기행문이 나오기도 했다.
출처: 1880년 간행된 한불사전 초판과 노한사전(출처: (좌)공공누리, (우)한국학중앙연구원)
본궤도에 오른 유럽 한국학
학생 수의 급증과 연구 분야의 확대
1920년대 말부터 유럽 각국의 대학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학 강좌가 개설되었다. 1928~1931년 프랑스 리옹대학과 핀란드 헬싱키대학에서 한국사 강좌가 처음으로 개설되었다. 1940년대 독일 뮌헨대학, 네덜란드 라이덴대학, 러시아의 모스크바대학과 레닌그라드대학, 1950년대 영국 런던대학(SOAS), 프랑스 파리대학, 독일 훔볼트대학, 핀란드 스톡홀름대학, 스웨덴 웁살라대학, 1960년대 독일 베를린자유대학·보쿰대학,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1970년대 영국 셰필드대학, 1980년대 프랑스 파리3대학, 벨기에 뢰번카톨릭대학, 1990년대 이탈리아 나폴리대학 등에서 한국학과 또는 한국학센터가 신설되거나 한국학 강좌가 개설되었다. 유럽한국학회 AKSE(Association for Korean Studies in Europe)와 같이 한국학 관련 학회나 연구 단체 등은 워낙 잘 알려져 있으니 따로 열거할 필요는 없겠다. 이들 학교와 학회를 중심으로 다양한 영역으로의 양적 확대와 함께 질적인 심화 연구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특히 유럽에서 열리는 한국학 학술회의에는 종종 북한학자들도 참여하기 때문에 남북의 역사문화적 관점을 비교하는 데에도 좋은 무대가 되어 왔다.
대학에서 한국학을 공부하겠다는 학생 수도 중국과 일본을 추월했다. 1980년대 10여 명 안팎이던 주요 대학의 한국학 수강생 수가 최근에는 각 대학에서 200여 명으로 증가했다. 2018년 영국 런던대학교의 SOAS(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의 경우 한국학 신입생 수가 중국학 신입생 수를 추월했고, 2020년에는 일본학과의 신입생 수를 추월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학부 위주의 교육에서 대학원 학위과정으로 승격되어 한국학 관련 석·박사 학위자들을 배출하고 있다. 한국사 분야에는 조선시대와 근현대사 전공자가 있어 대학에서의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한국학의 폭발적 확장’이라고 보기엔 이르다. 한국학 전공 개설 대학의 수도 중국학이나 일본학만큼 많지 않고 가르치는 교수진도 제한적이다. 한국 고대사와 고고학 전공자가 한두 명 증가한 데에 그치고 있는 점도 아쉽다. 중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동양학에서 ‘서브 학문(Subsidiary Subject: 타 학문들에 녹아있고 전면에 드러나지 못한 단계)’의 성격이 여전히 상존하는 것이 현재 유럽 한국학의 현실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양적 팽창에서 질적 전환을 이루어야 한다.
유럽의 한국학 부흥을 위한 재단의 노력
베를린자유대학에서 국제학술회의 개최
재단은 지난 11월 14일과 15일 양일간 한국사를 전론으로 다룬 국제학술회의 “경계 너머의 한국: 한국과 유럽 학계의 역사적 관점들”을 베를린자유대학에서 개최하였다. 학술회의는 1부 고고·미술 분야, 2부 문헌·역사학 분야, 3부 유럽의 한국학 연구 활성화를 위한 토론회로 진행되었다. 발표에는 유럽 학계에서 오랫동안 머물며 후학을 양성하고 한국학 토대를 세운 저명학자가 ‘초문화적, 초지역적 관점에서 본 세계미술사 속의 한국 유물(Jeong-he Lee-Kalisch, 베를린자유대 미술사학과)’과 ‘유럽의 한국학 현황과 과제(이은정, 베를린자유대 한국학과)’를 주제로 강연하였다.
각 세션 발표에는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헝가리 등 유럽 여러 대학의 신진연구자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분명 미래 유럽의 한국학을 이끌 우리의 귀한 학술 파트너들이다. 참가자들은 전근대 한국이 한반도와 동북아시아를 넘어서는 광역적이고 광폭적인 상호작용에 관한 연구 성과를 발표하고 토론하였다. 유럽의 한국학 연구 활성화를 위한 토론에서는 “유럽의 한국학에 대한 관심이 다른 지역에 비해 높고 적극적이다”라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또한 “K팝, K푸드 등 현대문화 위주의 제한된 관심을 학술적인 것으로 확장할 모멘텀이 조성되었다”고 현대 유럽의 한류를 평가했다. 그러나 유럽은 ‘한국에 대한 관심의 측면에서 척박한 땅’이라는 데에도 동의했다. 한국학이 하나의 지역 연구로 자리 잡기 위해서 할 일도 제시했다. AKSE와는 차별화된 한국학 연구모임의 조직이다. 이 모임은 한국에 관심 있는 유럽의 젊은 연구자와 일반 대중이 한국과 소통하는 플랫폼이 될 것이다.
해외에서 체감하는 한류
한국인이니까 기념사진 ‘찰칵’
최근에 해외를 다녀온 사람은 한국문화 콘텐츠에 관한 인기를 실감하는 기분 좋은 경험을 한 번쯤은 했을 것이다. 유럽뿐만 아니라 그야말로 전세계적인 인기다. 필자도 지난 8월 여름 휴가차 실크로드를 따라 신장 위구르 지역을 다녀왔다. 점심을 먹기 위해 어느 식당에 들어갔는데 직원들이 한국 사람이냐며 기념사진을 찍자고 야단이었다. 처음에는 한두 사람이 그러더니 온 직원이 다 모였다. 활짝 웃으며 “한국 너무 좋아해요” 하는 모습에서 한류는 국내에서 체험하는 것보다 훨씬 더 높게 파동치고 있음을 느꼈다. 단지 한국인이라서 기념사진을 찍자고!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코리아’라고 하면 대부분 아프리카 어느 한 귀퉁이쯤에 있는 나라로 여겼다는 모 교수의 말이 떠오른다.
한류는 한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님은 두말할 나위 없다. 여러 분야에서 많은 사람들이 노력한 결과이며, 외부에 대한 탄력적이고 개방적인 한국인이 가진 본성의 결과물이다. 이 파도를 타고 계속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해외 각 분야의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을 지속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면 바로 ‘지금’이다. 재단도 한류의 파고 한끝을 떠받칠 채비를 하고 있다. 한국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이 다양한 학문 분야로 전화(轉化)되고 이것이 K학문의 파고를 타게 되면 우리 역사에 대한 인식 강화로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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