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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노둣돌, 역사대화
기고 평화의 노둣돌, 역사대화 세밑인 지난 12월 14일, 아베가 이끄는 자민당이 중의원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그날 10년 넘는 세월 동안 동아시아 역사대화를 이끈 한중일 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아베 정부의 우향우 질주를 우려하며 동아시아 역사대화의 족적을 되짚고 앞으로 나갈 길이 무엇인지 서로 생각을 나눴다. 지난 역사대화의 궤적을 돌아보며 어느 때보다 깊은 허탈감에 빠진 것은 동아시아에서 갈등의 파고가 날로 높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아시아는 20세기 유산인 침략과 식민, 냉전으로 점철한 과거사를 극복하지 못한 채 아직도 역사전쟁 중이다.일본의 역사세탁을 강도높게 비판하는 미국 여론최근엔 동아시아 역사전쟁에 미국이 가세하여 일본 정부를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뉴욕타임즈는 “일본의 우익 정치세력들은 아베 신조 내각에 고무되어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수치스러운 역사, 즉 일본군이 수천 명의 여성들을 전시 위안소에서 일하도록 강제동원한 역사를 부인하기 위한 협박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고 일갈하며 이를 역사세탁이라 정의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저지른 잔학 행위를 지우려 필사적으로 노력하는데 이런 역사 왜곡을 계속한다면 다른 나라들이 일본을 외면할 가능성이 있음을 경고했다. 얼마 전에는 미국 역사학자들이 직접 나서 아베 정부의 미국 역사 교과서 수정 시도를 비판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일본군‘위안부’를 강제 동원한 명백한 진실을 정치적 목적으로 부정하며 역사를 검열할 권리는 아무한테도 없다고 주장했다. 미국 정부 역시 학문의 자유를 근거로 이 성명을 지지했다. 하지만, 미국이 나섰다고 일본 정부가 도발을 멈출 것 같진 않다. 무라야마 담화 수정을 시도할지 모른다는 의혹이 기우로 끝나기만 바랄 뿐이다.중국의 맞대응도 지켜볼 일이다. 일본의 역사세탁에 중국은 공세적이고 강경하게 대응하고 있다. 일본군‘위안부’ 관련 문서를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해 달라고 신청해 놓은 상태다. 난징대학살과 관련해서는 14개 국가에서 사료 7천여 건을 수집하고,
글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교수·재단 자문위원)
"〈동북아역사재단뉴스〉는 국민과 재단을 이어주는 다리"
보고서 "〈동북아역사재단뉴스〉는 국민과 재단을 이어주는 다리" 동북아역사재단 소식지〈동북아역사재단뉴스〉가 지령 100호를 맞았다. 지령 100호 특집으로 김민규 홍보교육실장이 김학준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을 인터뷰하였다. 김학준 이사장은 지령 100호를 자축하면서 〈동북아역사재단뉴스〉의 편집 방향은 물론 광복 70주년과 한일협정 50년인 올해 영토와 역사 현안에 관한 국내외 정세와 전망, 앞으로 재단이 해야 할 일을 소개하는 한편 독자들에게 감사를 전했다. 인터뷰 전문을 정리하여 게재한다_. 편집자 주김민규 지금까지 소식지를 읽으면서 특별히 인상에 남은 기사나 코너는 무엇인가요?김학준 우선 100호가 나오기까지 힘써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지령 100호라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우리 임직원들이 적극 도와주셨고 또 밖에서 재단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분들이 계셨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모든 분들에게 고맙다는 말씀 전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더 좋은 지면을 만들어서 일반 국민들도 받아보고 싶어 하는 〈동북아역사재단뉴스〉가 되도록 함께 노력하고자 합니다.김민규 지금까지 소식지를 읽으면서 특별히 인상에 남은 기사나 코너는 무엇인가요?김학준 아무래도 재단과 관련해 새로운 자료들을 발굴하거나, 재단이 다루는 주제와 관련 있는 논문을 발표한 소식, 관련 서적 발간 소식을 기쁜 마음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 재단을 방문하는 외빈들이 적지 않은데, 그분들에 관한 소개도 놓치지 않고 다시 읽습니다.김민규 전에 재직하셨던 언론사들과 규모나 형식에서 비교할 수 없지만 주요 신문과 재단 소식지는 홍보매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재단을 대표하는 매체로서 〈동북아역사재단뉴스〉가 유념할 점은 무엇일까요?김학준 일반 신문도 그렇지만, 모든 매체에서 다루는 내용은 정확해야 합니다. 부정확한 정보나 기사는 독자들을 오도하는 것이죠. 소식지는 재단의 기록으로 남는 것이므로 정확성에 더욱 철저를 기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김민규 신년사에서 국민과 소통하는 재단, 2015년을 국민에게 다가가는 해로 만들겠다고 하셨습니다. 재단이 그동안 소통
인터뷰·김민규 (홍보교육실장) 진행·디자인집
숫자로 보는〈동북아역사재단뉴스〉 100호 이야기
보고서 숫자로 보는〈동북아역사재단뉴스〉 100호 이야기 2006년 11월 첫 발을 내딛은 가 지령 100호를 맞았다. 100일, 100점, 100%에서 알 수 있듯, 우리에게 ‘100’이라는 숫자가 주는 의미는 가볍지 않다. 8년 4개월 동안 매월 꾸준히 독자와 만남을 가져온 뉴스레터 또한 이제 한 단락을 짓고 더욱 새로운 모습으로 한 단계 더 성숙해야 할 때다. 가 그간 걸어 온 길을 ‘숫자’로 되짚어 본다. _ 편집자 주나무가 껍질을 벗고 새싹을 틔우며 냇물이 어제보다 깊고 넓은 물길을 열어가듯, 도 더 나은 소식지가 되기 위해 여러 차례 옷을 갈아입었다. 우선 형태는 2006년~2008년까지 무선 제본 형식을 취하다가 2009년 2월부터 중철 제본 형식으로 변경·발행되고 있으며, 책의 얼굴인 표지도 재단의 학술적 이미지를 살려 고대 벽화, 역사 유물, 우리 영토 사진 등을 주제로 장식해 재단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데 주력했다. 겉모습뿐 아니라 내용 또한 초기 재단 소식과 사업·발간자료 소개 중심에서 인터뷰 (‘역사로 미래로’)와 인물 소개 (‘동아시아 역사인물’), 지식 전달 (‘역사 Q&A’) 등 다양하고 깊이 있는 내용을 더하고 있다.처음 20쪽 분량, 700권으로 발간하기 시작한 뉴스레터. 2011년 1월호부터는 24쪽으로 지면을 늘리고, 한때 1,200부까지 발간되다가 현재 매월 1,000부를 발간하고 있다. 100호까지 발간된 지면을 모두 합치면 총 2,324쪽에 이른다. 그동안 발간된 책 106,300권을 쌓으면 약 150m에 이르니 어지간한 초고층 빌딩 높이를 훌쩍 뛰어 넘는 높이다.는 재단의 소식과 관련 세미나, 발간 자료와 연구 등을 주요 내용으로 담다 보니 아무래도 외부 필자 보다 내부 필자들의 원고가 많다. 하지만 바쁜 업무에 쫓기는 직원들에게 뉴스레터 원고 청탁이 늘 반가운 과제는 아니었을 터. 그럼에도 언제나 싫은 내색 없이 기꺼이 청탁에 응해준 많은 필자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재단 장세윤 연구위원은 무려 열 아홉 차례나기고한 단골 필자다. 역사 에세이, 역사 Q&A, 동아시아 역사인물
박물관을 통해 본 동아시아 역사교육과 민족주의
재단 새 책 박물관을 통해 본 동아시아 역사교육과 민족주의 ▲ 김정현·김지훈·신규환·하세봉 지음│2014박물관·기념관은 대중이 역사를 집단기억하고 재구성하는 데 이바지하는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은 1990년대 이후 민족주의·애국주의·사회주의적 가치를 고양하기 위한 정치이데올로기 수단으로 박물관과 기념관을 활용하고 있고, 일본의 박물관은 과거 침략 역사를 정당화하고 미화하고 있다.《기억의 정치공간》은 중국과 일본의 박물관이 국가정체성과 민족주의 확대에 역사기억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박물관을 통한 “기억의 정치공간”이 동아시아에서 이뤄지는 역사교육과 민족주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기 위해 기획되었다. 먼저 중국과 일본의 박물관과 기념관에서 역사지식을 어떻게 유통·소비하면서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를 자극하는지 그 과정을 밝힐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현재 중국과 일본에는 ‘기억과 기념의 전쟁’이라고 불릴 정도로 여러 전쟁 관련 기념관·박물관이 세워지고 있다. 이 기획연구는 그중에서 아래 5개 박물관의 전시를 분석하였다.역사지식의 유통과 소비 경로첫 번째는 중국 국가박물관의 중국 근대사 전시물을 분석하였다. 2011년 중국국가박물관이 개관하면서 상설전시관 ‘부흥의 길’은 근대 중국이 서구 열강의 침략에 ‘중화민족’이 저항하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였고, 중국공산당이 영도하여 현대 중국이 ‘위대한 부흥’을 이루었음을 보여준다. 이 곳은 외세 침략에 대한 민중의 자발적 저항을 중요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중국 역사교과서 서술과 공통성이 있으나, 종래 혁명사와는 다르게 근대 중국의 ‘부흥’에 관한 지식인들의 모색을 강조하고 있다.▲ 난징대학살기념관(평화의 여신 조각상)두 번째는 난징학살기념관의 건립과 애국주의·평화교육이다. 난징대학살은 일본군이 1937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6주 동안 난징에서 중국인을 잔인하게 유린한 사건이다. 1982년 일본의 교과서 파동을 계기로 난징시는 1983년부터 ‘피로 얼룩진 역사를 영원히 난징의 대지에 새겨두자’는 취지로 기념관을 건설하여 항일전쟁 승리 40주년인 1985년 8월 15일 개
글 김정현 (홍보교육실 연구위원)
정도전의 꿈, 민본국가와 요동회복
역사인물 정도전의 꿈, 민본국가와 요동회복 옷차림은 남루하기 짝이 없고 몰골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한 사내가 철령 고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세파에 찌든 탓인지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마른 잎처럼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걸음은 당차고 눈빛은 형형했다. 사내는 세상을 뒤집어 엎겠다는 일념뿐. 그 뜻을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누군가를 찾아가는 길이었다.때는 1383년(우왕 9년) 가을 어느 날. 사내의 이름은 정도전(1342~1398). 공민왕의 죽음에 의혹을 제기하고, 권신 이인임에게 맞섰다가 10년 가까이 유배와 유랑을 거듭하고 있는 터였다. 그 10년 동안 정도전은 고려의 망국을 무섭도록 예감하며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도탄에 허덕이며 비참하게 죽어가는 백성들을 구해야만 했다.정도전이 찾아가는 사람은 함흥의 무장 이성계. 이제 그와 뜻이 맞는다면 어그러진 천하를 바로 잡을 것이요, 그가 허명이나 날리는 무장이라면 미련 없이 돌아설 작정이었다.그런 정도전을 마주한 순간, 이성계는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예사롭지 않은 운명이 성큼 다가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만났고, 정도전의 혁명은 시작되었다.훗날 태조 이성계가 개국공신들에게 연회를 베푸는 자리에서 정도전에게 술잔을 건네며 말하였다. “경이 아니고서야 내가 어찌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겠소. 참으로 경은 나의 장자방(張子房:장량)이오!” 그러자 도전은 술잔을 받든 채 아뢰었다. “하오나 전하, 한나라 고조(高祖:유방)가 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고조를 쓴 것이 다를 뿐이옵니다!”혁명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곧 이성계를 택하여 썼음을 감히 말하였으나 틀렸다고 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통치의 정당성은 바로 민심정도전의 혁명은 모두 ‘민본’에 바탕을 두었다. 군주보다는 나라를, 나라보다는 민을 우위에 뒀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자, 곧 군주의 하늘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헌법 전문이라 할 《조선경국전》의 〈정보위(正寶位)〉에서 정도전은 “임금의 위(位)가 높고 귀하지만 천하는 지극히 넓고 만민은 지극히 많다. 만약 그들의 마음을 얻
글 임종일 (장편 역사소설 《정도전》 작가)
한국어를 열심히 배우는 중국 사람들
기고 한국어를 열심히 배우는 중국 사람들 ▲ 옌볜에 있는 한 서점 조선어문고 진열대▲ 문고 진열대아편전쟁과 청일전쟁에서 패배하여 처절하게 무너진 뒤에 절치부심하여 다시 강대국 반열에 오른 중국에서도 외국어 교육을 중시하고 있다. 중국 대륙에서 한때 제1외국어였던 러시아어나 현재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영어는 물론 프랑스어와 독일어, 일본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아랍어 같은 경우 이미 여러 대학교에서 단과대학 체제 아래 교육을 하고 있다. 한국어 교육은 아직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에 있는 옌볜대학교에서만 단과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으나 여러 대학교의 한국어학과 규모가 날로 커지고 있는 중이다.중국 교육부 통계에 따르면 현재 중국 대륙에는 2천 개가 넘는 대학교가 있다고 한다. 그중에서 명문 베이징대학교를 비롯한 100여 개 대학교에 한국어과가 설치되어 있다. 2년제까지 포함하면 약 5백 군데에 이른다고 하니 어림잡아도 해마다 한국어 전공자 몇 천 명이 새로 생기는 셈이다.한반도와 중국의 빈번했던 교류에서 더 많이 쓰인 말은 중국어였다.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위해 우리 쪽에서는 고려 시대에 이미 세계 최초 외국어 회화 교재로 일컬어지는 《노걸대(老乞大)》를 엮은 바 있고, 그 뒤로도 중국어 학습 교재를 여러 종 발간했다. 학자들은 사서삼경을 비롯한 수많은 중국 서적을 암송했고, 중국어 운율을 꿰고 나서야 지을 수 있는 한시도 무척 많이 남겼다. 그런데 우리 쪽보다 덜하기는 했겠지만 중국 사람들도 오래전부터 한국어를 익혀왔다. 특히 명나라 초기에 편찬한 《화이역어(華夷譯語) 조선관역어(朝鮮館譯語)》라는 사전은 고대 중국에서 관 주도로 한국어 교육을 실시했음을 보여주고 있다.김준엽 선생이 시작한 중국의 현대식 한국어 교육현대에 들어와서 중국의 대학 과정에 우리말 교육이 처음 실시된 것은 1946년의 일이다. 중국의 임시 수도 충칭(重慶)에 있다가 환도 후 난징(南京)으로 옮겨 갔던 국립동방어문전문대학에 한국어과가 설치된 것이 현대 중국의 대학 한국어 교육의 효시다. 초기 이 학과의
글 신경란 (번역가)
나눔의 집, 영문 동화책 TOUCH ME NOTS 출간
시민사회 나눔의 집, 영문 동화책 TOUCH ME NOTS 출간 일본이 패망한 지 7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일본군‘위안부’피해자들은 일본의 공식 사죄와 법적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나눔의 집’은 올바른 역사를 정립하고, 피해자들의 인권을 회복하기 위해, 2015년에도 국내외에서 다양한 사업을 전개한다. 그 첫 번째 사업으로는 강제동원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로 끌려간 조선 여인들의 이야기를 그린 역사 동화책 윤정모 작가의《봉선화가 필 무렵》을 번역하였다.이 책은 어둠의 침묵을 깨고 당당히 대중 앞에 선 피해자 할머니들의 용기를, 따뜻한 가슴으로 안아줄 수 있는 어린이가 단 한 명이라도 있길 바라며 기획했다. 또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주는지,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일깨워 주고자 했다. 책은 '나눔의 집'에 계시는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이 직접 그린 그림 이야기여서 역사적 의미와 가치가 매우 크다. 조금 미숙하지만 순수한 붓놀림으로 그린 그림들을 보며 우리는 아직, 다 풀지 못한 역사적 과오를 되새기며, 억울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피해자들의 간절한 바람을 만나볼 수 있다.할머니들의 그림이 들려주는 이야기책에는 ‘나눔의 집’ 부설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에 전시되어 있는 200점 중 14점이 실려 있다. 고 김순덕 할머니가 직접 그린 6점(‘씨앗공출’, ‘끌려감’, ‘처량한 봉숭아야! 때가 되면 다시 핀다’, ‘끌려가는 배안’, ‘그때 그곳에서’, '못다 핀 꽃')과 김복동 할머니가 그린 2점('고향집', '끌려가는 날'), 고 강덕경 할머니가 그린 5점('라바울 위안소', '빼앗긴 순정', '마쓰시로 위안소', '배를 따는 일본군', '우리 앞에 사죄하라')과 강일출 할머니의 그림 1점('태워지는 처녀들')이다.‘나눔의 집’ 그림수업은 처음 할머니들을 위한 프로그램의 하나로 시작되었으나 수업이 진행되면서 50여 년 동안 가슴을 짓눌렀던 피해의식과 분노를 풀어내는 마음치료제가 되었다. 그림은 피해자들의 어린 시절 순수했던 고향의 기억(순수), 전쟁 후 귀국했으나 과거의 기
글 안신권 (‘나눔의 집’ 소장)
서대문구 영천동 독립관 터
현장보고 서대문구 영천동 독립관 터 서대문구 영천동 독립관 터가 과거 역사의 현장이었던 장소를 찾아 의미를 되새겨 보는 ‘유적 탐방’ 코너를 마련하였습니다. 특별히 2015년에는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항일 독립운동의 역사적 장소를 찾아 소개하고자 합니다. _ 편집자 주▲ 과거 독립관이 있던 자리였음을 알려    주는 표지석.서대문 교차로를 지나 인왕산 방면으로 걸음을 옮기면 독립문 사거리를 지나기 전 왼편으로 영천시장이 보이고, 그 앞 우리은행 도로에 놓인 작은 표지석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독립관터’로 명명된 이곳은 1896년 서재필 등에 의해 설립된 독립협회가 사무실 겸 집회장소로 사용했던 곳이다.독립관은 원래 영은문(迎恩門)을 지나 조선에 들어온 중국의 사신들을 영접하던 모화관(慕華館)을 개보수한 곳이다. ‘영은(迎恩, 은혜를 맞이함)’이나 ‘모화(慕華, 중국을 사모함)’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청일전쟁 이전까지 중국을 상대로 한 사대외교가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하는 상징적 건물 중 하나다.청일전쟁에서 패한 중국이 주춤하는 사이 조선땅에서 세대결을 벌이기 시작한 열강은 러시아와 일본이었다. 당시 개화파에 속했던 서재필을 중심으로 이상재, 이승만을 비롯해 정부 관료였던 이완용(후에 탈퇴) 등은 서구 문물을 적극 수용해 나라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 해 1896년 7월 독립협회를 결성 하기에 이르렀다.독립협회는 영은문(지금은 기둥을 받치던 주춧돌만 남아 독립문 옆에 세워 두었다)을 헐고 독립문을 세움과 동시에, 모화관을 고쳐 지은 뒤 ‘독립관(獨立館)’이라는 순종의 친필 현판을 내걸었다.▲ 영은문 주초 뒤에 세워진 독립문. 좌측 멀리 서재필 선생의 동상도 보인다.▲ 독립문 기공식 광경.▲ 설립 당시의 독립관과 독립문 모습.독립관은 1897년 5월 현판식을 거행하고, 11월 완공하면서 본격적으로 시국 강연과 토론회 장소가 되었다. 독립협회는 1896년 4월부터 발간하기 시작한 〈독립신문〉과 더불어 독립관을 이용해 애국 계몽과 민족 자강을 역설하고, 지식인들이 모여 의견을 교류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