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차림은 남루하기 짝이 없고 몰골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한 사내가 철령 고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세파에 찌든 탓인지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마른 잎처럼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걸음은 당차고 눈빛은 형형했다. 사내는 세상을 뒤집어 엎겠다는 일념뿐. 그 뜻을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누군가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때는 1383년(우왕 9년) 가을 어느 날. 사내의 이름은 정도전(1342~1398). 공민왕의 죽음에 의혹을 제기하고, 권신 이인임에게 맞섰다가 10년 가까이 유배와 유랑을 거듭하고 있는 터였다. 그 10년 동안 정도전은 고려의 망국을 무섭도록 예감하며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도탄에 허덕이며 비참하게 죽어가는 백성들을 구해야만 했다.
정도전이 찾아가는 사람은 함흥의 무장 이성계. 이제 그와 뜻이 맞는다면 어그러진 천하를 바로 잡을 것이요, 그가 허명이나 날리는 무장이라면 미련 없이 돌아설 작정이었다.
그런 정도전을 마주한 순간, 이성계는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예사롭지 않은 운명이 성큼 다가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만났고, 정도전의 혁명은 시작되었다.
훗날 태조 이성계가 개국공신들에게 연회를 베푸는 자리에서 정도전에게 술잔을 건네며 말하였다. "경이 아니고서야 내가 어찌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겠소. 참으로 경은 나의 장자방(張子房:장량)이오!" 그러자 도전은 술잔을 받든 채 아뢰었다. "하오나 전하, 한나라 고조(高祖:유방)가 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고조를 쓴 것이 다를 뿐이옵니다!"
혁명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곧 이성계를 택하여 썼음을 감히 말하였으나 틀렸다고 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통치의 정당성은 바로 민심
정도전의 혁명은 모두 '민본'에 바탕을 두었다. 군주보다는 나라를, 나라보다는 민을 우위에 뒀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자, 곧 군주의 하늘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헌법 전문이라 할 《조선경국전》의 〈정보위(正寶位)〉에서 정도전은 "임금의 위(位)가 높고 귀하지만 천하는 지극히 넓고 만민은 지극히 많다. 만약 그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크게 염려할 일이 생긴다"고 못 박았다. 왕위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왕위가 그러한데 정치와 사회제도는 더 말할 나위 없이 민본이었다.
민본정치의 요체는 '작개언로'다. 언로를 활짝 여는 것이다. 정도전은 《경제문감(經濟文鑑)》에서 언로와 간관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하면서, 굳이 간관이 아니더라도 백관은 물론 백성이라면 누구라도 정치를 기탄없이 비판하고 시사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적시하였다. 통치의 정당성을 바로 민심에 두었다는 말이다.
이렇듯 조선 건국의 시작과 끝은 오로지 정도전에게서 비롯하였다. 수도를 정하고 건설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그가 이루어낸 일들과 방대한 저술과 법제들을 보면 참으로 '세상 사람이 아니거나 세상이 없어져도 홀로 남겨진 사람 같았으니 가히 초인'이었다.
끝내 회복하고 싶었던 요동
정도전이 조선 건국을 주도한 것도 천하 만민을 위함이었지, 한 왕조를 위함이 아니었다. 또 그의 삶은 당대에 머물지 않고 천년 앞을 내다보았다. 그는 시에서 이렇게 심정을 토로한다.
"뉘라서 천년이 멀다 말하는가. 불후의 업을 남기어 천년이 지난 하늘에도 영렬(英烈)이 비끼었구나!"
그가 말한 천년대계란 고구려의 고토(故土) 회복. 요동을 다시 차지하여 삼한 이래의 염원을 이루고자 했다. 정도전은 특히 고려 태조 왕건에 대해 "여러 번 서도(西都:평양)에 행행하고 친히 북쪽 국경을 순행했으니, 그의 뜻이 대개 고구려 동명왕때의 옛 강토를 회복하고야 말리라는, 실로 '그 규모가 크고 원대한 책략(宏規遠略)'이었다."라며 찬사를 하였다. 1393년(태조2)에 정도전은 명나라 사신을 자청한다. 걸핏하면 조선을 침략하겠노라 엄포를 놓고 까탈을 부리던 주원장을 직접 만나 정세를 살피려는 것이었다. 이때 정도전은 명나라 황실의 내분, 여진족과 원나라의 유장세력의 분포, 북방의 신흥강국 타타르 등 당시 동북아 정세를 면밀하고 명확하게 파악하였다.
귀국 후 정도전은 태조의 적극 지원 아래 요동회복을 구체화시켜나갔다. 갖가지 병법서를 짓는 한편 동북면 도안무사가 되어 함경도를 경략하여 군사적 요충지로 삼고, 여진족을 적극 회유하여 복속시켰다. 1394(태조3년)부터는 병권까지 장악하여 요동회복을 꾸준하게 추진하였다.
이를 알아챈 명나라 주원장은 정도전을 '화의 근원'이라며 끊임없이 압송을 요구하였다. 또 대국을 침범할 수 없다는 대신들의 거센 반대도 있었다. 정도전은 그러나 중국의 정세와 고금의 예를 들어가며 요동회복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외이(外夷)였던 요·금·원나라가 중원의 주인 노릇을 한 뒤로 화이(華夷)의 경계는 이미 무너진 지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졸이 이미 훈련되었고, 군량도 이미 갖추어졌으니 동명왕의 옛 강토를 회복할 만합니다!"
이윽고 태조 7년(1398), 가을을 앞두고 진도훈련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나 명나라와 구세력을 등에 업은 이방원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함으로써 요동회복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아무리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태조와 정도전이 이때 요동으로 진출하였다면 승산은 충분했다. 왕자의 난 이후로 명나라의 내란과 급변했던 주변 정세가 이를 충분히 말해주고 있다. 더욱이 훗날 건주여진의 추장 누르하치가 청나라를 세우고, 중원을 삼킨 뒤에 조선에 치욕을 안긴 것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오늘날 중국의 '동북공정'도 아예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