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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7월호 뉴스레터
COVER STORY 살아서 누린 영화 내세에도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살아서 누린 영화 내세에도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표지 그림 : 덕흥리 고분벽화의 우차와 시녀평안남도 덕흥리 고분벽화의 널방 북벽에 그려진 우차(牛車)와 시녀의 모습이다. 널방 북벽에는 묘주부부의 초상이 그려져 있는데, 부인의 초상은 비어 있다. 벽화 제작 당시 부인이 살아있었기 때문에 그리지 못한 것이라 추측한다. 묘주의 초상 왼편에는 시종들과 묘주가 타고 나갈 말이 그려져 있고, 부인이 그려질 자리 오른편으로는 부인의 시중을 들 시녀와 우차가 그려져 있다.장막 오른편에 있는 시녀는 총 아홉 명인데 위, 아래 여덟 명 중 위쪽 두 명만 올림머리를 한 기혼 여성으로, 색동 주름치마를 입고 있다. 나머지 일곱 명은 머리를 양 갈래로 길게 늘어뜨려 묶었으며, 폭이 좁은 흰색 주름치마를 입어 아직 혼례를 치르지 않은 젊은 처자들임을 알 수 있다.가운데 우차에는 앞쪽으로 소의 고삐를 쥐고 가는 어린 총각 시종 두 명이 있고, 큰 눈과 날카로운 뿔을 가진 황소가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우차는 고대 귀족 여성들의 교통수단이었는데, 덕흥리 고분벽화 속 우차는 특별히 수레 앞뒤로 차양이 쳐져 있으며 형태가 약간 굽은 곡산개(曲傘蓋)가 소 있는 곳까지 길게 덮여 있다.많은 시종과 다양한 재산을 무덤에 그려 넣으며 살아 있을 때 누린 부와 명예가 내세까지 계속 이어지기를 바랐던 욕망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참고자료 : 동북아역사넷
거꾸로 가는 한•일의 역사 시계
기고 거꾸로 가는 한•일의 역사 시계 21세기 초 한·일 두 나라가 2005년을 새 시대, 새 천년을 시작하는 원년으로 삼자고 선언한 지 10년이나 지났건만 두 나라 관계는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두 나라는 2002년 월드컵을 공동 개최한 후 2005년을 ‘한·일 우정의 해’로 잡을 정도로 열의를 보였다. 그러나 그해 초 일본 시마네현(島根縣)에서 이른바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했고, 문부과학성에서는 극우파 역사교과서를 원안대로 검정 통과시켰다. 그 결과 ‘우정의 해’는 그야말로 빛 좋은 개살구가 되어버렸다.10년이 지난 올해는 한·일 수교 50년이 되는 해다. 양국 정상이 취임한 지 3년이 되어가고 있지만 정상회담 가능성은 아직 불투명하다. 하루 1만 명 이상이 서로 오가는 시대에 한·일 두 나라 역사 시계는 거꾸로 가는 것 같다. 그동안 두 나라가 쌓아온 역사적 경험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한심한 일이다. 이는 모두 역사에 무지하고 무관심해서 비롯된 상황이다. 이제라도 역사를 제대로 살펴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갈수록 악화되는 한·일 관계를 개선할 실마리는 바로 역사 속에 있기 때문이다.2010년, ‘국권 침탈 100년’을 맞아 KBS와 NHK에서는 지난 2천 년간 한·일 관계 일면들을 소재로 특집 방송 ‘한국과 일본’을 제작했다. 이때 필자는 마치 조선통신사가 된 기분으로 두 방송국을 오가며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했고, 두 방송사 제작진의 마음이 하나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신숙주가 한 유언처럼 한국과 일본이 ‘공존’하기 위해서는 ‘공생’의 방법을 모색해야 하며, 그것을 위해서는 서로 ‘소통’을 해야 한다.우호와 적대는 별개가 아닌 한 몸역사적으로 한국과 일본은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였다. 필자는 2천 년의 한·일 관계를 ‘인연(因緣)’, ‘적대(敵對)’, ‘공존 (共存)’, ‘시련(試鍊)’, ‘재회(再會)’ 이렇게 5개 열쇠말로 짚어 보고 싶다.고대 일본문화의 근간인 ‘야요이(彌生)’ 문화는 벼농사와 철기를 가지고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주축이 되었다. 일본 최초 고대
글 손승철 (강원대 교수, 재단 자문위원)
"조선통신사에서 선인들의 지혜와 노련함을 배웠으면"
인터뷰 "조선통신사에서 선인들의 지혜와 노련함을 배웠으면" 지난 6월 17일 한국 외교부와 일본 외무성이 후원하고 동북아역사재단이 여러 연구기관과 공동주최한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 국제학술행사’ 개막식에서 기록영화 한 편이 소개되어 눈길을 끌었다. 바로 재일한국인 사학자 고(故) 신기수(辛基秀, 1931~2002) 선생이 만든 영화 ‘에도시대의 조선통신사’다. 고 신기수 선생의 딸로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교류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신이화 프로듀서를 재단 이원우 교육팀장이 만나 우리 시대에 조선통신사가 주는 메시지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_ 편집자 주신이화 (辛理華, Rika Shin)일본 오사카(大阪)에서 출생하였다. 런던대학교(University College London)를 졸업하였으며, 언어학을 전공하였다. 12년간 런던 BBC, NHK 등에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제작에 종사했다. 2010년 10월부터 서울에 거주하면서 부친인 고 신기수 선생의 영화를 한국에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이원우 독자들을 위해 아버지이신 고 신기수 선생과 고인이 만든 ‘에도시대의 조선통신사’에 관해 간단히 소개해 달라.신이화 아버지는 일본 교토(京都)에서 태어나 고베(神戶)대학 경영학부를 졸업하셨다. 주로 에도(江戶)시대부터 제2차 세계대전 후까지 한·일관계를 연구하셨는데, 생전에 1900년대 일본강점기가 두 나라 역사의 어두운 부분이라면 1600년대부터 1800년대까지 에도시대는 밝은 부분이라고 늘 강조하셨다. 희망의 역사도 아픔의 역사도 자료로 남겨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이를 위해 20권이 넘는 저서와 기록영화 5편을 남겼다. 아버지는 특히 조선통신사를 연구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관련 자료 110점과 민화 병풍 35점을 모아 재일한국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오사카시민문화공로상(1997년), 감수포장(2003년) 등을 수상했다. 아버지의 역작이라 할 ‘에도시대의 조선통신사’(1979년)는 조선통신사의 의의와 화려했던 한·일 문화교류의 증거를 조명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아버지는 조선통신사 소재 기록영화 말고도 ‘해방의 그
인터뷰진행 이원우 (홍보교육실 교육팀장)
2015 한불 국제학술대회한국과 프랑스, 130년 교류사를 회고하다
연구소 소식 2015 한불 국제학술대회한국과 프랑스, 130년 교류사를 회고하다 한국과 프랑스 정부는 올해와 2016년을 한불수교 1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공식 행사 개최 기간으로 정해 놓았으며, 이 시기 동안 두 나라에서는 다양한 분야와 기관에서 기념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이에 동북아역사재단은 한국과 프랑스가 교류하고 협력한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프랑스에서 한국에 관한 관심을 제고하기 위해 지난 5월 28~29일까지 파리 마리오트 리브고슈(Mariott Rive Gauche) 호텔에서 한불언어문화교육자협회(AFELACC)와 공동으로 “한국과 프랑스, 130년 교류사에 대한 회고”라는 주제로 한불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재단은 2012년부터 서울과 파리를 번갈아가며 매년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있다.이번 학술대회는 한불관계사 전반, 한불 문학과 교육 분야 교류, 그리고 양국의 정치·경제·과학 분야 교류, 문화·예술 분야 교류 분과의 다양한 전문가들이 참가하여 그동안 이뤄진 연구 성과를 발표하고 공유하는 귀중한 자리가 되었다. 특히 재불 학자 이진명 교수 등 한국학 대가들이 모여 지난 130년간 두 나라 관계와 교류사에 관하여 발표와 토론의 자리를 가진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한국과 프랑스는 공식 수교 이전부터 천주교를 매개로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한국인들이 일제 식민통치를 겪었던 35년을 제외하고는 1886년 조선과 프랑스가 통상조약을 체결한 후부터 정치·경제·사회·문화·과학기술 등 각 분야에서 긴밀한 협력을 해오고 있다.4개 분과 22개 논문 발표 한불 교류와 협력사 개관이번 학술대회에서는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다양한 주제로 발표하였는데, 총 4개 분과에서 모두 22개 논문이 발표되었다. 프랑스에서 대표적 한국학 전문가로 꼽히는 이진명 리옹3대학 명예교수는 기조강연에서 전통적 가치, 정신적·물질적 가치관이 다르고, 지리상으로도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두 나라 교류의 본질은 무엇인지 묻고, ‘한불관계의 전개과정 : 기원에서 현재까지’를 주제로 오늘날까지 한불관계의 발전과정을 개관하였다.재단의 장세윤 연구위원은
글 이상균 (독도연구소 2팀 연구위원)
제2회 일본군'위안부' 문제 국제학술회의 남•북한, 중, 일 함께 '위안부' 문제 연구와 해결책 모색
연구소 소식 제2회 일본군'위안부' 문제 국제학술회의 남•북한, 중, 일 함께 '위안부' 문제 연구와 해결책 모색 5월 30일 중국 옌지(延吉)에서 제2회 일본군‘위안부’ 문제 국제학술회의가 열렸다. 이 학술회의는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리는 것으로 한국과 중국, 북한 그리고 일본에서 30명이 넘는 학자들이 참가하였다. 그간 한일이나 한중일의 학자들이 참가한 일본군‘위안부’ 관련 학술회의는 종종 있었지만, 북한 학자들까지 참가하는 학술회의는 최근 들어 처음 있는 일이다.학술회의는 연변대학 과학기술청사 제4회의실에서 개최되었으며 3개의 세션에서 모두 12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한국 측 발표자로는 윤명숙 충남대 책임연구원과 재단의 남상구 연구위원, 필자가 나섰고, 중국 측에서는 수즈량(蘇智良) 상하이(上海)사범대 교수와 김성호, 이홍석 연변대교수, 자오위제(趙玉潔) 지린성(吉林省)당안관 연구원, 왕위창(王玉强) 지린대 교수가 발표했다. 북한에서는 김철남 조선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실장과 리철홍, 서정호 연구사가 주제 발표를 했으며, 일본 도쿄(東京)외국어대의 김부자 교수도 보고했다.12편의 발표문들은 다루는 세부 주제에 따라 크게 두 범주로 나뉘었다. 하나는 ‘위안부’ 제도의 역사적 측면을 다룬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이 문제를 둘러싼 최근의 국내외 동향과 과제를 검토한 것이었다. 수즈량 교수의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일본군 직영 군위안소 관련 연구 - 상하이 양자자이(楊家宅) 일본군 위안소를 중심으로’와 자오위제 연구원의 ‘중국 동북지역의 관동군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 관한 연구’, 리철홍 연구사의 ‘조선에서 발견된 일본군 위안소와 성노예 범죄의 진상‘이 전자의 대표적인 경우다. 김부자 교수의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일본사회와 아사히신문 문제’, 김철남 실장의 ‘과거의 성노예 범죄를 부정하는 일본의 리면세계와 국제사회계의 과제’, 남상구 연구위원의 ‘아베총리의 역사인식과 일본군‘위안부’ 문제’, 왕위창 교수의 ‘미국 국회의 ‘위안부’ 문제 관련 입법 활동에 관한 연구’ 등이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새로운 자료 발굴에 주목, 논의 진척 기대”일본군‘위안부’
글 서현주 (역사연구실 연구위원)
한국의 독립을 외치다 우리 땅에 뼈를 묻은 배설
역사인물 한국의 독립을 외치다 우리 땅에 뼈를 묻은 배설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동포를 구하라”영국인 배설(裴說, Ernest T. Bethell)은 한국 근대사에 독특한 역할을 수행한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였다. 그가 발행한 신문은 항일 민족진영의 구심점이었다. 대한매일신보(이하 ‘신보’로 약칭)는 국한문판, 순한글판,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 이렇게 3종으로 발행되었다. 신보사는 신문 발행과 동시에 국채보상의연금총합소를 설치하여 일본의 경제침략에 저항하는 성금을 접수하는 창구였고,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의 본거지이기도 하였다.배설은 1872년 11월 2일 영국 항구도시 브리스톨에서 태어났다. 브리스톨의 명문 머천트 벤처러스 스쿨(Merchant Venturers School)에서 공부한 후 1888년 일본으로 건너가 고베(神戶)에서 무역업에 종사하며 두 동생과 공동으로 베델 브라더스(Bethell Brothers)라는 무역상을 경영하였다.한국인을 대변해 준 대한매일신보 발행인그러던 중 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 특파원 자격으로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한반도에서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고 침략정책을 노골적으로 추진하던 때였다. 민족진영은 이에 대응하여 여러 갈래로 저항운동을 거세게 전개하였다. 고종황제는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일본에게 빼앗긴 외교권을 되찾으려 했으나, 오히려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나 무력으로 일본에 대항하는가 하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애국계몽운동과 문화운동도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대구에서 시작하여 전국으로 확산된 국채보상운동은 일본의 경제적 예속에서 벗어나 자립하고 독립하자는 자발적 범국민운동이었다. 신보는 이와 같은 민족사적 전환기에 발간되었고, 당시 한국인의 생각을 대변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이었다.배설의 반일 언론은 일본의 조선 침략정책에 커다란 걸림돌이었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수백 마디 자기 말보다도 한 줄 신문기사가 조선인들에게 더
글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한미공공정책위원회 재미 한인 지도자 대회에서 확인한 미국 정계의 한국 지지 여론
시민사회 한미공공정책위원회 재미 한인 지도자 대회에서 확인한 미국 정계의 한국 지지 여론 지난 5월 19일 미국 워싱턴 D.C. 미 국회의사당 레이번빌딩 골드룸에서는 재단 지원 시민단체인 한미공공정책위원회(Korean American Public Affairs Committee)가 주최하고 동북아역사재단이 후원하는 ‘2015년도 재미 한인 지도자 대회(Korean American Leaders Conference)’가 열렸다.이번 행사는 재미 한인사회를 매개로 미 연방의회와 대한민국 국회 간의 삼자대화(Trilateral Talk)를 통해 한인사회는 물론 한·미 두 나라 정부와 양국 시민사회 내에서 중요한 공동 관심사로 떠오른 현안을 공개적으로 논의하고, 해결 방안을 찾아보자는 취지로 마련한 것이다. 특히 이번 행사는 미국 뉴욕 한인사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한미공공정책위원회(KAPAC)와 이철우 회장이 미국 정계와 한인사회를 연결하는 긴밀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위해 다각적으로 노력한 결실이었다.일본군‘위안부’ 문제, 동해표기 문제에 관해 국제사회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특히 미국 내 시민사회와 여론 주도층의 관심과 이해가 매우 중요하다. 이에 동북아역사재단에서는 해마다 우리 해외 교포의 사회활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지·후원해왔다. 이번 ‘재미 한인 지도자 대회’에 재단 김민규 홍보교육실장이 직접 참석해 깊은 관심을 표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한미동맹 토대로 한인사회 권익 신장을 위한 활동 전개한미공공정책위원회(KAPAC)는 2006년 설립 후 한인사회의 권익을 보호하고 정치력을 신장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시민단체다. 이와 함께 한미동맹을 토대로 양국 관계를 더욱 공고히 발전시키기 위해 매년 다양한 활동을 펼치며 꾸준히 활동해 왔다. 2007년에는 ‘한미 동맹 결의안(H. Res. 295)’이 미 의회에서 발의되고 또 만장일치로 통과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 이처럼 그동안 거둔 성과를 바탕으로 올해에는 미국 정치의 심장부인 국회의사당에서 미 하원 외교위원장인 에드 로이스(Ed Royce) 의원과 공동으로 ‘2015 재미 한인 지도자 대회’
글 이준호 (홍보교육실 행정원)
정동 손탁호텔 터독립 염원과 국권 피탈의 명암이 교차하는 근대식 호텔
현장보고 정동 손탁호텔 터독립 염원과 국권 피탈의 명암이 교차하는 근대식 호텔 ▲ 1900년대 초 손탁호텔        (이미지 제공 : 독립기념관)서울 중구 정동사거리에서 덕수궁 돌담길로 향하는 내리막길을 조금 걷다보면 주한 캐나다대사관 맞은편으로 커다란 붉은색 벽돌건물을 만난다. ‘이화100주년기념관’이라 불리는 이 건물 지하주차장 입구에는 작은 표지석이 하나 있다. ‘손탁호텔 터’라고 쓰인 이곳이 바로 개화기 서울에 지어진 최초의 근대식 호텔이 있던 자리다.앙트와네트 손탁(Antoinette Sontag, 1854~1925)은 프랑스계 독일인 여성으로 1885년 러시아 초대 공사였던 베베르 가족과 함께 조선에 입국하였다. 삼십대 초반에 조선 궁내부에서 외국인 접대를 맡았던 손탁은 뛰어난 친화력과 외국어 실력으로 고종과 민비에게 신임을 얻었다. 1895년 고종은 손탁에게 정동에 있는 한옥 한 채를 하사했는데 이곳이 내외국인들의 사교장으로 급부상하였고, 당시 친미개화 세력의 구심이었던 정동구락부(Chongdong Club)의 모임 장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1896년 정동구락부를 모체로 한 독립협회가 공식 발족한 뒤, 1897년 독립관을 건립하기까지 당시 독립협회 주요 인사들은 이곳을 항일운동의 거점으로 활용했다. ‘손탁빈관(孫澤賓館)’이나 ‘한성빈관(漢城賓館)’으로 불리던 이 곳은 1902년 2층 벽돌 건물로 신·개축되었으며, 궁내부가 ‘프라이빗 호텔(일부 예약 손님만 묵을 수 있는 특정 호텔)’로 운영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한 후 러시아 세력이 위축된 뒤로는 명맥만 유지했고, 1905년에는 ‘을사조약’을 배후에서 조종한 일본의 특파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머물기도 했다.이렇듯 주요 정치가들의 회합 장소이자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인들의 숙소로 쓰였던 손탁호텔은 1909년 다른 외국인에게 경영권이 넘어갔으며, 손탁도 1909년 고국인 프랑스로 돌아가 1925년 세상을 떠났다. 그 뒤 손탁호텔은 1917년 건물부지가 이화학당 기숙사로 팔렸다가 1922년 이화학당의 교실과 기숙사, 실험실을 비롯한 각종 부속
열 살 딸에게 박태보 선생을 배운 아빠
현장보고 열 살 딸에게 박태보 선생을 배운 아빠 초등학생 아이를 둔 30대 아빠입니다. 맞벌이라 직장 생활과 집안일을 함께 하는 것은 기본인데, 요즘은 아이들 학교 숙제 중 아빠와 함께 해야 하는 것들이 많더군요. 초등학교 3학년 아이가 요즘 사회시간에 ‘우리 고장’을 배운다며 부쩍 이것저것 묻더니, 이번 주말에는 함께 고장 문화재를 탐방한 보고서를 써야 한다고 했습니다.탐방지를 고민하던 중 아이가 박태보를 기념해 지은 ‘노강서원’을 가자고 했습니다. “박태보가 누군데?” 부끄럽지만 저는 39년을 살며 박태보란 이름을 처음 들었습니다. “응, 인현왕후 폐위를 앞장서서 반대하다가 유배 가셨던 분이야.” 얼마 전 《인현왕후전》을 읽었다는 아이는 제게 열심히 설명해 주었습니다.카메라와 삼각대를 챙겨들고 아이와 함께 ‘노강서원’을 찾아갔습니다. 저는 의정부에 10년 넘게 살면서도 집에서 차로 20분밖에 안 되는 곳에 이런 유서 깊은 서원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노강서원’은 조선 숙종 때 문신인 박태보(1654∼1689)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입니다. 박태보는 호남 암행어사, 파주 목사 등의 벼슬을 역임했는데 인현왕후 폐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 가던 중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학문이 깊고 성품도 강직한 분이어서 죽은 뒤 영의정에 임명되기도 했습니다. 경기도 기념물 제41호인 ‘노강서원’은 숙종 21년(1695)에 세웠고, 숙종 27년(1701)에 국가에서 인정한 사액서원으로 그 때 ‘노강’이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원래는 서울 노량진에 세웠으나 한국전쟁으로 훼손되었고, 1969년 그 후손들이 의정부 장암동으로 옮겨 복원한 것이라고 합니다.요즘 부쩍 역사에 관심이 많아진 아이와 앞으로 한 달에 한 번은 가까운 역사 유적지를 찾아보기로 약속하며 서원을 나왔습니다.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저는 좀 더 바빠지겠지만 아이와 함께 이런 추억을 하나씩 쌓아가는 것도 참 즐거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 박세호 (경기 의정부시 신곡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