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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한국의 독립을 외치다 우리 땅에 뼈를 묻은 배설
  • 글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동포를 구하라"

영국인 배설(裴說, Ernest T. Bethell)은 한국 근대사에 독특한 역할을 수행한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였다. 그가 발행한 신문은 항일 민족진영의 구심점이었다. 대한매일신보(이하 '신보'로 약칭)는 국한문판, 순한글판,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 이렇게 3종으로 발행되었다. 신보사는 신문 발행과 동시에 국채보상의연금총합소를 설치하여 일본의 경제침략에 저항하는 성금을 접수하는 창구였고,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의 본거지이기도 하였다.

배설은 1872년 11월 2일 영국 항구도시 브리스톨에서 태어났다. 브리스톨의 명문 머천트 벤처러스 스쿨(Merchant Venturers School)에서 공부한 후 1888년 일본으로 건너가 고베(神戶)에서 무역업에 종사하며 두 동생과 공동으로 베델 브라더스(Bethell Brothers)라는 무역상을 경영하였다.

한국인을 대변해 준 대한매일신보 발행인

그러던 중 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 특파원 자격으로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한반도에서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고 침략정책을 노골적으로 추진하던 때였다. 민족진영은 이에 대응하여 여러 갈래로 저항운동을 거세게 전개하였다. 고종황제는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일본에게 빼앗긴 외교권을 되찾으려 했으나, 오히려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나 무력으로 일본에 대항하는가 하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애국계몽운동과 문화운동도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대구에서 시작하여 전국으로 확산된 국채보상운동은 일본의 경제적 예속에서 벗어나 자립하고 독립하자는 자발적 범국민운동이었다. 신보는 이와 같은 민족사적 전환기에 발간되었고, 당시 한국인의 생각을 대변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이었다.

배설의 반일 언론은 일본의 조선 침략정책에 커다란 걸림돌이었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수백 마디 자기 말보다도 한 줄 신문기사가 조선인들에게 더 위력이 크다고 토로했을 정도였다. 일본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배설을 추방하고 신문을 폐간하려 획책했지만, 배설은 영국인이 누릴 수 있는 치외법권을 방패막이로 항일 언론투쟁을 전개하였다.

신보는 의병봉기와 무력항쟁을 보도하면서 진압에 나선 일본군이 자행하는 무자비한 보복과 무고한 민간인들에 대한 잔인한 살상 행위를 폭로하였다. 주일 영국대사 맥도날드(Mac Donald)는 1908년 말까지 적어도 한국인 1만 4천 명과 400명이 넘는 일본인들이 죽었는데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섞여 있다고 지적하였다. 통감부는 이런 상황이 벌어지도록 선동하는 신문이 바로 신보라고 주장하였다. 신보에 실린 논설은 그대로 의병대가 창의문(倡義文)으로 사용하고 있을 정도로 의병봉기에 직접 원인을 제공한다고 비난하였다.

통감부는 배설을 처벌해 달라고 영국에 강력히 요구했다. 배설의 신병처리를 둘러싸고 일본과 영국은 신보가 창간된 1904년부터 일본이 한국을 강제 병합한 1910년까지 복잡한 외교 교섭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배설은 두 차례나 재판에 회부되기도 하였다.

"한국 동포를 구하라" 유언 남기고 37세에 요절

첫 번째 재판은 1907년 10월 14일과 15일 이틀 동안 열렸다. 주한 영국공사 헨리 코번(Henry Cockburn)이 재판을 담당한 영사재판으로 일종의 약식재판이었다. 이 재판은 배설에게 6개월간 근신하도록 판결을 내리는 것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신보는 6개월이 지나자 이전보다 더 강력한 항일논조로 되돌아갔다. 통감부가 영국에 또 다시 요청하여 배설은 두 번째로 기소되었다. 이리하여 1908년 6월 15~19일까지 4일 동안 서울 덕수궁 옆 현재 영국 대사관 자리에 있던 영국 총영사관에서 재판이 이뤄졌다. 이번에는 상하이(上海) 주재 영국 고등법원(H.B.M.'s Supreme Court for China and Korea) 판사와 검사가 서울에 와서 정식재판 절차를 거쳤다. 영국과 일본 두 나라가 이 재판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재판에 제시된 피의사실 증거물은 한국어판 신보 기사 3건이었다. 통감부는 한국어판이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의병투쟁에 나서도록 원인을 제공하는 신문이라는 사실에 적극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한국어판은 총무 양기탁(梁起鐸)이 주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재판은 양기탁을 겨냥한 탄압이라는 성격도 있었다. 양기탁은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고, 통감부는 배설이 상하이에서 복역하는 동안 양기탁을 구속하여 영·일 사이에 큰 분쟁이 일어났다.

치열한 법정 공방 끝에 재판 4일 째인 6월 18일, 재판장은 배설을 제1급 경범죄인으로 선고하여 3주일간의 금고에 처하고 복역이 끝난 뒤 6개월간 근신할 것을 서약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추방할 것이라고 판결했다. 앞으로도 피고가 계속하여 반란을 선동한다면 추방령을 내리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덧붙였다.

이리하여 배설은 상하이로 가서 3주간 형무소에 갇혔다. 배설이 상하이에서 복역하는 동안 통감부는 신보 제작을 총괄하던 총무 양기탁을 국채보상의연금 횡령혐의로 구속하여 영·일 간 심각한 외교 분쟁을 야기하였다. 배설은 형기를 마치고 귀국하였으나 이듬해인 1909년 5월 1일 37세라는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눈을 감으면서 한 맺힌 유언을 남겼다.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동포를 구하라."

그의 유해는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소에 안장되었다. 이듬해 그를 추모하는 민족진영 인사들이 성금을 모아 묘비를 건립하면서 장지연이 지은 비문을 새겼는데 일본이 한국을 강제 합병한 후 그 비문마저 깎아 없앴다. 1964년 한국신문편집인협회가 언론인들의 성금을 모아 작은 묘비를 세우고 일제가 깎아 없앤 비문을 복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