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7일 한국 외교부와 일본 외무성이 후원하고 동북아역사재단이 여러 연구기관과 공동주최한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 국제학술행사' 개막식에서 기록영화 한 편이 소개되어 눈길을 끌었다. 바로 재일한국인 사학자 고(故) 신기수(辛基秀, 1931~2002) 선생이 만든 영화 '에도시대의 조선통신사'다. 고 신기수 선생의 딸로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교류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신이화 프로듀서를 재단 이원우 교육팀장이 만나 우리 시대에 조선통신사가 주는 메시지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_ 편집자 주
신이화 (辛理華, Rika Shin)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출생하였다. 런던대학교(University College London)를 졸업하였으며, 언어학을 전공하였다. 12년간 런던 BBC, NHK 등에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제작에 종사했다. 2010년 10월부터 서울에 거주하면서 부친인 고 신기수 선생의 영화를 한국에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이원우 독자들을 위해 아버지이신 고 신기수 선생과 고인이 만든 '에도시대의 조선통신사'에 관해 간단히 소개해 달라.
신이화 아버지는 일본 교토(京都)에서 태어나 고베(神戶)대학 경영학부를 졸업하셨다. 주로 에도(江戶)시대부터 제2차 세계대전 후까지 한·일관계를 연구하셨는데, 생전에 1900년대 일본강점기가 두 나라 역사의 어두운 부분이라면 1600년대부터 1800년대까지 에도시대는 밝은 부분이라고 늘 강조하셨다. 희망의 역사도 아픔의 역사도 자료로 남겨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이를 위해 20권이 넘는 저서와 기록영화 5편을 남겼다. 아버지는 특히 조선통신사를 연구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관련 자료 110점과 민화 병풍 35점을 모아 재일한국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오사카시민문화공로상(1997년), 감수포장(2003년) 등을 수상했다. 아버지의 역작이라 할 '에도시대의 조선통신사'(1979년)는 조선통신사의 의의와 화려했던 한·일 문화교류의 증거를 조명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아버지는 조선통신사 소재 기록영화 말고도 '해방의 그날까지 : 재일조선인의 발자취'(1986년)를 제작하였는데, 이 영화는 2013년 한국에서도 상영하였다.
이원우 영국 BBC에서 일하다가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 한국어와 한국의 역사·문화를 배우고 있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다면?
신이화 아버지가 만든 '해방의 날까지'를 소개한 것이 계기다. 영국에서 프로듀서로 일할 때 전쟁에 관한 프로그램을 맡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얀마의 임팔(Imphal)에서 일본군과 싸웠던 병사와 포로들을 인터뷰하였는데, 처음 일본에서 왔다고 하니까 인터뷰를 거절했다. 또 '부모가 한국인'이라고 했더니 "포로수용소에서는 한국인 군관에게 끌려가 매일 얻어맞았다"며 역시 인터뷰를 거절했다. 그들이 마음을 열고 이야기해줄 때까지 1년 반 동안 매주 만나러 갔다. '임팔작전'은 영국에서 '잊힌 전쟁(The forgotten War)'이라고 불린다. 임팔은 유럽의 중심 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에 이곳에서 비참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사실조차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재일한국인 1세들은 일본에 끌려와 해방을 위해 싸웠지만 일본을 포함해 그 어느 나라에서도 역사의 주인공이 되지는 못했다. 임팔 생존자를 보며 재일한국인 1세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이런 영국에서의 경험으로 강제 연행된 1세나 일본인을 인터뷰했던 아버지의 영화 '해방의 날까지'가 얼마나 힘들여 만든 작품인지를 알 수 있었다. 또 전쟁 관련 영상자료를 조사할 때 영국과 러시아에서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던 필름을 결국은 아버지가 소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많이 놀랐다.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영상자료와 사진을 담은 '해방의 날까지'는 NHK '영상의 세기'라는 프로그램에도 사용하였다. 영상 관련 일을 해온 사람으로서 강제 연행 피해자 분들이 생존해 있는 동안 하루라도 빨리 이 영화를 한국에서 개봉하고 싶었고, 그래서 한국어와 한국의 역사·문화를 배우게 되었다.
이원우 최근 일본을 오가면서 느끼는 한·일 양국 사회의 변화 양상에 어떤 생각이 드나?
신이화 최근 계속되는 한·일 간 역사 논쟁으로 정치인이 아닌 일반인들조차 문화 행사 여는 것을 자제하는 느낌을 받았다. 이는 유감스러운 일이다. 지금 같은 시대일수록 문화의 힘, 일반인들의 힘은 중요하다. 일본 오카야마(岡山)의 소동춤, 미에현 즈시(三重県津市)의 당인행렬 등은 모두 조선통신사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인형은 통신사가 통과하지 않은 아오모리(靑森)나 아키타(秋田), 미야기(宮城), 후쿠시마(福島)에서도 볼 수 있으며 현재는 일본의 전통이 되었다. 국가나 정부 차원 교류도 중요하지만 문화예술인에서 서민까지 일반인들이 교류하며 꽃피운 문화적 사실(史実)에 주목하고 싶다. 힘없어 보이지만 그들이 국익을 떠나 교류했기 때문에 비로소 자유롭고 영향력이 큰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이원우 고 신기수 선생은 한국과 일본이 반목하고 갈등하는 가운데 잊힐 뻔한 '에도시대의 조선통신사'를 발굴하였는데, 그 과정이 궁금하다.
신이화 1970년대 초반, 고서(古書) 시장에서 찾은 두루마리 그림 하나가 아버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꿨다. 일본에서 일그러진 역사 교육을 받아온 아버지는 이 그림을 보자 "임진왜란으로 불구대천 원수가 된 두 나라가 전쟁이 끝난 지 불과 10년도 안돼서 어떻게 국교를 회복하게 됐을까?" "일본 민중은 조선의 사절단을 어떻게 맞이했을까?"하는 의문과 함께 눈앞이 확 트이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몇 년 후, 전체 길이가 120m나 되는 색깔이 선명한 두루마리를 또 하나 발견하였는데 두루마리에 그려진 것은 1711년에 일본을 방문한 제8회 조선통신사 일행이었다. 안내를 맡은 사무라이 등을 포함해 총 4,800명이 참가한 장대한 행렬이었다. 아버지는 일행들의 생생한 모습과 표정을 포착하고 있는 이 작품이 요즘의 '기록영화'에 해당한다고 생각하였고 이 두루마리를 날실로 삼고 각지에서 발견한 그림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일본 내 축제를 씨실로 삼아 역사를 되살리는 기록영화를 만드는 데 착수했다. 아버지는 쓰시마(對馬島)에서 오사카, 에도(도쿄)까지 통신사가 지나간 곳을 방문하고, 통신사 자료를 발견할 때마다 카메라를 돌렸다. 그러나 당시에는 조선통신사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촬영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촬영을 하려면 소장자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특히 절의 허가를 얻는 게 매우 힘들었다. 교토 히가시야마(東山)에 있는 센뉴지(泉桶寺)는 황실과 인연이 있는 절인데 아버지는 이곳에 있는 '조선국사환대도병풍(朝鮮國使歡待圖屛風)'을 촬영하기 위해 일곱 번이나 찾아간 끝에 간신히 촬영허가를 얻기도 하였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해가는 과정은 메이지유신 이후 한일 사이에 생긴 상처를 치유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당시 심경을 "마치 '현대의 통신사' 역할을 짊어진 것 같다. 역사의 역동성을 회복하기 위해 내가 맡아야 할 사명인지도 모른다"고 하셨다.
이원우 조선통신사 관련 자료 수집과 영화 제작에 몰두한 아버지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어떤 생각을 했나?
신이화 어릴 때는 이해를 못했다. 어린 내 눈에는 낡고 예쁘지도 않은 잡동사니들을 집으로 가져와 어머니와 함께 좋아하시는 모습이 이상해 보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만든 영화가 문부성 선정 영화가 된 뒤 당시 중학교 교장선생님이 저에게 "아버지 영화가 교과서를 바꾸는 계기가 됐다"고 말씀하셨다. 깜짝 놀랐다. 그때부터 아버지가 정말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 같다.
이원우 1979년에 '에도시대의 조선통신사'를 제작하여 상영했을 때 일본 내 반향은 어느 정도였나?
신이화 메이지유신 후 국가정책으로 조선통신사가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다가 이 영화로 다시 한 번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979년 영화가 완성됐을 때 아사히신문은 이 사실을 사설로 다룰 정도였다. 일본 전역에서 영화 상영 물결이 일었다. 한국에서도 같은 해 8월 동양방송(TBC)에서 이 영화를 방영했다. 영화는 1980년 마이니치영화콩쿠르에 입상했고 문부성 영화로도 선정돼 큰 화제였다. 아버지는 당시를 "마치 들판에 불길이 번지는 기세였다"고 회고했다. 영화가 마중물이 되어 각지에서 조선통신사 자료 발굴 소식이 끊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조선통신사 자료가 있는 곳이면 일본 어디라도 달려갔다. 극히 일부 학자의 관심을 받았던 '조선통신사'라는 사실(史實)은 일반에게도 널리 알려졌고, 일본 역사교과서에도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그전까지 교과서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출병'부터 메이지 초기 '정한론' 사이는 공백으로 남아 있었다. 영화 상영 후 통신사가 지나갔던 전국 곳곳에 기념비가 들어서고, 조선통신사를 '중국의 사절'로 설명했던 절들도 안내문을 고쳐 달았다. 영화 제작 다음해인 1980년부터 쓰시마에서는 170년 만에 조선통신사 행렬이 재현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원우 6월 17일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 국제학술행사에서 양국 참가자들이 함께 영화를 보았고, 6월 30일에는 국회에서도 상영할 예정인데 이미 영화를 본 한국인 관객의 반응은?
신이화 아버지는 생전에 한국어 자막을 만들어 한국에서 상영하고 싶어 하셨다. 시대가 어려울수록 이 영화가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는 조선통신사 행렬 행사가 열리는 등 많이 알려져 있지만 본래 정신은 별로 현실에 반영되고 있지 않은 느낌이다. 그래서 조선통신사의 역사적 배경과 오늘날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같이 생각해 보는 기회를 만들고 싶었다. 무엇보다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에 맞춰 이 영화를 꼭 한국에서 상영하고 싶었다.
영화에 관한 평가는 일본과 한국 모두 비슷하다. "조선통신사를 통해 미래를 위한 용기와 지혜를 얻었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부산에 사는 한 여성은 "고향에서 매년 열리는 조선통신사 행렬에 참여하면서도 실은 그 의미를 잘 모른 채 아이들을 데리고 다녔다. 영화를 보고 통신사의 본래 의미를 알았다"고 했다. 또 한국인과 결혼한 한 일본인은 "아이들이 학교 역사 시간만 되면 주눅이 든다고 했는데 한·일 우호의 역사를 알고 자신감을 얻은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시립대학에서 이 영화를 상영했을 때는 1학년부터 4학년까지 약 140명이 참석했는데 학생들의 반응이 예상 밖이어서 놀라기도 했다. "유럽과 달리 어떻게 이웃한 나라가 200년이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동아시아 안정에도 기여한 통신사, 그 경제효과는 어느 정도였나?" 등 진지한 질문이 잇따라 쏟아졌다. "조선통신사는 알고 있었지만 영화를 보고 나니 더 신선하다!"거나 "당시 비법을 살려 지금 외교와 경제에 적용하면 어떨까"하는 의견도 있었다. 학생들의 반응을 보고 기쁜 마음이 들면서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책임감도 느꼈다.
이원우 조선통신사는 경색된 한·일 관계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는가?
신이화 1990년 5월 일본을 방문한 노태우 전 대통령은 국회연설에서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를 소개하며 '성의와 신의가 있는 사람'이라고 상찬했다. 호슈는 제8~9차 조선통신사를 영접한 쓰시마번의 외교관이자 유학자였다. '서로 속이지 않고, 다투지 않고, 믿음을 통해 사귄다'는 호슈의 말은 선린우호 관계의 전범(典範)으로 요즘 같은 때 양국 모두 되새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열 두 차례나 조선통신사가 왕래하는 동안 빛과 그림자가 있었으며 모든 것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행한 침략 전쟁은 양쪽 모두에게 큰 재앙이었고, 그 때 받은 상처를 치유하며 200년 이상 한국과 일본이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던 중심축은 바로 조선통신사다. '이웃 나라 사이에 200년이나 평화를 유지했다'는 이야기를 영국인에게 하자 놀라워했던 일이 생각난다. 동아시아 전체에 안정을 가져오고 '비단길', '은길'까지 이어졌던 조선통신사를 파견한 선인들의 지혜와 노련함을 배우고 현대에 되살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정치 상황이 어떻든 양국의 관계는 계속 교류해야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조선통신사가 일깨워주고 있다.
이원우 고 신기수 선생께서 전 생애를 바쳐 발굴하고 연구해 온 조선통신사 관련 사업을 앞으로 계승하기 위해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신이화 일본과 한국이 1천 년 넘도록 오랜 관계를 맺어온 것에 비하면 지난 50년은 상당히 짧은 시간이다. 아버지가 생전에 "우리들은 100년, 200년 후를 항상 생각해야 한다"던 말씀을 되새기며 앞으로 한·일 우호를 위해, 더 나아가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아버지가 만든 영화를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소개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싶다. '조선통신사'를 통해 한·일 양국이 함께 했던 교류 역사를 많은 사람들이 기억해 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