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과 주변은 동양과 서양, 그리고 고대와 현대를 가로지르는 주제이며, 이는 또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영역의 문제를 아우르는 주제다. 특히, 동아시아에서 중심과 주변의 문제는 역내국가의 역사적 관계와 정체성을 규정하는 주요한 요소로 작용하면서 역사갈등과 영토분쟁의 연원으로 작용하고 있다. 나아가 동아시아의 공동번영이라는 미래질서를 설계해 나가는 데서도 보이지 않는 '관념의 벽'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최근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의 부상이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 중시해야 할 것은 전후 전통시대에 주변적 지위에 머물러 있던 한국, 일본, 홍콩, 대만 등 동아시아 주변부 역량이 증대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주변부의 성장은 중심과 주변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21세기 벽두 역내 국가간의 역사·영토문제를 둘러싼 갈등과 평화로운 동북아 질서 모색이라는 모순된 흐름 속에서 그동안의 관습화된 시각을 넘어서는 새로운 사고, 즉 '사고의 전도(顚倒)'가 필요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이러한 역사적 전환기에 그동안 단절적이고 대립항으로서만 인식되어 왔던 중심과 주변의 문제를 소통과 상생, 그리고 미래지향적인 조망 속에서 살펴보기 위해 지난 12월 10일부터 11일 이틀 동안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중심과 주변에서 본 동아시아』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했다. 그동안 주변국의 역사왜곡과 같은 오도된 주장에 대한 대응 논리를 꾸준히 개발하는 한편 동아시아를 이해하는 새로운 개념과 접근법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번 학술회의는 주변국의 역사왜곡을 보다 큰 역사와 현실의 흐름 속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재단의 일련의 기획 중의 하나다.
이날 학술회의에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미국, 호주, 중국, 일본, 몽골 등 80여명의 학자가 참여하는 대규모 국제학술회의로 4개의 세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세션 별로 3개의 패널을 통해 중심과 주변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접근법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임형택 교수(성균관대)는 「동아시아의 중국 중심주의와 그 극복의 과제」를 통해 중심과 주변에서본 동아시아라는 주제는 '방법론' 이전의 '현실의 문제'라고 전제하고, 중국 중심적 시각이 한·중·일 3국의 역사에서 어떻게 극복되어 왔는가를 검토했다. 그는 박지원, 홍대용 등 실학자들의 중국 중심의 천하관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동아시아 근대사에서 중국 중심의 천하관은 "장례절차를 치르지 않은 채 묻혀 버린"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고 지적 했다. 아울러 손문, 양계초 등의 '한국관'의 한계를 논급하면서 중국 중심주의의 왜곡 또는 변종이 출현할 가능성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 동북공정을 비롯한 중국의 주변지역에 대한 역사왜곡과 문화공세는 이러한 변종의 출현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중심과 주변의 문제를 어떻게 보고 풀어가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을 제기했다.
미국 코넬 대학 마크 셸던(Mark Selden) 교수는 「세 개의 역사적 전환기와 동아시아에서의 중심과 주변」에서 동아시아에서의 중심과 주변의 관계를 △16-19세기 중국 중심의 조공체제기, △1914-1945년간의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대동아공영권 주장 시기, △1945년 이후 미국의 팍스 아메리카 시기로 구분하여 검토했다.
그는 중국중심의 조공체제에 대한 수정주의적 견해를 소개하면서 중국이 조공무역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뒷받침했던 반면 일본과 미국의 지역질서 주도기에는 전쟁과 약탈, 그리고 역내 국가간의 불안정성이 증대되었다고 주장했다. 셸던교수는 최근 동아시아의 자본주의화와 역내 교류와 협력의 증대, 그리고 이전 시기와 구분되는 다자간 이니셔티브의 가능성에 주목하며 동아시아의 부상을 위해 역내 국가들의 파편화 현상을 극복해 나가야 할 것이라는 과제를 제시했다.
동경대 강상중(姜尙中) 교수는 중심과 주변의 문제를 현실의 문제로 접근했는데, 그는 기조 발제문 「동아시아 지역질서의 중심과 분산」에서 한반도가 지정학적으로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관문과 역내 국가 간 분쟁의 중심이라는 이중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이 세계경제에서 확고한 입지를 구축했지만 아직도 1890년대 이래 구축된 중국, 일본과의 계층적 구조(hierarchy)가 완전히 청산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진단했다.
이어서 2007년 9월의 6자회담과 10월의 남북정상회담이 △역내 국가간 다자적 안보체제와 남북한의 평화 번영의 공존의 가능성을 보였다는 점, △북한 핵문제 해소이후 한반도 평화체제에 관한 지속적 논의가 가능해졌다는 점 등에서 획기적 의의를 갖는 것이며, 이러한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될 경우 한반도는 대륙과 대양을 연결하는 허브로서, 그리고 중국, 일본과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번 국제학술회의에서 거둔 주목할 만한 성과는 이 자리를 빌려 '동아시아사 연구자 포럼'을 결성하기 위한 준비모임이 꾸려진 점이다. 학술회의에 참가한 각국의 몇몇 유력한 학자들이 별도의 자리를 마련하고 동아시아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연대를 모색하자는 데에 뜻을 모은 것이다. 荒井信一(ARAI Shinichi), 川島眞(KAWASHIMA Shin), 姜義華(JIANG Yihua), 王新生(WANG Xinsheng), 吳密察(WU Micha), 李泰鎭(YI Taejin), 白永瑞(BAIK Youngseo) 등 7명의 학자들이 참석했는데, 각 지역이 비교적 잘 안배되었다. 해당 모임에서는 '정기적으로 학회 개최', '충분한 논의를 거쳐 학회의 주제를 정할 필요가 있다', '항시적으로 교류하고 소통할 수 있는 사이버 공간(홈페이지, 뉴스레터 등)을 만들자'는 등 다양한 의견이 개진되었다.
이런 방안을 구체적으로 논의하기 위해 내년 초 적절한 시점에 다시 회합을 갖기로 약속하였다. 끝으로, 이런 뜻을 공표하기 위해 모임의 취지를 정리하여 '국제학술회의를 마치며'라는 글을 채택하였다. 그 내용이 학술회의의 말미에 소개되었는데, 이번 국제학술회의가 성공적이었다는 평가, 동아시아 역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학자들 간의 긴밀한 협조와 공동연구, 지속적인 교류와 소통이 필요하다는 인식, 이런 교류와 소통을 지속시킬 일정한 협의체를 결성하기 위해 공동 노력한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