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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엔닌의 일기' 복원을 통해 본 21세기 한·중·일
  • 전 주중대사관 총영사 유주열

9세기 일본 출신으로 중국의 불교 성지를 여행하며, 신라인 장보고와 돈독한 관계를 맺었던 승려 엔닌의 일기를 통해 당시 활발했던 동아시아의 인적 물적 교류의 실상을 되짚어 보는 연재물을 3회(①②③)에 걸쳐 싣습니다 _ 편집자주

한국과 중국이 수교 15주년을 넘기면서 두 나라의 교역액은 1500억불에 달할 것이라고 한다. 이 숫자는 한국과 미국, 한국과 일본의 총 교역을 합한 것과 비슷하다. 한·중 두 나라의 경제관계가 얼마나 밀접한지 알 수 있다. 경제적으로 이렇게 밀접하다보니 중국에 거주하는 우리교민이 70만을 웃돌고 있으며 올림픽이 개최되는 2008년 후에는 100만 교민시대가 열릴 것이라고도 한다. 중국 국적을 가지고 중국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 동포 200만을 합치면 300만의 우리민족이 중국에 살고 있는 셈이다.
중국에 사는 우리 국민이 이렇게 급속히 늘어나고 있는 것은 지금의 일만이 아니라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에 중국의 동부 연안 지금의 강소성, 산동성일대에는 수많은 한국사람(당시 신라인)이 모여 살았다. 당시 장보고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와 해적을 소탕하고 바닷길을 정리한 덕택으로 재당 신라인들은 한반도와 중국과의 무역에 종사하며 비교적 여유 있는 생활을 영위하였다. 주요 뱃길이 닿는 곳에는 지금의 총영사관과 같은 신라관이 있었으며 신라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을 신라방이라고 불렀고 중국의 큰절에는 반드시 여행중인 신라스님이 유숙할 수 있도록 신라원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이러한 당시 중국동부 해안의 신라인의 생활모습을 자세히 기록해서 알려준 사람이 일본의 스님 엔닌이다. 불법을 구하려 했던 스님의 여행기로는 엔닌의 여행시기로부터 200년 전인 당의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大당西域記)와 100년 전인 신라스님 혜초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 있다. 그러나 앞서 두개의 여행기는 본인이 직접 쓴 것이 아니고 후에 구술한 것으로 신선한 현장 감각이 없다고 한다. 특히 신라스님 혜초의 기록은 중국 돈황석굴에서 탐험가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지만 본 여행기는 없어지고 필사 요약본만 남아있어 아쉬움을 더하고 있다.

엔닌이 부활시킨 해상왕 장보고

물론 이 두개의 여행기는 주로 인도와 서역에 대한 기록이지만 엔닌의 기록은 당시 중국 동해안에 거주하고 있던 신라인의 기록과 그가 다녀간 불교성지 및 당의 수도 장안에 대한 기록이다. 그가 하루 평균 32km를 걸으면서 기록한 내용은 마치 특파원의 현지 르뽀처럼 생동감이 넘친다고 평가받고 있다.
엔닌이 여행을 한 당시는 45세의 고령의 나이(지금으로 치면 60세쯤 되는 연령)에 일본에서는 고승으로서 이미 사회적으로 안정된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유학의 열정을 누를 수가 없었고 당에 와서는 불법체류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그 과정에서 신라인과 본격적인 교류를 하고 그 사실을 기록에 남긴 것이다.
엔닌이 가는 곳마다 현지 신라인은 친절하였다. 심지어 엔닌이 밤거리에 혼자 다녀 중국관헌의 불심검문을 받자 "나는 신라스님이오"하면서 뭐라고 신라말을 하였다고 한다. 당시 재당 신라인은 코뮤니티가 형성되어 중국 관헌도 인정하고 있었지만 일본인은 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중국 관헌은 "신라스님이라고? 신라말도 제대로 못하는걸. 이상한 스님도 다 보았네"하면서 통과시켜 주었다고 한다.
산동성의 위하이(威海)에서 멀지 않는 곳에 적산이 있다. 그곳에 법화원이라는 절이 있다. 이 절은 장보고가 무역활동을 통해 확보한 경제력을 배경으로 중국체류 신라인을 위해 건립하였으나 9세기 중반에 당의 폐불정책으로 폐사되어 이름만 남고 흔적이 없어졌다가 1988년에 다시 복원된 절이다. 법화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장보고기념관이 있다.
장보고는 우리 역사기록에서는 난신적자로 멸실된 부분이 많지만 '엔닌의 일기'에 의해 위대한 인물로 부활했다. 그는 딸을 왕비로 삼지 못해 불만을 품고 반역을 꾀한 정권욕에 눈이 어두운 사람이 아니었다. 미천한 신분임에도 당으로 건너가 수많은 고생 끝에 무예를 인정받아 당의 군인으로 성공하였고 후에 신라조정으로부터 청해진대사의 직함을 받아 해적을 소탕했다.
장보고는 한반도 서남해안의 해적을 소탕, 신라인이 더 이상 중국으로 노예로 팔려오는 일이 없도록 하고 중국에서 신라인이 무역으로 편안한 생활을 하도록 도와준 서민에게 친근한 일물이었던 것이다.

재중 100만 교민 시대의 민간교류

'엔닌의 일기'를 처음 세상에 알린 사람은 나중에 주일본 미국대사를 역임한 하버드대학의 라이샤워(E. Reischauer)교수였다. 라이샤워교수가 엔닌의 기록에서 처음으로 장보고의 활약상을 알게 되어 장보고를 9세기 서해를 중심으로 한·중·일 등 동북아해상을 제패한 "해상왕"이라는 칭호를 붙였다.
그 후 50년 후 Anami라는 미국부인이 엔닌의 기록을 따라서 일본(교오토→하카다)→중국 강소성(양조우)→산동성(赤山法華院)→산서성(오대산)→섬서성(서안)→강소성→산동성→일본(귀국) 등 엔닌이 9년간 밟았던 대장정 7500km를 직접 답사하였다. 5년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Anami부인은 최근 1200년의 시간을 뛰어 넘어 엔닌이 다녔던 길을 따라 답사한 기록을 현장의 사진과 함께 정리, 책자를 출간하였다. "Following Tracks of Ennin's Journey"가 그녀가 출간한 책이다. Anami부인은 지난달 글에서는 A부인으로 소개했던 사람으로 최근까지 주 중국 일본대사의 부인이었다.
우리나라에도 최인호의 '해신'이라는 소설 및 TV드라마로 장보고의 생애가 잘 알려졌고 '해상왕', '무역왕'으로 칭송되고 있다. 우리의 무역이 현재 7200억 미불로 전체 국민총생산의 70%를 차지하는 무역입국의 위치에서 장보고의 정신을 높이 사야할 때이다. 중국도 장보고의 정신을 평가하여 '왕도'라는 책명으로 '해신'을 번역 소개하고 있다. 엔닌은 신라인의 도움으로 유학을 할 수 있었고, 9년 후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던 고마움을 귀국 후 일본에 '赤山大明神'을 건립, 감사를 표시하기도 하였다.
흔히들 21세기는 아시아의 세기라고 한다. 아시아에서의 주역인 한·중·일이 과거의 어려운 역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 인식을 공유하면서 미래지향적 관계로 발전해야 한다.
9세기 엔닌의 기록에서 보듯, 오갈 데 없는 일본의 외로운 스님을 신라인이 도와 역사에 남는 훌륭한 일본인을 배출한 것은 오늘날 한·일간 민간교류의 규범이 되고 있다. 또한 9세기 중국이 신라인을 받아들여 자기나라처럼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과 같이 앞으로 100만에 달할 재중 한국인에 대해서도 중국정부의 배려가 필요한 때이기도 하다. 한·중·일 3국의 젊은이들은 1200년 전 엔닌이 걸었던 길을 같이 걸으면서 무역왕 장보고를 생각하고 당시 중국에서 더불어 자유롭게 살던 중국인과 신라인의 숨결을 느껴 본다면 하고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