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 도시 단둥의 밤은 휘황하였다. 늦은 시간 중련대주점(中聯大酒店)에 여장을 풀고 끊어진 압록강 철교를 내다보니 북한 쪽은 여전히 칠흑의 침묵 속이고 중국측 반쪽의 불빛만이 유난히 밝게 폭사되고 있었다. 6,70년대만 해도 상황은 정반대였다는데... 속절없이 담배를 빼어 물었다.
사실 6박 7일동안의 이번 출장길은 내게 각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낯설지 않은 단둥이고 여러 차례 밟아본 백두이지만 항상 빠듯한 일정을 핑계로 주마간산으로 지나쳐 왔고, 변경문제에 관심을 가져오면서도 북중 변경을'종주'할 기회는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역사학과 정치학의 대화를 화두처럼 되뇌어 온 내게 배성준 팀장과의 동행은 역사의 흔적을 발섭하며, 살아 움직이는 변경의 현실을 확인할 수 있는 참으로 귀중한 기회가 되었다.
압록을 거슬러 밟아간 역사의 변경
아침 일찍 길을 재촉해 압록강 하구까지 차를 몰아 중국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변경 개발의 실상을 한번 더 확인하였다. 야윈 북측병사가 런닝 셔츠 바람으로 도랑 건너에서 담배와 돈이 있느냐고 물어왔다. 오후에 배를 타고 압록강 물에 손을 담궜다. 물길을 잡아보았으나 잡히지 않았다. 흘러가는 역사를 보고 있으되 그 역사의 물길을 내지 못하고 있다는 무력감과 어린 동생같은 북한 병사의 모습이 흔들리는 물길 속에 흐트러져 갔다.
다음날 호산장성에 올랐다. 이곳은 고구려 박작성이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지만 최근 중국측에서 성을 개수하고 만리장성의 동단(東端)을 이곳까지 연장하고 있다고 한다. 망원경 속에 북한의 의주가 들어왔다. 의주 나루에서 중국으로 가는 배에 오르던 조선의 선비들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대국으로 끌려간 수많은 이 땅의 딸들을 회억하며 백사장 모래를 움켜쥐고 가슴을 쳤을까? 섬기는 대국의 자락으로 들어섬에 그저 가슴이 설레이기만 했을까? 한양의 옥좌에서 북방에의 꿈을 키우던 세종의 생각은 또 무엇이었을까?
성을 내려와 땅거미가 밀려오는 저녁에 나룻배를 타고 압록강 상류를 돌아보았다. 교과서 속에서 배웠던 중강개시, 북한의 국경 철책과 띄엄띄엄 보이는 감시 참호가 역사의 퇴행을 말해주는 듯하였다. 민망한 생각이 들어 차라리 어지러운 생각을 접기로 하였다.
다음날 집안으로 일정이 잡혀있었다. 중간에 태평, 수풍발전소와 조선족 마을에 들렀다. 한족 출신의 한 유지가 조선족박물관을 사비로 짓고 있는 현장에서 중국인의 두 얼굴을 보는 듯했다. 어둠속에 빗길을 달렸으나 자정 가까운 시간에 집안에 도착, 식당 문을 두드려 겨우 허기를 메웠다. 한·중대학생 교류프로그램을 인솔한 지인 교수와 어렵사리 전화를 연결하였다. 맥주잔을 들며 옛 얘기 속에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갑론을박하다가 새벽에 호텔로 돌아왔다.
조선의 백두여, 대한의 백두여!
녹녹치 않은 일정을 소화하며 이튿날 장백으로 출발하였다. 압록강 하구도 그러하지만 이곳의 강변도로도 선명하게 그어진 차선을 따라 깔끔하게 뻗어 있었고, 강안도 잘 정비되어 있었다. 아무리 도약기의 중국경제라지만 변경의 인프라에 상당한 비용과 공력을 들이고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북중 국경에 연한 내지 철도도 두 곳의 짧은 단절구간을 연결하면 조만간 개통될 터인데 건너편 북측은 여전히 감감 무소식이다.
백두를 대할 수 있다는 기대가 노곤한 심신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폭우로 인한 돌사태로 길이 막혀 하릴없이 차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가까운 촌락의 식당주인을 깨워 밥과 잠자리를 해결하였다. 장백을 8km 남겨둔 터이라 아쉬움이 컷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무협지의 인육 만두가 있을 수 있는 얘기라는 곤한 농담을 하면서 고량주로 객수를 달랬으나 중국인 주인은 의외로 친절하게 길 막힌 나그네를 받아주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던가? 백두산을 돌아보며 최근 중국측의 움직임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북중변계와 백두산에서의 중국측이 벌이고 있는 일련의 공세에 대한 현장 확인은 문제의 파악과 대책 수립에 학제적 관심이 중요하다는 확신을 더해주었다. 새로 뚫는 남파(南坡) 주변의 관광설비가 거의 마무리되고, 장백산 공항도 개장을 서두르는 듯 공사장으로 들어서는 트럭의 행렬이 뽀얗게 먼지를 일으키고 있었다.
백두의 '창바이'화라는 역사프로젝트가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북측은 쌀을 위해 중국에 휴게소 터를 내주었다고 한다. 주체의 공화국다운 기상천외의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대만 관광객을 환영한다는 남파입구의 현수막이 유난히 눈에 거슬렸다. 최근 백두산을 찾는 관광객의 80% 이상이 대만인들이라고 하는 데 백두산에 대한 양안의 협공에 단절과 갈등으로 응답하고 있는 분단의 현실이 안타까웠다.
변경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중국의 조치들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발전의 전략인가, 조선족 무력화의 일환인가? 연길의 지인들을 만나 생각을 들어보려고 했으나 도저히 틈을 낼 수가 없었다. 연길 역시 오밤중에 도착한데가 연길에서의 부산한 움직임으로 미루어 백두산에 대한 중국의 공세가 이미 연길 조선족사회에 그 파장을 미치고 있다는'떨리는'진동을 감지할 수 있었을 뿐이다. 위기에 처한 조선의 백두를 대한의 백두로 살려내야 한다는 중압감이 밀려왔다.
에필로그
압록에서 역사의 길을 묻고 백두에 와서도 다시 가늠할 수 없는 내일의 길을 찾아야 하는 노정은 만만치 않게 고단한 것이었다. 이 소란한 국경의 변화를 보고 돌아서며 아직도 "만주는 우리 땅"식의 회고적이며 자기기만에 빠져있는, 혹은 밀려오는 중국의 위세에 약자인 우리가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신종 모화주의의 체념에 젖어있는 나의 이웃들에게 어떠한 비변책(備邊策)을 말해 줄 것인가?
사실 압록에도 백두에도 우리의 길을 일러주는 안내자는 없었다. 아니 그런 기대는 애초에 허황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날쌘 몸놀림으로 카메라 앵글을 맞추어나가던 배팀장의 반짝이던 눈동자에서, 쇳소리 나는 중국어에 귀를 날카롭게 세우던 나의 안간힘 속에서 길을 찾는 것이 온당한 수순이 아니었던가? 요란한 개발의 굉음, 그 대안의 무서운 침묵사이의 엄청난 기압차는 얼마나 격한 역사의 폭풍을 예비하고 있는 것인가? 그 폭풍전야의 긴박함을 우선 알려야겠다. 다시는 이곳으로부터 역사의 좌절과 비극을 되풀이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파발을 숨차듯 띄워야겠다. 그리고 출장길의 필름을 되돌리며 역사학자의 천착과 정치학자의 고뇌를 퍼즐처럼 맞춰가며 변경에서 길을 찾기 위한 새로운 비변책을 만들어 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