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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나눔의 역사
  • 라종일 | 우석 대학교 총장
우석 대학교 총장 라종일

필자는 오래전부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인들이나 혹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는 국·내외 인사들에게, 적어도 이 지역, 즉 동북아에서 문화행사나 중요한 역사적인 행사들을 여러 나라가 함께 공동으로 개최해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는 의사를 피력해왔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 지역에서 오랜 세월 빈번한 접촉과 교류를 해온 나라들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어떤 업적이나 성취를 특정한 나라나 특정한 민족의 활동 결과로 보기보다는 지역 전체의 시각에서 보는 것이 여러 면에서 이점이 있지 않은가 한다. 현재의 상황은 나라들 사이에서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는 물론 그렇지 않은 사실들에 관하여서도 누가 먼저 이것을 시작 하였는가, 기원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도 논쟁이 많고 때로는 나라들 사이에서 갈등의 씨앗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오래 전 70년대의 이야기이지만 필자는 홍콩을 지나다가 우연히 송청의 전시회를 보고 몹시 감명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전에는 고려청자가 우리민족만의 고유하고 뛰어난 작품이라고 배웠고 그렇게 믿어 왔었는데 전시된 송청의 뛰어남이란 충격 같은 것이었다. 작품들의 규모나 다양함, 기예의 수월성들이 모두 평소에 고려자기에 대한 자부심에 상처를 낼 정도이었다.

한동안 혼란스러운 느낌이었는데 역시 우연히 책방에서 청자의 수집가로 유명한 곰페르즈의 소 책자를 발견하여 읽고 나서는 생각의 시각을 새롭게 할 수 있었다. 곰페르즈는 송청과 고려청자를 비교하면서, 한 편이 다른 편을 모방하는 한편, 새로운 기법을 개발하면 다른 편에서도 마찬가지로 방식으로 일면 상대방에서 배우며, 다른 한 면 새롭고 독특한 창작을 하면서 함께 발전하여 왔다는 것이다. 그는 이 과정을 "교류에 의한 풍요화(Interfertilization)"라고 불렀던 것 같다.

교류에 의한 풍요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한∙중∙일 3국의 문화적 업적에 관한한 곰페르즈 식의 설명이 적어도 한 번쯤 생각해볼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지역에서 교류의 역사는 시대에 따라서 친소의 차이가 있었을지언정 오랜 시간에 걸쳐 계속되어 왔고 이 과정이 대부분 근래에 도입된 이른바 근대 국가체제 이전에 일어났던 것을 고려해보면, 우리가 과거의 역사 이해에 지나치게 근대 국가적 의식을 갖고 접근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어떻게보아 어떤 업적이나 사실이 누가 먼저 시작했는가, 어느 나라 사람이 가장 중요한 기여를 했는가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이룩했다는 사실보다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어느 시대의 바른 역사의식이란 반드시 실증주의적 천착에 기반을 두는 것이 아니다. 누가 어떤 것을 먼저 시작했다거나 어떤 일을 이룬 것이 실은 자기 나라 사람이었다는 것 등이 민족이나 국가의 자존심에 그렇게 중대한 관심이 되는 것인지 의문이다. 필자의 생각에 이 지역에서 그래도 비교적 강대국 의식에서 자유로우며 열린 사회인 한국에서, 과거의 일들을 공동체적 시각에서 보며 실제로 그러한 운동이나 행사를 앞서 주관하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실은 이제부터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지난 세기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누구나 참담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른바'정치의 과잉비대'와중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사람들의 희생과 고통을 생각해보면 어떤 학자의 말대로 역사란 인간의 어리석음과 잔인함의 기록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한 가지 수많은 희생을 치루고 이룩한 것이 있다. 즉, 사상과 현실의 양면에서 모두 군국주의와 파시즘의 척결이었다.

그러나 이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는 방식은 구라파와 아시아에서 현저하게 다른 것 같다. 구라파는 모든 나라가 패전국일지라도 함께 이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행사를 한다. 반면에 이 지역에서는 나라마다 각기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이를 기억하는 것 같으며 그 의미는 대부분 좁은 민족주의적인 시각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특히 일본은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여야하는지 정리하지 못한 채 매년 이 사건을 기억하는 것 같다. 사람에 따라서"패전"인가""종전"인가," 굴욕"이었는가가"해방"이었는가 하는 것이 불가항력인지, 어떤면에서 보아 의도적인 면도 있는지 보기에 민망할 때도 있다. 때로는 오히려 일본이 희생자이었다는 주장도 나와서 당혹스러움을 넘어서 황당한 느낌도 든다.

바른 추론을 끌어내는 자원으로서의 역사

여타의 나라들, 중국과 남∙북한은 대개 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 종전을 일본의 침략에 맞서 이긴"승리의 날"로 기억하는것 같다. 그러나 이 사건에는 각기 나라별로 민족주의적인 의미 밖에는 없는 것인가. 피와 힘의 논리만을 믿는 파시스트 군국주의자들은 우선 전장에서 패퇴시켜야 했다. 그리고 이 면에 있어서, 구라파에서는 구소련이, 아시아에서는 미국이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종전의 의의는 군사적인 승리에 그치는 것인가.

필자는 제국주의 시대에 일본에서 한국의 독립 운동가들을 변호하면서, 심지어 가족들에게도 소외당하면서 거의 일생을 희생한 후세 변호사 같은 분을 기억한다. 필자는 그 유족들에게 뒤 늦게나마 한국 정부의 훈장을 추서하면서," 후세 변호사야 말로 한국의 친구이기 전에 일본의 진정한 애국자"라는 연설을 한 일이 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일본의 중요 일간지가 이 말을 그대로 보도한 것을 보고 인상을 받았던 일이 있다. 어찌 후세 변호사뿐이겠는가. 우리가 잘 기억 못하는 많은 일본인들이, 이념적인 종교적인 혹은 박애주의적인 여러 가지 소신으로 우리들 못지않은, 어쩌면 자기네 나라이기 때문에 더 어려운, 투쟁으로 군국주의에 맞서 싸웠다.

이제 8∙15의 기억을 한 차원 더 끌어 올려서 승전이나 패전이 아닌 억압과 침략에 맞선 우리 모두의 승리의 날로 이 지역의 모든 나라가 함께 기억할 수는 없는가. 필자는 수년전부터 내외의 여러 사람들에게 이것을 권유해 보았다. 일본의 유력한 정치인 한 분에게 이 이야기를 꺼냈었는데, 감정적인 반응뿐이었고 아무런 합당한 논리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한심하게 느낀 일도 있다. 그러나 얼마 전 우리 일간지에 신진 정치학자 한 분이 매우 설득력 있게 같은 주장을 편 글을 보고는 기쁘게 여겨 격려의 전화를 한 일도 있다. 역사는 반드시 사람 사이에서 갈등의 불씨가 되지 않고, 무지와 혼란의 기록에서 바른 추론을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자원도 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