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회 '역사NGO 세계대회'가 10월 8일부터 12일까지 닷새간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파크텔 일원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린 '역사NGO 세계대회'는 이 같은 성격의 대회로선 세계 최초·유일의 대회라 할 수 있다. 일반 NGO들의 국제 대회는 심심찮게 열리지만 '역사NGO'라는 특정한 타이틀로 국한한 것은 처음인 것이다. 이는 곧 동북아에서 역사적 갈등이 얼마나 심각한 지를 방증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 같은 역사적 갈등은 정부 차원에서 쉽사리 해결할 수 없는 난제다. 제각각 국익을 추구해야 하는 각국 정부로선 첨예한 역사·영토 문제에서 쉽사리 물러설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비록 논리적 정당성이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자국민의 정서를 고려, 보다 강경하게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 각국 정부의 처지다. 동아시아 각국이 '일국사의 차원'을 벗어나 지역적 차원에서 문제에 접근하기란 아직 요원한 일처럼 보인다.
학계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학문적 엄밀성을 추구해야 하는 학자의 입장에선 상대방의 입장도 고려해야 하는 '협의'가 있을 수 없다. 상대가 있다고 해서 역사학자가 어떻게 역사적 사실에서 물러설 수 있겠는가. 이는 곧 학자이기를 포기하라는 말과 같다.
따라서 동북아의 역사·영토 갈등을 해결하는데 가장 적임자는 역사NGO라고 할 수 있다. 시민사회를 기반으로 한 역사NGO들이 한 자리에 모여 서로 진솔한 대화를 나눌 때 보다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고, 모종의 합의점을 찾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점에서 '역사NGO 세계대회'는 시의적절할 뿐더러 앞으로도 계속 확대, 발전해야 할 대회라고 하겠다.
역사 갈등 해결의 적임자는 역사NGO
이와 관련, 박원철 대회 조직위원장은 "각국 정부와 학자 등이 역사 갈등 해결에 일정 부분 역할을 하고 있지만 시민사회는 또 다른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다"며 "각국의 역사NGO들이 한자리에 모여 치열한 논의를 거쳐 뜻을 모은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대회 의의를 소개했다. 박 위원장은 "한·중·일간의 역사 갈등, 영토 갈등이라는 걸림돌이 동북아의 평화를 가로막고 있고, 3국의 교류 및 협력에 심각한 장애가 되고 있다"며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각국 NGO들 간의 국제적인 연대와 시민사회의 활발한 교류활동이 필수적 이라고 강조했다. 박 위원장은 또 향후 '역사NGO 세계대회'가 확실하게 자리매김한다면 한·중·일이 돌아가면서 대회를 개최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동아시아 역사화해를 위한 세계시민사회의 역할'이라는 대주제로 진행된 올해 대회는 보다 세부적으로 ▲패권적 군국주의, 배타적 민족주의, 팽창주의 극복 ▲인간 중심의 전쟁 기억과 역사 인식 ▲평화교육과 역사교육의 통합을 통한 역사 화해 추구 등으로 주제를 나눴다. 한마디로 역사 기억을 둘러싼 오해와 갈등에 대해 시민사회가 국제적 협력을 모색하고 대안을 추구해보겠다는 취지라고 볼 수 있다.
국내외 23개국 400여명의 학자와 전문가, 비정부기구(NGO) 활동가들이 참가해 치러진 이번 대회에서는 특히 한·중·일 등 동북아 3국의 역사·영토 갈등 해결을 위해 각국의 시민사회단체가 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켰다. 공동대회장을 맡았던 아라이 신이치(荒井信一) 일본 스루가다이(駿河臺)대 명예교수는 9일 열린 개회식에서 '동아시아 역사화해를 위한 세계시민사회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기조강연, "각국 정부의 프로젝트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민간 차원에서 벌어지는 역사 인식 공유를 위한 다양한 시도가 충분히 활성화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열린 개막 심포지엄에선 왕시량(王希亮)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사회과학원 교수의 '역사기억을 통한 미래세대 교육', 존 W 맥도널드 미국 멀티트랙 외교연구소 대표의 '영토·영해 갈등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의 역할', 균터 자토호프 독일 "기억, 책임 미래재단" 사무총장의 '국가, 기업 및 시민사회의 역사적 책임', 가오진 쑤메이(高金素梅) 대만 입법위원의 '대만 원주민 여성으로서 전쟁의 기억과 역사인식' 등이 발표됐다.
가오진 위원은 "현재 48만여 명에 이르는 대만 원주민의 역사는 거의 묻혀 버렸다"며 "교육현장은 물론 역사책에서도 이들의 역사를 제대로 다루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대만 정부는 대만의 피식민화의 역사, 특히 원주민 역사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다"며 "따라서 원주민의 후손들은 자기 민족의 역사, 심지어 60여 년 전 전쟁의 참상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고 분개했다. 한국 측 강연자로 나선 정현백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는 "내 안의 제국주의, 팽창주의, 민족주의를 넘어서야 한다"고 밝혔다.
23개국 400여명 참여, 역사 갈등 해소 실질방안 논의
이밖에 '인간 중심의 전쟁기억과 역사인식' 등 모두 6개의 주제심포지엄이 올림픽파크텔에서 진행됐다. 또 18개의 세션으로 나눠 진행된 다양한 포럼이 대회의 열기를 고조시켰다. 이 가운데 10일 열린 '동북아 영유권 분쟁 및 역사 갈등 해소' 세미나에서 일본 측 발표자로 나선 호사카 유지(保坂祐二) 세종대 교수는 "일본의 독도영유권 논리는 주로 국제법적 영토 영유이론을 바탕으로 역사적 사실을 결합시켜 만들어진 것"이라며 "그러나 일본의 주장은 현재 상태로도 모두 논박이 가능하며, 앞으로 한국은 독도 영유논리를 체계화해 세계의 주요 국가와 주요기관 등을 설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대회의 가장 큰 성과로는 무엇보다 민간 주도로 역사 갈등 해소를 위한 실질적인 논의가 진행됐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각국에서 참여한 학자와 활동가들은 자신들의 역사적 경험을 털어놓으면서 상대의 역사적 경험 또한 새롭게 이해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미얀마 이주노동자들이 만든 단체인 "버마행동"은 '버마 민주화를 위한 한국의 역할'에 대한 세미나와 워크숍을 진행했다. 또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동아시아 국가들의 내부사정과 NGO단체들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리도 마련됐다.
대회에 참가한 청소년들의 열기도 뜨거웠다. 세션 중 하나인 '청소년 역사체험 발표대회'에 참가한 김영훈(공주 한일고)군은 "학교에서 역사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보다 뜻 깊은 경험을 하고 싶어 이번 대회에 참가했다"며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 또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서로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정말 좋았다"고 밝혔다.
자원봉사자로 대회에 참여한 홍동화(한국외대 중국어과)씨도 "모든 사람이 평화를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는 것이 오랫동안 추억으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회에 참여한 일반 시민들 역시 각국 참가자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번 대회의 의의를 높이 평가했다. 박원철 조직위원장은 "동북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선 정부뿐만 아니라 민간 차원에서 지속적인 교류 활동을 펼쳐야 실질적인 성과를 끌어낼 수 있다"며 "이번 대회를 통해 각국의 시민사회가 서로의 역사적 경험을 나누는 것을 넘어 향후 함께 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보다 굳건히 다질 수 있었다"고 대회 성과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