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3일 세계적으로 유명한 싱크탱크들이 밀집해있는 워싱톤 디시의 매사츄세츠 애비뉴. 그곳에 있는 존스홉킨스대학 부설 미국현대사연구소의 릴리 가드너 교수를 찾았다. 금발의 단발머리 그녀와의 인터뷰는 뒷맛이 상쾌했다. 독일의 과거청산 문제에 관한 해박한 지식과 다양한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는 전문가인 그와의 인터뷰 또한 매우 진지하고 생산적이었다.
Q.양: 선생님 또 만나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최근 동북아 역사갈등에 대해서 알고 계시는지요?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네요.
A.릴리: 나는 단지 연구자로써 독일과 관련된 다양한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갈등의 유사성과 차이성을 보면서 갈등의 본질을 인식하고 있지요. 나는 공동의 역사인식에 기반을 둔 공동의 이해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에 대해 확신이 없어요. 왜냐하면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방식과 방법이 있고, 그런 점에서 역사는 관계로 표현되지요. 내 기본적인 생각은 갈등에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있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가해자에 의해 규정될 수 없고 피해자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포스트 모던적이지 않죠. 예를 들어볼까요? 독일과 관련되어 체코공화국, 폴란드, 이스라엘과는 오늘날까지 역사에 대한 논쟁이 있고 그것은 관계성의 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거기에는 일종의 역사를 취급하고 있는 관계성에 대한 메카니즘이 있는 거죠.
Q.양: 선생님이 하시는 독일과 유럽과의 역사화해와 비교해서 동아시아 역사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역사화해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A.릴리: 네. 양자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지요.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독일사례는 매우 유용한 교훈을 동아시아에 줄 거라고 봅니다. 홀로코스트문제는 매우 독특하지요. 그러나 독일이 과거문제를 다루거나 화해의 관계를 만들어낸 메카니즘과 제도들은 아시아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봅니다. 왜 독일 사례일까요? 그건 가장 오래되고 가장 포괄적인 화해의 사례이기 때문이죠. 국제적인 시스템 속에서 이같은 사례는 없었지요. 참 흥미롭게도, 많은 사람들이 독일의 외교정책 하에서의 화해에 관해 쓴 글이 별로 없어요. 내가 진행하는 특별한 작업에는 네 가지 요소를 포함하고 있어요. 역사, 제도, 리더십, 국제적인 상황입니다. 나는 단지 단층적인 측면에서 네 가지 요소를 보지 않아요.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오늘날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역사는 과정이죠. 다른 말로 하면 역사는 파노라마이지, 한 컷의 스냅사진이 아니에요. 그런 점에서 내 궁극적인 목적은 보편성을 획득하는데 있어요. 화해를 말하는데는 두 가지 개념이 있죠. 하나는 영적이고 감정적이고 심리적인 화해이고, 다른 하나는 물질적인 화해입니다. 영어로 화해는 단 한가지로 쓰이지만 독일 사례를 연구하면서 나는 두가지의 개념을 얻으려고 노력한답니다. 나는 내 작업이 일종의 틀거리(template)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상적 비전만이 아닌 매우 실제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Q.양: 독일 사례를 동아시아에 적용하는 것이 긍정적인가요?
A.릴리: 내가 연구하고 있는 다양한 화해의 틀을 아시아에서 취급하는 것은 가능하리라고 봐요. 작년에 내가 한국에서 열린 심포지엄에 갔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게 우리가 찾고 있는 거라고 이야기하더라고요. 내가 알기에 일본은 독일과 비교해볼 때 화해의 과정의 시작단계에 불과합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요. 이건 단지 진상규명만을 위한 틀거리는 아니지요.
내가 볼 때 한국은 두가지 중요한 요소를 가지고 있어요. 하나는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엔지오들이고, 또 하나는 정부 역시 과거의 슬픔을 일본정부가 공식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요구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매우 다면적인 과정과 오랜 기간이 걸린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그런 일이 곧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 긍정적인 것은 아니죠. 내 연구를 통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당신은 매우 실제적이어야만 한다는 점이예요. 너무 이상적인 비젼, 즉 완벽한 평화의 상태만을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거죠. 완벽한 조화란 어려운 일이예요. 계속 논쟁이 있을 거구, 반대편이 나올 수 있죠. 초점은 역사적으로 가지지 못했던 이러한 차이점들을 포함할 수 있는 구조(framework)를 가져야 한다는 점이예요.
Q.양: 역사화해를 위해 정부와 엔지오, 정책전문가들이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시나요?
A.릴리: 나는 모두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만약 이들이 없다면 역사화해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각각 다른 단계에서 연관되어질 거예요. 특히 비정부 영역은 시작단계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종종 화해를 위한 촉매역할을 합니다. 또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관계를 맺기를 원한다고 말할 수 있는 정부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국면을 만들어갈 수 있는 활동가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필요합니다. 비전을 가진 리더(visionary leader)와 정부 리더(governmental leader), 그리고 사회적 리더(societal leader)들이 필요하죠.
Q.양: 최근 동아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공동역사교과서 출판과 한일간의 활동 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A.릴리: 독일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많이 다른 것 같아요. 그러나 좋은 출발점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최근 출판된 한중일 공동역사교재는 부교재라는 차원에서 독일과 프랑스의 교과서와는 차이점이 있지요. 한중일 엔지오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이 하고 있어요. 모멘텀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봐요. 그런 점에서 독일사례는 교훈을 주지요. 만약 독일이 화해와 복원을 하지 않았더라면 유럽에서 오늘날과 같은 리더가 되지 못했을 거예요. 일본은 이 문제를 다루지 않는 한 아시아에서 리더가 아닙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독일이 60년전에 이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있겠어요? 나는 바로 이것이 화해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미국 내 풀뿌리 조직, 정부관계자와의 연계 필요
Q.양: 전후 처리에 관해 일본과 독일은 어떻게 다른가요?
A.릴리: 전에 일본 관리를 만났는데 그는 샌프란시스코조약에서 이미 법적인 문제로 취급했다고 말하더라고요.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독일의 경우 홀로코스트 당시 이스라엘은 법적인 국가가 아니었으므로 독일은 홀로코스트에 대해 해결할 의무가 없었죠. 실천적인 측면에서 단 하나의 문제가 있다면 그건 도덕적인 의무라는 점이죠. 그래서 독일은 법 적인 틀에 구애받지 않고 화해를 위해 해야만 할 일을 해온 것이죠, 특별히 재정적인 측면에서 말이죠. 1985년 비트부르그(Bitburg)국립묘지에서 서독의 콜 수상과 레이건 미 대통령이 화해를 위한 성명를 발표했습니다. 비트부르그 국립묘지는 나치 지도자들이 묻혀있는 것이기에 야스쿠니 신사가 유사한 점이 있죠. 이때 미국에서 유대인 조직만이 아니라 미국 2차세계대전 참전용사로부터 굉장한 반발이 있었어요. 그후 레이건은 계속해서 그곳을 방문했고 콜 수상은 다시는 이같은 일은 하지 않았어요. 콜 수상은 많은 것을 배웠어요. 비트부르크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알아야 하는거죠. 홀로코스트는 매우 독특한 것이었어요. 그러나 독일이 과거에 직면하고 해결해가는 메카니즘을 일본에 적용해볼 때 매우 유용합니다. 이건 끝이 없는 오랜 과정이 필요합니다. 화해는 마무리될 수 있을까요? 나는 결코 마무리될 수 없다고 봅니다. 화해는 우정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편을 굴복시키는 것도 아니며, 우리의 이익을 포기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죠. 우리는 좀 더 건설적인 방식을 발전시켜야만 합니다.
Q.양: 한국정부나 엔지오에게 어떤 제안 같은 게 있나요?
A.릴리: 미국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풀뿌리조직이나 정부에서 일하는 사람을 좀 더 연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USIP(미국 평화연구소)는 매우 이 문제에 유용할 것 같아요. 나는 미국에서 한중일 삼자 대화를 함께 이끌어내야 하리라고 봅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미국은 독일의 성공적인 이야기를 곧 미국의 성공적인이야기로 만드는데 관심이 있습니다. 내년 2009년은 독일이 화해로 이끌어낸 60주년이 되는 해이기에 이와 관련되어 어떤 것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Q.양: 작년 미 하원의원에서 채택된 위안부 결의안은 효과가 있다고 보시는지요?
A.릴리: 독일의 경우 하원의 결의안이나 상원의 편지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독일정부가 지난 20년동안 변화를 모색하려고 하지 않았을 때 말이죠. 미국의 비정부 기구로서의 미국에 사는 유대인 그룹은 이슈를 부각하고 지속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죠. 특히 국제적인 이슈로서 이끌어 올리는데 동유럽의 유대인들이 중심축을 담당했죠. 미국 유대인 그룹은 주로 미국의 정치적인 국면을 이 문제와 결부하는 것을 조직적으로 해왔죠. 매번 콜 독일수상은 클린턴 미국 대통령에게 이야기해왔고, 클린턴의 주요의제 중의 가장 중요한 것으로 독일문제를 상정했죠. 내가 알기에 미국 유대인그룹은 1980년대 초반에 활동했는데, 독일의 엔지오들과 독일정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하게 되었지요. 독일수상이나 외교부장관을 만나고 싶다면 전화는 언제든지 열려 있었습니다. 참 좋은 관계였죠. 미국 내의 조직과 동아시아 각국의 조직들간의 연대가 필요하고 여기에 일본 그룹의 결합도 중요하지요.
Q.양: 선생님, 장시간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인터뷰는 미국인 연구자 로버트 파 박사와 함께했다. 릴리 교수와의 인터뷰를 한 후 마음이 뿌듯했다. 역사화해를 위한 엔지오의 역할을 독일의 사례를 들어 진지하게 소개해주는 그의 따뜻한 마음과 열정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독일과 이웃나라의 화해를 향한 각종 연구를 통해 그는 동아시아가 정말 화해의 길로 나갈 것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