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웠던 여름이 물러가고 제법 시원한 바람이 느껴지던 지난 9월 29일, 동북아 역사재단의 대회의실에서는 사뭇 긴장된 분위기의 국제회의가 시작되었다. 'Divided Memories'? '분단된 기억'? 이 무슨 해괴한 제목이란 말인가! '분단된 조국'은 들어봤어도 기억이 분단되다니! 행사의 진행을 맡은 필자는 차라리 '기억의 차이'라는 번역을 선택했다. 60여 년간 좁혀지지 않은 남북분단의 기억 때문인지 '분단'은 치유되기 어려울 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 그래도 희망 섞인 표현이 좋을 것 같았다. 2차대전을 전후한 시기의 역사서술을 비교분석하는, 소위 '역사문제'의 핵심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기회였으며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를 주제로 한 만큼 상대방 국가의 역사기술에 대한 공격이 예상되었다.
"Divided Memories and Reconciliation"이라는 프로젝트는 스탠포드 대학의 쇼렌쉬타인 아시아-태평양 연구소(APARC)가 2007년부터 3년에 걸쳐 수행하도록 연구계획을 세운 것으로 한국의 동북아 역사재단, 일본의 국제교류센터(JCIE), 중국의 북경대학, 그리고 대만의 Academia Sinica의 아태지역 연구센터를 국제 연구 파트너로 삼고 있다.
1차 년도에는 한국, 미국, 중국, 일본 그리고 대만의 고등학교 역사교과서가 중·일전쟁부터 2차 세계대전까지 전쟁을 어떻게 기술하고 있는지를 비교분석하는 것이 목적이다. 2차 년도에는 이들 5개국에서 동 기간 중 관련사건을 다룬 인기영화의 상호비교를 통해 대중의 인식형성을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한국의 '태극기 휘날리며', 미국의 'Tora, Tora, Tora', 일본의 'Burmese Harp' 중국의 'Devils on the Doorstep' 등의 영화들이 대상이 될 계획이다. 3차 년도에는 교육, 대중문화 및 예술을 통한 역사에 대한 인식형성이 엘리트 여론형성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고자 한다. 그 첫해 연구의 결과물들에 대한 각국의 feedback을 수렴하는 것이 이번 국제학술회의의 목표였다.
역사교과서에 나타난 동북아 국가들 사이의 기술의 차이는 역사가 국가정체성을 확립하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는 점과 민족주의를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는데 근본적 원인이 있다는 분석에 스탠포드 측 참가자들(Shin Giwook, Peter Duus, Daniel Sneider) 뿐 아니라 일본(Mitani Hiroshi)과 한국(정재정, 장세윤, 김지훈) 참가자들이 동의하고 있었다. 또한 역사교과서의 많은 부분이 자국의 입장만을 고려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자국의 학자들에 의해 지적되었다(Li Weike, 정재정, 박태균, Mitani Hiroshi). 반면, Tohmatsu Haruo는 원폭투하, 강제노동, 난징대학살 등 7개의 주제에 대한 기술을 비교하면서 일본의 교과서가 가장 객관적으로 기술되었음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의 교과서는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사실만을 나열하고 있다는 반론이 제기 되기도 하였다. Daniel Sneider 교수는 동북아에서의 역사논쟁은 동북아에 지역주의 공동체 형성을 향한 움직임이 구체화될수록 당분간 거쳐 갈 수밖에 없는 과정일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결국 서로 입장을 바꾸어 역사를 본다면 공유하는 사실들에 대해 훨씬 더 많은 부분 공감할 수 있는 기술이 될 것이라는 점에 모든 참가자들이 동의하였고 역사교과서 문제의 해결점으로 제시되었다. 그나마 낙관적이라는 사실에 참가자와 토론자, 방청객 모두 웃으면서 회의를 끝마쳤다.
그런데 학회를 마무리하고 회의장 정리를 하는 동안 떨칠 수 없는 의문이 있었다. 이들이 얼마나 자국의 다양한 시각을 대표하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