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소 다로 전 자민당 간사장이 얼마전 일본 총리에 선출된 외신을 보고 난 우리 외조부가 떠올랐다. 좀 엉뚱할 수도 있겠다. 아소 다로의 총리 취임과 우리 외조부와 무슨 연결 고리가 있다는 소린가? 아소 다로의 외조부인 요시다 시게루가 전직 총리였다. 아소 다로 가문은 후쿠오카 지역에서 탄광을 경영하여 큰돈을 벌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탄광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강제적으로 조선에서 끌려온 노동자들이었다. 한마디로 아소 탄광은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을 착취하여 큰 부(富)를 축적했다는 말이다. 그렇게 축적된 돈은 지금의 아소 다로가 총리에 선출될 수 있게 받쳐준 든든한 자금줄이 되었다고 한다.
나의 외조부께서도 탄광에서 일을 하셨다. 일본은 아니었다. 남부 사할린이었다. 그렇다. 외조부께서도 사할린에서 강제노동을 하셨다. 외조부께서 남부 사할린의 탄광에서 중노동을 강요받았을 때는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른 1944년이었다. 죽도록 고생하셨다고 한다. 매질도 엄청 심했다고 한다. 그렇게 외조부의 노동의 새벽은 혹한의 이국땅에서 일제에 의해 철저히 짓밟혔다.
러·일전쟁 승리로 북위 50도 이남, 남부 사할린을 통치한 일본은 섬의 풍부한 지하자원을 신속히 전쟁에 이용하기 위해 조선인들을 강제로 끌어들였다. 1945년 일본은 항복했고, 소련군이 해방군으로 남부 사할린을 점령했다. 그런데 사할린 땅의 조선인들은 이전부터 일본인들에게는 소련의 스파이로, 반대로 소련인들에게는 일본의 스파이 취급을 당했다. 외조부는 포로가 아닌 일제의 앞잡이로 취급받고, 그들에게도 매질을 당하셨다고 한다. 결국 외조부께서는 일본을 거쳐 해방 이듬해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실 수 있었지만 빈털터리였다고 하신다. 젊은 날의 외조부는 그렇게 짓밟혔으나 한·일청구권에 막히고, 일본측의 무성의에 막혀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하시고 세상을 등지셨다.
아소 다로는 총리 취임 이전에 "창씨개명은 조선인 스스로가 했다"라고 하는 등 한국인들에게 비수를 꽂는 망언들을 여러 차례 했었다. 또 얼마 전에는 그간 금기시되어 온 '대동아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렇듯 현재 아소 다로 총리의 행보는 주변국들의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전임 후쿠다 내각 덕분에 주변국들과의 외교가 긴밀해진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아소 총리의 행보는 그런 외교 강화를 한 번에 뒤엎자는 이야기가 아닌가? 가뜩이나 독도문제로 한국 사람들의 심기가 상당히 불편해있는데 그런 발언들은 사태를 더욱더 꼬이게 만들 뿐이다.
조선인 강제징용으로 탄광을 경영하여 큰돈을 벌고 그것을 발판삼아 일본 최고의 권좌까지 오른 아소 다로 총리가 그런 발언들을 할 때마다 당혹스러울 따름이다. 아소 총리가 우리 외조부처럼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에 대한 작은 배려와 관심만 있었어도 그런 발언들은 쉽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강제징용으로 인해 병을 얻어 돌아가신 나의 외할아버지. 기억조차도 가물거리는 나의 외조부. 외할아버지가 그리운 가을날이다.
독자투고 모집
※보내실때제목에'독자투고'명기
재단 뉴스레터'동북아역사재단뉴스'에서는 독자투고를 받아 매월 1편씩 선정해 싣습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
주제_ 역사 관련 자유 주제 분량_ 200자 원고지 8~9매 보내실 곳_ prdivision@historyfoundation.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