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약 1세기 우리 민족은 평탄한 삶을 살지 못하였다. 한말 외세의 압박에 시달리다 급기야는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35년 동안 질곡의 생활을 하였다. 광복후에도 남북분단과 6.25를 거치며 냉전의 최일선에서 민족 간의 대립이 극심하였고, 아직도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자연 과거의 역사에서 비롯된 오늘의 현안이 적지 않다. 간도 문제 역시 그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금년은 간도협약 체결 100주년을 맞는 해이다. 역사 속 간도문제의 발단은 1712년 숙종 때 세워진 백두산 정계비의 해석으로부터 비롯된다. 당시 정계비는 조청 국경을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으로 한다고 규정하였다(西爲鴨綠, 東爲土門). 19세기 말 간도지역의 조선인에 대한 관할문제가 불거지자, 조선과 청은 다시 감계회담을 개최하였다. 당시 조선의 이중하는 토문강이 곧 두만강이라는 청의 주장에 강력히 반발하여 국경을 합의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만주에서의 이권 확보를 위하여 1909년 간도협약을 체결하며 두만강을 조청 국경으로 합의해 주었다고 한다. 이상은 일반인에게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국내의 많은 사람들은 간도협약으로 인하여 "우리 땅 간도"를 상실하게 되었다고 안타까워한다. 역사적으로 간도는 주로 조선인들이 개척한 땅이고, 백두산 정계비에도 두만강이 아닌 송화강의 지류 토문강이 국경으로 되어 있고, 무효인 을사조약을 통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제가 자의적으로 남의 영토를 처분할 수는 없다는 등의 근거를 제시하며, 간도 회복의 당위성을 주장한다. 특히 무효인 국경조약도 100년을 지나면 시효가 완성되므로 2009년을 넘기지 말고 우리 정부가 간도협약의 무효를 선언해야 한다고 재촉한다. 과거 국회에는 간도협약 무효 확인 결의안이 몇차례 제출되기도 하였다.
간도 회복을 주장하는 분들은 간도협약을 가장 큰 장애물로 생각하고, 이의 국제법적 무효 확인이 최대의 과제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과연 그러할까? 바로 이 점부터 역사적 실적을 중시하는 시각과 법학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시각 사이에 차이가 생긴다.'
간도 문제를 둘러싼 쟁점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몇 대조 조상이 개척하여 대대로 가꾸어 온 토지가 있다. 이후 후손들은 그 땅을 떠나지 않았고, 조상 묘소도 모두 그곳에 썼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든 현재의 소유주가 그 땅을 제3자에게 팔아 버렸다. 그것도 시세보다 매우 싼 값에. 일가친척들은 조상 묘소 터까지 팔았다고 야단하며, 몇 백 년 지켜온 터를 그렇게 넘길 수 있냐고 한탄하였다. 일가중 한 사람이 조상의 땅을 되찾겠다고 나섰다고 하자. 그가 이 땅은 조상 대대로 우리 가문의 터전이었다는 역사적 연고를 강조한다면 소용이 있을까? 법적 권리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가장 최근의 사실부터 과거로 역순으로 올라가야 한다. 즉 현재의 소유권이 유효하게 성립되었는가부터 검토하여야 한다. 그래서 권리의 유효성이 확인된다면 과거 아무리 탄탄한 역사적 연고가 있더라도 더 이상 법적 권리를 주장하기 어렵다.
간도 문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간도협약의 무효만 확인되고, 나아가 정계비상의 토문강이 오늘의 두만강이 아님이 입증된다고 우리의 영유권이 확인되지는 않는다. 간도 영유권에 관하여 더욱 결정적인 문서는 1962년 북한과 중국이 체결한 국경조약이다. 당시 북한과 중국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합의하고 간도는 중국 령임을 인정하였다. 국제사회에서 북한이 독립 주권국가임은 의심받고 있지 않으며, 그런 북한이 자신의 국경조약을 체결할 권한이 있음은 물론이다.
이 국경조약이 있는 한 간도협약의 유무효나 백두산 정계비의 해석 또는 조선인의 개척실적 등은 거론의 큰 의미가 없다. 이에 대하여는 우리가 북한을 흡수 통일한다면 북한의 조약을 인정할 필요 없다는 주장을 펴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유효하게 성립된 국경조약은 국가승계의 형태와 상관없이 계속 효력을 유지한다는 것이 국제법상의 원칙이며, 이에 입각한 국제 판례도 적지 않다. 통일의 형태가 흡수통일이든 합의통일이든 북한이 체결한 국경조약의 효력을 뒤늦게 부인하기는 적어도 국제법적으로는 어렵다. 제반사정을 감안할 때 간도협약의 무효와 간도 영유권의 회복은 적어도 법적으로는 직결되어 있지 않다. 또한 적어도 조선 중기 이후 조선 정부가 두만강과 토문강을 같은 강으로 인식한 역사기록도 적지 않다는 점 역시 객관적으로 외면하기는 어렵다.
근래 상황에 대한 연구가 더 중요
이러한 입장에서 의견을 피력하면 인기도 없고, 역사학 전공자나 일반 국민으로부터 종종 역사의식이 부족하다는 공격을 받는다. 여하튼 간도는 우리 조상이 땀 흘려 일군 땅이며, 간도협약 체결 당시 주민의 다수가 조선인이었음을 강조하며 회복의 당위성을 주장하여야 박수를 받는다. 물론 무슨 이유에서든 중국이 대가 없이 선선히 양보한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럴 가능성이 과연 1%라도 있을까? 우리끼리의 역사의식에 충실하기 위하여 국제사회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주장에 마냥 박수를 칠 수는 없다. 결국 법학자가 할 일의 하나는 양국 간에 합의가 되지 않아 국제법정으로까지 간다면 어느 정도의 승산이 있는가를 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외교 전략도 이를 바탕으로 짜야 한다.
독도 문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국내에서는 독도 영유권의 확인을 위하여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오래 전부터 독도라는 섬을 알고 있었는가를 입증하는데 주력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국제법정에서는 그러한 고기록이 생각만큼 큰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고기록이란 특성상 그 해석을 위하여 각종 추론을 더해야만 하는 경우가 많고, 일방적 기록이 대부분이며, 종종 자체 모순인 내용도 많기 때문이다. 독도의 경우도 수백전의 고기록보다는 비교적 근래의 상황에 대한 연구가 더 중요하다. 국제무대에서는 역사의식을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으며, 현재 누가 더 강한 권원을 확립하고 있는가를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국제법상 "시효 100년"이라는 주장은 특별한 근거가 없다는 점을 첨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