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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소식
기억과 망각을 넘.어. 소통과 평화를 향.하.여.
  • 박찬식 제주4·3연구소장
행사이미지

2008년 무자년이 저물어가는 12월 21일부터 24일까지 부산에서 의미 있는 국제학술회의가 개최되었다. 동북아역사재단과 창원대 경남학연구센터가 한·중·일·대만의 전문가와 학자들을 초청해 동북아평화벨트 구축을 모색하는 발표·토론의 자리였다. 특히 평화벨트 구축을 위한 주요 방법으로서, 한·중·일의 전쟁유적 및 기념관 등을 재해석함으로써 평화의 역사적 초석으로 삼고자 하는 취지가 이 학술회의에서 주로 논의되었다.

부산국제학술회의

19세기 동북아시아가 근대 세계체제에 편입된 후 각국은 모더니티를 최상의 가치관으로 여기며 부국강병과 문명개화를 주창했지만, 그 결과는 역설적으로 전쟁과 식민지배의 피해로 얼룩졌다. 한 나라의 강성함이 다른 나라에 우호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20세기 중반까지 지배와 억압의 시대로 귀결되었다.

21세기 세계화시대를 맞이하여 동북아는 비약적인 물질 문명의 성장을 하고 있고, 한·중·일 삼국의 상호관계가 더욱 긴밀해졌다. 하지만 삼국의 정치적·문화적 갈등과 충돌은 해소되지 못한 채'역사기억의 전쟁'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각국의 역사와 전쟁에 대한 기억과 기념을 상호 대화를 통해서 바로 잡고 해결하지 않으면 국가 패권만을 강조하던 과거로 회귀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있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 개최된 이번 학술회의는 동아시아 각국에 산재해 있는 전쟁유적이나 기념관 등을 중심으로 삼국 사이의 전쟁 및 평화에 대한 상이한 견해를 확인하고, 이를 평화의 초석으로 만들어 가는 다양한 방안에 대한 발표·토론의 장이었다. 한·중·일 삼국이 전쟁유적·기념관·기념물 등에 대해 동일한 해석과 평가를 당장 공유하지는 못할지라도, 삼국의 차이를 드러내고 상호 이해를 도모하자는 것이 이번 학술회의의 소박한 목표이며 성과라고 할 것이다.

이번 학술회의에서는 19세기 이후 한·중·일 삼국이 상호 관련된 전쟁유적이 주된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예상한대로 전쟁유적에 대한 한·중·일 삼국의 기억과 인식은 상호 대립하는 등 많은 차이점을 드러냈다. 일본의 경우 전쟁 및 평화기념관이 다양하고 전쟁유적도 잘 보전되고 있고, 전쟁유적을 통해서 평화를 지향하는 연구 및 시민운동도 활성화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전쟁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피해를 강조한'평화'의 이름으로 가려지고, 야스쿠니 신사의'부정적 유산'이'긍정적 유산'으로 대체되는 현실이 엄연히 존재하는 문제점을 일본은 과제로 안고 있었다.

전쟁 유적을 보는 한·중·일의 상이한 시각

한편, 중국은 전쟁기념관 또는 항일기념관 등이 매우 많이 분포하고 있고, 전쟁유적 또한 잘 보전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중화의 부흥'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동북아 평화의 개념을 거론하는 정도로 진전되지 않았다. 한국은 독립기념관·항일기념관 등 민족주의 인식 일변도로 일본의 침탈을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고 피해의식을 감추는 '역사 망각'이 심하여 아직까지 전쟁유적을 보편적 시각에서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특히 대만의 경우에는 일본의 지배와 중국 본토세력의 진출에 따른 아이덴티티 문제에 대한 논의가 동북아 평화 인식의 선결 과제임이 드러났다.

그러나 전쟁의 역사기억을 안으로 들여다보면, 각국 간에 차이점 못지않게 강한 공통성이 드러났다. 기조발표를 한도진순 교수의 지적대로, 동북아 삼국은 애국주의 또는 민족주의를 기조로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국강병과 전쟁으로 이어졌던 일본 근대화의 과정이 현재 중국의 경제적 성장에 따른 중화주의 부흥으로 이어지며, 한국에서는 불리한 기억을 망각시키고 자랑스러운 역사를 부각시키는 뉴라이트 역사인식으로 또한 이어지는 상호연관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한·중·일 삼국 간에 대립·충돌하는 기억과 망각을 넘어서서 상호 이해와 소통의 평화 연대로 나아가자는 기조발표는 이번 학술회의에서 충분히 공감대를 형성했다고 보인다.

그러기에 한·중·일 삼국 간에 대립·충돌하는 기억과 망각을 넘어서서 상호 이해와 소통의 평화 연대로 나아가자는 기조발표는 이번 학술회의에서 충분히 공감대를 형성했다고 보인다. 그럼에도 국경을 넘어선 보편적 평화 추구와 민족주의의 극복이 포스트모던 담론에 머물지 않고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과제로 다가서기까지 많은 과제가 남아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서승 교수의 지적대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이 해소되지 않은 채 엄연히 존재하고, 국가권력이 이루어놓은 민족주의의 신화를 해체하지 않고 국경을 넘어서려는 시도가 가능한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과 절차등이 앞으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한·중·일의 전쟁유적을 평화의 초석으로"

필자는 이번 학술회의에서 제주도에 구축되었던 일본군 군사유적을 중심으로 그 현황과 역사적 의미를 정리하여 발표하였다. 이번에 발표된 여러 지역의 사례를 보면서 공통적으로 느낀 소감은 중국의 난징·뤼순, 대만, 일본의 나가사키·오키나와, 한국의 인천·제주도 등 대표적인 동아시아 전쟁 유적들이 지리적으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대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쟁의 전략적 요충지에는 일반적으로 타국의 유적이 많으며, 또한 전쟁요충지는 대부분 평화 시 타국과의 교류와 협력의 가교이자 현장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도진순 교수의 지적은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곧 전쟁의 기억과 평화의 염원이 중첩되는 지역으로서, 미래지향적인 곳으로 승화시켜 나갈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지역을 중심으로 동북아의 역사평화벨트를 서로 연결하여 서로 교류하고 전쟁을 기억하며 평화를 실천적으로 이야기하는 운동을 전개한다면, 전쟁의 유적지는 새로운 미래를 여는 평화의 자산으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본다.

이번 학술회의에서 전쟁유적을 통해 모색된 평화의 초석이 앞으로 동아시아의 관련 학자를 넘어서서 평화운동가, 예술인, 일반 학생 및 시민들까지 평화운동에 동참하는 발판이 되었으면 한다. 또한 앞으로 제노사이드, 인권 침해, 마이너리티의 문제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동아시아적 접근이 시도되었으면 한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지속적인 관심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