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조·일양국의 통상적인 통교업무가 이루어진 곳은 부산의 왜관이다. 왜관에는 대마번의 선박이 입항하였고 평균 400~500명에 이르는 대마번 사람들이 체류하면서 통교업무를 수행하였다. 수백 명의 일본인들이 머물다 보니 왜관과 그 주변에서는 정규 통교업무 외에 갖가지 형태의 분쟁과 불법행위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 중의 하나가 공인된 무역 업무의 이면에서 이루어지는 밀무역이었다.
조선의 문헌에 의하면 무역이 재개된 직후부터 조선정부가 밀무역에 엄형주의(嚴刑主義) 정책을 취하여 밀무역자를 효수했음을 알 수 있는데, 반면 조선이 그러한 밀무역의 상대방인 일본인을 처벌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점차 조선은 상대편 일본인에게도 조선인과 동일한 형벌을 적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강화했고 대마번을 상대로 오랜 교섭과 절충을 거친 끝에 1682년(계해년) 관련조항을 담은「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하는데 성공했다. 밀무역이 발각되면 당사자인 조선인은 물론이거니와 상대편 일본인까지 조선에서 처형한다는 약조가 성립된 것이다.
그러나 계해약조는 조·일간의 밀무역 통제정책이라는 측면에서는 획기적인 성과였지만 실제로는 밀무역에 대한 판정 여부 또는 재정적인 이익을 우선시한 묵인 등 다양한 요인이 작용하여 제대로 이행되지 않은 예가 적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인삼 밀무역 처벌을 둘러싼 갈등
예를 들어 1688년 사건의 경우 소통사를 비롯한 네 명의 조선인이 왜관 내에서 인삼을 겐키치라는 자에게 밀매하였는데 조선인 세 명은 그해 11월 사형이 집행되었다. 조선이 계해약조를 강조하며 일본인의 동죄처벌을 요구하자 대마번은 관련자의 인도를 거부했고 사건처리에서도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같은 11월에는 왜관의 일본인이 부산주민 2명에게 노보세를 주고 관내에서 수십 석의 쌀을 구매한 일이 발각되었는데 이 사건의 당사자도 비밀리에 대마도로 귀국했다. 그러자 조선에서는 계해약조의 유명무실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런데 당시 조선의 인삼무역 정책과 대마번의 태도를 함께 고려해 보면 이 사건은 한 개인에 의해 행해진 단순한 밀무역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정부는 1686년부터 1692년에 걸쳐 왜관 개시무역에서 조선인삼의 매매를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정책을 취했다(예물로 지급하는 인삼은 예외). 밀매매 등에 의해 조선인삼의 국외 유출량이 증가하는 것을 막고 국내의 약용 수요에 충당시킬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개시무역 거래품 중에서 18세기 중엽까지 대마번이 가장 중시하던 수입품은 인삼이었다. 조선인삼은 일본에서도 약효와 효능이 높이 평가되면서 고가로 거래되고 있었다. 대마번은 이러한 조선인삼의 수입과 일본 국내시장에서의 판매를 독점함으로서 높은 수익을 향유할 수 있었다. 그런 만큼 조선정부의 인삼매매 금지정책으로 인해 난감해진 대마번은 번차원에서 밀무역을 감행했던 것이다. 1688년 발각된 겐키치의 인삼구입 사건은 당시 번차원에서 추진하던 인삼 밀구입 활동 중 그 일부가 표면화된 것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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