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한국에서는 동아시아의 역사화해를 논의하는 국제학술대회가 자주 열리고 있다. 내가 한국과 일본이 역사갈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역사인식의 상호이해를 위한 역사대화를 활발히 추진해야 한다고 역설한 때가 불과 10여 년 전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격세지감이다. 나는 1998-99년에 한국과 일본에서『日本의 論理- 轉換期의 歷史敎育과 韓國認識』,『 韓國의 論理- 轉換期의 歷史敎育과 日本認識』,『 韓國と日本-歷史敎育の思想』을 출간하여, 한국과 일본에서 내셔널리즘을 부추기는 역사교육이 대두하고 있고, 그것이 한·일의 상호이해와 우호증진에 걸림돌이 될 것이기때문에, 상생공영의 역사인식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후 10여 년동안 한국과 일본은 역사인식을 둘러싸고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나는 우려가 현실이 된 상황을 무척 안타깝게 여기며 일본의 역사연구자, 역사교육자 등과 함께 역사갈등의 극복방법을 활발히 모색했다. 되돌아 보건대, 일본과 역사대화를 나누겠다고 결심한 것은 아래와 같이 아주 소박한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1979년 4월부터 1982년 3월까지 일본에 유학했다. 3년 동안의 유학생활은 몸과 맘이 대단히고달팠다. 주변 사람들은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일본에 간다고 하니 식민주의사관에 물들거나 친일파가 될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어떤 친구는 일본이 싫다고 3년 동안 내내 나에게 편지 한 장 쓰지 않았다. 동경대학의 아까몽이나 교정에는 한국의 유신독재를 비난하는 붉은 글씨의 대자보가 항상 서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사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의 신문과 방송은 신이 나서 한국의 암울한 정치상황을 시시콜콜 보도하는 데 열을 올렸다.
일본 유학시절의 씁쓸한 기억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이 공수특전단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짓밟히자 한국정부에 대한 일본의 지성계와 매스컴의 비난은 절정에 달했다. 유명한 소설가인 司馬遼太郞은 강연과 기고에서 한국정치가 극한적 대립에서 허덕이는 것은 다양한 견해를 용인하지 않는 유교 원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한국인이 합리적 행위를 하지 못하는 것은 화폐경제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식의 한국사관을 늘어놓았다. 주요 신문과 방송은 한국이라는 나라가 마치 이디 아민(Idi Amin)의 포악한 통치 아래 신음하고 있던 아프리카의 우간다와 비슷한 처지인 것처럼 연일 떠들어댔다. 한국인도 일본인처럼 커피를 마시고, 영화를 보며, 사랑을 속삭인다는 엄연한 사실은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나는 수치감과 모멸감 때문에 두문불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쩌다 일본어를 연습한다는 핑계로 동네의 선술집에 가서 이웃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그들은 한국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더구나 한·일관계의 역사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근대에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고 지배한 사실조차 몰랐다. 대학생들도 상황은 비슷했다. 내가 청강하던 과목의 학생들은 한국의 군부독재를 규탄하고 민주정치를 촉구하기 위해 가끔 수업거부의 스트라이크를 벌였다. 그들과 한국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눠봤지만 제대로 아는 것은 거의 없었다. 이래저래 씁쓸한 기분을 짓씹으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서'한류'붐이 일어 유학생이 대접을 받고 있는 지금의 상황과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다.
이럭저럭 석사논문을 마치고 박사과정 진학을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서울에서 은사가 오셨다. 일본에 더 있으면 친일파 소리를 듣게 되고, 그러면 취직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니 이쯤에서 귀국하여 나머지 공부는 서울대학교에서 하는 게 어떠냐는 말씀이었다. 한참 망설이다가 귀국하여 母校母科에서 학과 일을 보게 되었다. 그 직후인 1982년 여름, 유학 중에 함께 공부한 일본인 친구들이 서울에 놀러 왔다. 그 때 서울은'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사건'으로 인해 반일감정이 들끓고 있었다. 택시는 일본인의 승차를 거부하고, 가게는 일본인의 출입을 사절하는 상황이었다.
상호존중과 상생의 역사인식을 위하여
내가 친구들을 모교로 안내하자 어떤 선생님은 그들을 앉혀놓고 일본인의 잘못된 역사인식을 꾸짖는 강의(?)를 두 시간이나 계속했다. 통역을 하면서 벌레 씹은 듯 한 친구들의 표정을 훔쳐보았다. 그들의 곤혹스런 모습은 유학 중의 나의 처지와 흡사했다. 일본이나 한국이 모두 정치일변도의 편협한 역사관과 상대관에 물들었던 시절의 한 장면이라고 하더라도 나의 뇌리에서는 결코 지워질 수 없는 생생한 경험이었다.
이런 체험을 계기로 하여 원래의 전공 이외에 한국과 일본의 역사인식을 비교검증하고 상호이해를 촉진하는 작업을 벌여나갔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와 나라는 개인과 개인의 경우와 달라서, 서로 아무리 사이가 나쁘다 하더라도 이사할 수가 없다. 그것이 운명이라면, 서로 존중하고 협력하며, 함께 생존하고 번영하는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먼저 한·일관계의 역사를 정확히 알고 상생의 역사인식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위와 같은 소박한 목적의식 아래 기회 있을 때마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대화에 기꺼이 참가하여 발표와 토론을 거듭했다. 그 성과는 이미 많은 저작을 통해 소개되었으므로 부연하지 않겠다. 앞으로도 30여 년 전의 소중한 체험을 반추하며 일본과 역사대화를 계속해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