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재단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로고 동북아역사재단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로고 뉴스레터

기고
2·8독립선언 3·1운동 90주년에 부쳐
  • 다즈케 가즈히사(田附和久) 재일본 한국YMCA 2·8독립선언기념자료실장
3·1운동 관련사진

재일본 한국YMCA는 1906년, 당시 도쿄에 거주 중이던 조선인유학생들이 설립한 곳으로 한국YMCA 중에서는 서울YMCA(1903년창립) 다음으로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특히 1919년 2월 8일, 3·1독립운동에 불을 붙인 도쿄유학생들에 의한 2·8독립선언이 선포된 장소로도 잘 알려져 있다. 지금은 한국인 유학생뿐만 아니라 일본에 거주 중인 모든 한국인 그리고 일본인과 세계 각국에서 모인 외국 국적을 가진 시민들을 대상으로 청소년 육성사업을 비롯한 다양한 사업과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재일본 한국 YMCA는 창립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대한민국국가보훈처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아 2008년 5월 회관 내에 2·8독립선언기념자료실을 개설했다. 필자는 학창 시절 한국어와 한국 근대사를 전공하고 이곳에서 자료 수집, 전시 등의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자료실에서는 당시의 조선인유학생들이 독립선언을 작성하고 발표하기까지의 경위, 운동의 전개과정, 3·1운동에 미친 영향, 그리고 3·1운동으로부터 4년이 경과한 1923년에 발생한 관동대지진에서 자행된 조선인학살 참극 등에 관한 자료 및 설명 패널을 전시, 소개하고 있다.

이 중 전시 패널을 살펴보면 많은 조선인 유학생,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두명의 일본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한 명은 2·8독립선언 선포 후 체포된 학생들의 변호를 담당한 변호사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1880- 1953)이며 그리고 또 한 명은 독립운동의 근거지인 YMCA를 일본인의 관리 하에 편입시키려던 관헌의 기도를 정면에서 반대하는 논진을 펼쳐 이 YMCA를 지킨 당시 일본을 대표하는 정치학자인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 1878-1933)다.

후세와 요시노는 어떻게 조선인의 친구가 되었나

일본인 중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한국병합, 조선식민지지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던 당시, 조선인의 주장을 대변하고 조선인 유학생과 독립운동가를 지킨 그들은 극히 보기 드문 일본인이었다. 관동대지진 발생 직후 혼란한 틈을 타'선량한'일반 시민들이 날조된 유언비어를 믿은 채 조선인 학살에 가담하는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냉정하게 행동하였으며 그 후 더 나아가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학살에 가담하지 않고 어떻게 냉정하게 진정한 지식인다운 행동을 실천할 수 있었을까? 그 이유를 생각할 때 중요한 두 가지 점을 지적하고 싶다. 하나는 두 사람이 조선인 학생이나 민중들을 일상적으로 접하고 친구라는 관계를 통해 인격적인 교류를 하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또 하나는 그들이 일본과 조선의 역사적 관계를 바르게 이해하고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던 당시 상황은 비정상이라고 이전부터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해 격랑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기 이전,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조선통신사 교류로 상징되듯이 비교적 양호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청·일, 러·일 두 전쟁의 승리에 도취되어 역사를 잊어버린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민중이건 지식인이건 할 것 없이 조선인을 경시하고 일본의 조선 지배를 당연시 여겼다. 그러나 후세와 요시노와 같은 극히 일부 사람들은 일본과 조선이 오랫동안 이어온 교류의 역사를 바르게 인식하고 당시 상황에 거센 위화감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인이라고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대등한 인격을 가진 친구로서 일상적인 교류의 기회를 가졌다. 어린 시절 한학 교육을 받은 후세는 중국과 조선에 대한 존경심을 품고 있었으며 법률학교 학생이었던 시절부터 조선인 유학생과 자주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리고 요시노도 1916년의 조선시찰여행 이후 일본의 통치를 정당하게 여겼던 과거의 인식을 수정하게 되면서 많은 조선인 유학생들과 교류하였고 특히 도쿄의 조선YMCA 총무를 맡고 있던 백남훈과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고 전해진다.

인격적 교류와 냉정한 역사 인식을

2·8독립선언, 3·1운동으로부터 9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일본과 한국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고 관광 등을 통해 상호 방문자수가 증가하고 상대국가의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우호 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듯 보인다. 민간 차원의 교류가 활발해진 덕분에 설령 정치가들의 망언 등이 터지더라도 심각한 일이 아니고서는 양국이 충돌할 수 있는 위험한 지경 까지는 번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양국의 평화적 우호관계를 더욱 강력하면서도 굳건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가일층의 노력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관동대지진 때 과오를 범하지 않았던 후세와 요시노를 본받아 우리들은 일상적인 교류를 지속하고 이와 동시에 역사에서 배우려는 노력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일본과 한국 모두 경제성장과 개발에 지나치게 치우친나머지 젊은 세대들은 공통적으로 과거 역사에 대한 관심을 점차 잃어버리고 있다.

한편 세계화의 진전과 세계 규모의 경제위기 속에서 배타적 자민족우월주의를 바탕으로 한 역사관이 쉽게 유포될 수 있다는 점도 경계해야 한다. 이웃과의 인격적 교류를 쌓아가면서 냉정하게 과거 역사와 직면하려는 자세는 세계화가 진전되는 세계 속에서 지구촌 모든 시민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소양이다.

2007년 가을 팔레스타인의 YMCA 동료들과 교류하기 위해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등 이스라엘의 군사 점령 하에 놓여 있는 도시를 방문한 적이 있다. 파괴와 수탈이 일상적으로 자행되는 현장을 시찰하고 현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접하면서 지금까지 책을 통해서만 알고 있었던 이민족에 의한 군사 점령과 지배가 얼마나 비인도적인 행위인지를 절실히 통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현재의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은 관계였던 한국인과 일본인이 지금도 몇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고는 하나 오늘날 화해와 공존을 성취할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선인들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깨닫고 존경심이 더욱 커졌다.

화해와 공존을 향해 걷기 시작한 한·일 양국의 젊은이들이 과오와 고난의 역사를 똑똑히 직시하고 그 기반 위에 더욱 활발하게 교류를 추진하여 지금도 화해와 공존이 실현되지 않는 땅에서 평화의 사자로 일할 수 있도록 키워가야 한다. YMCA와 당 자료실은 이러한 만남, 배움, 교류 그리고 각자가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계속해서 제공하는 장소가 되기 위해 앞으로도 노력해 가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