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재단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로고 동북아역사재단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로고 뉴스레터

기고
안중근의 동양평화사상에 대한 음미
안중근의 동양평화 사상에 대한 음미
이태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최근 신문 지상에 "동아시아 경제 유럽 앞지른다"는 보도가 있었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GDP 즉 국내총생산이 2009년에 12조 670억 달러로 유로 존과 같아지고 2012년에는 14조7509억 달러로 유로 존의 13조 1865억 달러를 크게 추월할 것으로 여러 경제연구기관들이 예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중·일 3국과 아세안 10개국 등 동아시아권의 경제력이 갈수록 신장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피부로 느끼고 있다. 이런 동아시아 경제의 약진 속에 동아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보는 눈도 달라질 수밖에 없고 또 달라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경제적 신장에 박수를 보내면서 만족감에 젖어 있을 때는 물론 아닐 것이다.

19세기 중반에 크루프 대포를 장치한 증기선을 타고 온 서양 열강국의 사절단이 문호를 개방할 것을 강요했을 때 동아시아 세계에는 두 가지 과제가 던져 졌다. 하나는 서양의 우수한 기계문명을 수용하여 산업경제를 일으키는 것, 다른 하나는 자주 독립국 간의 국제법적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다. 전자는 일본, 한국에 이어 중국까지 개혁개방정책으로 자본주의 경제가 급속히 신장하여 거의 달성되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후자는 아직도 초보적인 수준에서 맴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중·일 3국간에 역사인식의 차이로 역사분쟁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국제법 질서를 만들어낸 유럽 국가들조차 국제법의 정신과 취지에 어긋나게 양육강식의 수렁에 빠졌을 때가 있었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 그 극명한 예이다. 그러나 독일이 과거의 잘못에 대한 진정한 사과를 표함으로써 국제법적 질서로서의 EU 유럽연합이 성공적으로 이끌어지고, 오늘날에는 리스본 조약을 통해 대통령을 뽑아 EU가 국제정치 단위로서 기능할 날을 코앞에 두고 있다.

EU 보다 70년이나 앞선 안중근의 동양평화 구상

동아시아 세계를 바로 유럽에 비교할 수는 없다. 국가의 분포나 걸어온 역사에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그러나 평화 공존을 위한 국제법 준수의 정신은 본받을 필요가 있다. 도덕 철학자 에마뉴엘 칸트의 만년의 저작인 『영구평화론』은 1920년의 국제연맹의 탄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이라고 한다 동아시아에 왜 칸트사상과 같은 것이 없겠는가. 도덕 철학이라면 동아시아의 전통적 사상과 종교가 더 강하지 않았던가. 100년 전 하얼빈 역두에서 거짓 동양평화론으로 한국의 국권을 빼앗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은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이란 글을 지어 한·중·일 3국이 진정한 평화를 이룩할 날을 기원하였다. 의거 100주년을 전후하여 그의 평화사상이 칸트의 『영구평화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근본적으로 동아시아의 전통 사상인 유교의 인(仁)의 사상이 토대가 되어 칸트의 평화사상을 쉽게 이해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그가 남긴 많은 유묵들이 그의 유교적 소양을 그대로 보여준다. 칸트의 철학은 인간의 존엄성을 가장 중요시 하여 이를 지켜주는 국가 체제로서 민주국가를 지지하고, 민주 국가의 주권을 보장하는 국제 관계로 국제연맹과 같은 구성을 가장 바람직 한 미래의 국제 관계로 제시하였다. 중국의 석학인 양계초(梁啓超)는 『음빙실문집』에서 칸트의 이러한 평화사상을 요령 있게 소개하였다. 높은 수준의 유교적 학식의 소지자인 안중근은 이 책을 통해 칸트의 도덕주의적 평화사상에 절대적 공감을 가지면서 옥중에서 숙고의 시간을 가지면서 「동양평화론」을 쓰기 시작 하였다. 그의 사변은 공감의 영역을 넘어 창의의 세계로까지 나아갔다.

그는 한·중·일 3국이 서양 열강의 침범을 막는 구체적 방안으로서 세 나라 청년들로 구성되는 공동 군단의 편성을 먼저 거론하였다. 여기서 그는 이의 성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청년들의 우애심이라고 판단하여 군단의 부대원으로 뽑힌 청년들은 반드시 다른 두 나라의 언어를 익히도록 하자고 하였다. 그리고 서양의 경제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3국이 공동으로 사용할 화폐를 발행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를 위한 은행을 군단의 본거지인 뤼순에 설치하고 화폐의 보급을 위해 각국 주요 도시에 지점을 두자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은행 설치를 위한 자금은 세 나라 국민들을 대상으로 회원제를 시행하면 수억 엔을 모으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하였다. 이것이 성공하면 태국, 인도로 확대하기를 제안하기도 하였다. 안중근의 이런 구상은 EU 보다 70여년이 앞서는 것으로서 20세기 초에 세계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무엇이 이를 가능하게 하였는지는 앞으로 우리들의 중요한 연구과제이지만 기본적으로 일본의 잘못된 무사도를 비판할 수 있는 사상적 기초가 없었다면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칸트 철학과의 만남에 못지않게 그의 유교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롬

동아시아 전통에서 발견하는 평화공존의 사상

동아시아의 역사학자들은 동아시아의 전통에서 평화공존의 사상을 재발견하여 동아시아 미래에 빛을 던지는 임무를 수행해야 동아시아의 역사학이 존재하는 이유가 설 것이다. 최근 일본역사학계에서 지금까지 지켜온 탈아론적 역사인식에 대한 엄정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중국, 한국의 근세는 명나라, 조선왕조가 다같이 무력로 일어나 문치로 왕조를 유지한 반면, 일본 근세의 도쿠가와(德川) 막부는 무력으로 일어나서 무(武)를 없애지 않고 다만 동결한 상태에서 통치체제를 이어간 차이가 지적된다. 그리고 그 동결된 무는 메이지유신을 계기로 다시 풀려 최신 무기로 무장한 다음 큰 전쟁의 역사를 만들게 된 것으로 재조명하고, 그 침략의 역사를 지금까지 일본 역사학계가 탈아론으로 정당화, 합리화 시켜온 것은 아닌지를 반성해 보자고 하였다. 탈아론의 합목적적 윤색은 21세기 동아시아의 평화체제 수립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므로 이제 일본 역사학계가 그런 자위의 시각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는 지적이다.

일본의 탈아론적 역사인식은 동아시아의 가치재발견에 분명히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일본 역사의 일탈성은 멀리 유럽으로 비행하기 전에 동아시아 전통의 보편성이라는 관점에서 먼저 음미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동아시아 세계의 발전에 일본이 적극적으로 기여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탈아론을 고수한다면 중국, 한국 등 다른 나라와의 대화 자체가 어려운 것을 일본 지식인들은 직시해야 할 것이다.